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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경제지도 바꾸는 ‘철의 실크로드’

동북아 경제지도 바꾸는 ‘철의 실크로드’

핀란드 외교부의 마르쿠 하이스카넨 아태국장은 심포지엄 내내 잔뜩 고무된 표정이었다. 핀란드는 유럽연합(EU) 가입국 중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나라다. 지난 6월 17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철의 실크로드’ 심포지엄에 참석한 그는 핀란드가 이 사업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줄곧 강조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TSR : Train- Siberian Railway)를 통해 핀란드로 들어오는 한국 제품은 지난 2년 동안 다섯배로 늘었다. 하이스카넨은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에게 “핀란드는 EU의 물류 중심지가 되길 바란다”며 “남북 철도가 연결돼 TSR가 활성화된다면 물류 사업이 핀란드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사업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는 북한 대표인 박정성 철도성 대외철도협조국장의 “북남 철도 연결은 물론 시베리아 철도 연결 사업도 중단없이 진행할 것”이라는 말을 누구보다 환영했을 것이다. 이날 심포지엄은 ASEM 21개 회원국과 EU 집행위, 그리고 ASEM 비회원국 중 철의 실크로드 노선이 통과하는 북한과 러시아·몽골·카자흐스탄·체코의 정부 대표와 민간 전문가들, 그리고 국제기구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철의 실크로드 사업의 관건 중 하나인 남북 철도 연결 문제. 박정성 북한 대표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러 왔다”며 과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철의 실크로드 사업을 두고 벌어지는 각국의 각축은 19세기 말엽의 아시아 정세를 연상시킨다. 당시 서구 열강들은 앞다투어 동북아에 진출, 자원 개발과 철도 건설에 나섰다. 이 사업에 가장 관심을 보이고 있는 러시아는 이미 지난 2002년 TSR의 전철화를 완성하고 철도 수송망을 통한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제창하고 나서 차르시대의 ‘동진정책’을 다시 선보이고 있다.

러시아는 철도 수송망을 통해 운송 이익을 챙기면서 동시에 시베리아 자원 개발에 한국·일본 등이 적극 나서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TSR의 종착기지를 확보하기 위한 체코와 폴란드의 경쟁도 볼 만하다. TSR의 러시아 노선이 광궤(철로의 가로폭이 1천5백20mm, 남한과 북한은 1천4백35mm의 표준궤)이기 때문에 남부에 러시아와 같은 광궤 노선을 가진 폴란드는 화물기지를 건설, 서유럽 진출의 전진기지로 활용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체코는 철도가 연결되는 도시인 보후민을 TSR의 종착기지로 만들 계획이다.

TSR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보고 있는 나라는 핀란드다. 러시아와 같은 광궤 철도망을 가진 핀란드는 TSR의 북부 종착기지이기도 하다. 궤간이 같아 환적이 필요없는 데다 자국의 항구를 통해 서유럽으로 물류를 수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스카넨은 “핀란드는 EU의 첫번째 관문으로 동북아 철도 수송망에서 지리적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과 30여년 이상 외교 관계를 가져온 몇 안 되는 유럽 국가인 핀란드는 남북 철도 연결의 가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러시아가 국내 철도 운임보다 통과 운임을 싸게 매기고 있는 것도 핀란드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 러시아를 최종 목적지로 하는 물류보다 러시아를 거치는 물류의 운임이 저렴하기 때문에 핀란드에서 하역하고 다시 러시아로 들여올 정도다.

물론 철의 실크로드는 남북 철도 연결로 완성된다. 그 때문에 오는 10월 예정된 경의선의 시범 운행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경의선은 남북 정상회담 이후인 2002년 9월 착공돼 2년여만에 운송이 개시되는 것이다. 물류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서는 북한 철도의 개량 문제가 남아 있기 하지만 일단 남북 철도의 물리적 연결은 완성되는 셈이다.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의 나희승 남북철도기술개발사업단 단장은 “경의선 시범 운행을 하면서 북한 철도 인프라 실태와 운영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며 “소규모 상업 운행을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경의선이 상업적으로도 활용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철도를 통한 물류 네트워크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경의선 시범 운행은 철의 실크로드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얘기다.

남북 철도 연결 문제를 포함한 철의 실크로드 사업은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SCAP)에서 오래 전부터 추진해온 일이다. 당초에는 아시아 남부와 유럽을 잇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 노선을 재건하는 사업으로 시작됐으나 통과국 간의 정치적 갈등과 기술적 문제가 겹쳐 1990년대 이후 아시아 북부와 러시아·유럽을 잇는 북부 노선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북부 노선의 중심축은 가장 방대한 지역을 가진 러시아와 중국이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기 직전 벨기에 노동당 당수를 만나 중국쪽 서해안 철도를 상품 수송루트로 활용해 연간 4억달러를 벌 수 있고, 동해안 철도를 통해 연간 10억달러를 벌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0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해 합의한 ‘모스크바 선언’은 북한이 철의 실크로드 사업에 적극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 선언은 극동아시아 개발과 물류 수송의 이익을 창출하려는 러시아측 전략과 북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교통개발연구원의 안병민 연구원은 “러시아는 그동안 미국과 유럽·일본을 중심축으로 한 해상 수송 주도의 국제 물류 흐름을 TSR를 통해 육상 철도 수송으로 바꿔놓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TSR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나라는 바로 한국이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물량이 많았지만 최근 들어 일본의 물량은 대폭 줄어들었다. 동유럽과 러시아에서는 일본 제품이 가격 경쟁력 면에서 한국 제품에 밀리기 때문이다.

관련 업계에서는 TSR를 통한 한국 화물 수송량을 연간 10만TEU 정도로 추산한다. 한국의 가전 제품과 자동차 부품, 레진과 같은 화학 제품 재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TSR 전문 운송업체로 15년 이상 러시아 철도를 이용해온 우진글로벌로지스틱스의 이강석 이사는 “최근 들어 러시아 경제가 회복되면서 수송 물량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최근 두번째 고객으로 떠오르는 중국의 경우도 한국 업체가 중국 현지에서 생산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사실상 한국은 TSR 수송을 통한 이점을 가장 많이 보고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러시아 TSR 사무국의 부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대아트랜스의 박경호 사장은 최근 삼성전자·현대자동차·LG전자 관계자들과 함께 러시아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러시아가 TSR 물동량이 늘어나자 최근 철도 운임을 인상했기 때문이다. 박사장은 “현재의 운임으로는 해상 수송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런 추세로라면 TSR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TSR와 함께 중국 횡단 철도(TCR : Train-China Railway), 만주 횡단 철도(TMR : Trans-Manchuria Railway), 몽골 횡단 철도(TMGR : Trans-Mongolia Railway)등이 떠오르면서 제기되는 것이 바로 경제성 문제다.

TCR의 경우 인천이나 평택항을 통해 해상 운송을 하는 것이 운송비 면에서 한국에 유리하다. 현재 부산항에서 TSR를 통해 핀란드까지 약 18일에서 21일이 소요된다고 한다. 해상으로는 대략 35일이 걸린다. TMGR나 TCR는 몽골이나 카자흐스탄 등 여러 나라를 거치기 때문에 국경 통과에 소요되는 시간 비용이 만만치 않다. TCR의 경우는 중국 내륙 수송보다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성 등 동북 3성과의 물자 수송에 경제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서유럽의 경우도 TSR를 통한 수송보다 해상 수송이 더 낫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박사장이 철의 실크로드 사업의 장밋빛 미래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철의 실크로드 사업의 경제성이 한국에서는 다소 과장됐다는 얘기다. 새로운 수송 루트가 개발돼 다른 수송로와 경쟁을 벌이고 그로 인해 운송 비용이 낮아진다면 업계로선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열차 속도와 궤간 변화에 따른 물자의 환적 문제 등 비용을 상승시킬 만한 요소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결국 철의 실크로드에 따르는 수송로 가운데 한국이 유리하게 활용할 만한 것은 TSR를 통한 러시아·동유럽의 물자 수송, TCR를 통한 동북 3성과의 교류, TMGR를 통한 몽골의 자원 개발 정도다.

남북 철도 연결 문제도 마찬가지다. 연결된다 하더라도 경제성이 없으면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현재 북한 철도의 속도는 시속 25∼60km 정도로 알려져 있다. 경의선만이 국제 화물 운송의 표준 속도인 시속 40km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남북한 철도가 연결된다 하더라도 북한의 철도 상태로는 화물의 중량을 감당할 수가 없고, 정해진 기일에 맞춘 수송도 불가능하다. 안병민 연구원은 “북한의 철도는 개·보수하지 않는다면 10년 이내에 못쓰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가 방북 당시 살펴본 북한의 철도는 일제 강점기에 놓인 것을 그대로 방치해 곳곳에 침목이 부서져 있었고, 철로가 쓸 수 없을 정도로 마모돼 있었다.

철의 실크로드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북한 철도의 개량이 필수적이지만 현재까지 이렇다 할 대안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북한 철도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조사도 없는 상태다. 러시아가 2001년부터 3년 동안 북한의 동해선 실사를 벌인 바에 따르면, 해당 노선의 개·보수에 25억∼31억달러가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러시아측 실사자료는 부분적으로 공개됐을 뿐이다.

이보다 더 신뢰할 만한 실측 자료는 1998년 북한의 대외경제협력추진위와 중국 옌볜(延邊)주 연합대표단이 조사한 내용이다. 북한 나진과 중국 난양(南陽)간 1백58.7km의 개·보수 비용을 추정한 이 자료에서 총 비용은 약 5백70억원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측 구간의 개·보수에는 km당 4억∼5억원이 필요하다는 분석이었다. 북한은 철도망을 개·보수했을 때 2008년까지 9년간 매년 10%씩 화물 수송량이 증가할 것이며, 개·보수 완료 후 8년 6개월 뒤면 투자액을 회수할 수 있으리라 전망한 바 있다.

러시아는 모스크바 선언 이후 경제적 여력이 없어 북한 철도 개량 사업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수도인 평양을 관통하는 경의선보다 동해선에 더 집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동해선을 통해 철의 실크로드를 잇겠다는 북한의 계획은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안병민 연구원은 “중국과 북한이 추산한 비용은 북한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건 아래 이뤄진 것”이라며 “이 정도 소요액이라면 관련국들이 컨소시엄을 통해 개·보수 사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북한 철도 개량 사업은 현재 국제 컨소시엄을 구성하자는 제안만 나온 상황이다. 철길이 지나는 국가들 간의 운송협약 등과 같은 국제간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철도는 새로운 물류 패턴에 적합한 수송로로 부각되고 있다. 소비자의 기호가 다양하고 상품 주기가 빨라지면서 선박을 이용한 대규모 수송은 부분적으로 철도 수송에 그 자리를 내주고 있다. 물류 수송이 소품종·다변화됐다는 얘기다. 게다가 철도는 철길을 중심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파급 효과’가 크다. 일제가 만주철도 부설을 통해 대륙 침략을 감행했던 것도 바로 철도의 이같은 산업 연관 효과 때문이다. 철의 실크로드를 완성하는 남북한 철도 연결 사업은 북한에 개혁·개방의 물결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철의 실크로드의 완성은 결국 북핵 문제 해결을 포함한 북한의 태도 변화에 달려 있다.

동시에 이것은 외국과의 물류 수송을 99% 이상 해상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에도 또 다른 수송로가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주요 해상 운송로인 남중국해는 중국과 대만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위험 요인을 안고 있고, 말라카 해협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국가전략 차원에서도 해상 운송로를 대체할 새로운 수송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나희승 단장은 “식민지 개척 경험이 있는 중국이나 러시아는 국가 차원의 장기 플랜을 세우고 그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며 “19세기 말 열강이 한반도에서 철도 연결을 두고 경쟁을 벌이던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한국이 더욱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남한 못지 않게 북한도 곱씹어봐야 할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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