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싸인 ‘고독한 전사’
베일에 싸인 ‘고독한 전사’
The Solitary Soldier
존 케리는 어디서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뉴스위크가 그의 세인트폴 고교 시절 급우 90여명 중 약 30명에게 케리와 친했던 친구들의 이름을 대보라고 하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대다수는 몇몇의 이름을 댄 후 케리가 누구와 자주 어울렸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예일대 시절 케리는 모임에 간다, 옷을 갈아입는다고 하면서 늘 바삐 움직였다. 그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한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파벌이 심한 매사추세츠주 정계에서 케리는 ‘부잣집 도련님’이나 ‘라이브 샷’(카메라를 독차지하려는 사람)으로 불렸다. 배타적인 연방 상원의원 휴게실에서도 케리는 쉬운 놀림감이었다. 2002년 어느 금요일 늦은 오후 상원의원들이 그곳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몇몇 동료가 멋지게 차려 입은 시골 유지풍의 케리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조 바이든 상원의원(델라웨어주)도 비슷한 옷차림이었다. 케리는 “왜 나만 갖고 그래? 바이든도 나처럼 입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그를 놀리던 이들 중 한명은 “그렇지만 자네 옷이 그의 것보다 네배는 비싸”라고 꼬집었다. 케리를 온전히 포용해준 것은 그의 전우들밖에 없는 듯하지만 그중에서도 일부는 케리가 나중에 반전운동가로 변신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최근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케리는 자신이 그렇게 냉담하고 쌀쌀한 사람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그는 진지하면서도 약간은 간청하는 듯한 태도로 자신이 왜 ‘무뚝뚝한’ 인상을 주게 됐는지 설명했다. 인터뷰에 임하는 그의 태도는 오히려 좀 겸손하고 심지어는 유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작고 검으며 움푹 파인 눈은 그토록 오랫동안 공직에서 명예롭게 일을 해온 자신이 이제 와서 고교 시절 인기가 없었던 이유와 지금도 놀림감이 되곤 하는 이유를 왜 설명해야 하느냐고 묻는 듯했다. 당연한 질문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학창시절 급우들에게 말쑥한 차림의 이기주의자라고 조롱받지 않았던가. 미래에 위대한 인물이 될 사람이 반드시 어린 시절에도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불확실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내면에 상식과 바른 판단이 뚜렷이 정립돼 있고, 확신에 차있는 듯 보이는 지도자를 원한다. 때로 케리는 다소 지나치게 자기 확신에 찬 인물로 평가되곤 한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 그것은 좀 더 웃고, 장황하게 말하지 말고, 돌아온 JFK처럼 보이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적인 자리에서의 케리는 (때로는 사석에서도) 여전히 뻣뻣하고 경직돼 있다. 때로 그는 겉은 우아하지만 속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소품을 만드느라 황급하게 움직이는 일꾼들이 들어 있는 무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들 중 일부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의 냉담함과 불투명함은 유권자들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신념을 종종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키는 면은 있지만 간단하게 전달할 줄 안다. 반면 케리는 지칠 정도로 장황한 설명이 필요한 듯하다. 때로는 지나치게 신중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혹은 그가 베트남전에서 고속정을 상륙시킨 뒤 뛰어내려 로켓포로 무장한 베트콩을 쫓아가 사살한 용기와 결단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리고 많은 정적들이 예비선거에서 패배를 시인하기 직전까지 그를 과소평가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케리는 뉘앙스와 미묘함을 좋아한다. 아마도 자신의 삶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모순적인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모순적인 욕구들이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사립고교 시절의 케리를 본다면 ‘위선자’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케리는 상원의원으로서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참된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실용주의자다. 그가 어떤 그룹에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독립심이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케리는 여행 끝에 마시는 마티니 술맛 때문만이 아니라 바람·바위·파도 그 자체가 좋아서 항해를 한다. 그는 악천후에 도전하고 자신만의 길을 찾는 것을 즐긴다. 그를 이해하려면 어두운 밤의 안개를 헤치고 항해하는 그를 탐구해야 한다.
케리 가계의 가족사 중 절반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 로즈메리는 1630년 미국의 유명한 첫 정치 연설문을 쓴 매사추세츠 초대 주지사 존 윈드롭의 직계 자손이다. 그녀의 결혼 전 성(케리의 중간 이름)은 포브스다. 그것은 지금도 가족 휴양지로 매사추세츠 해안의 한 섬을 소유하고 있는 19세기 한 부호 가문의 성이다. 그러나 케리의 어머니는 형제가 11명이었던 탓에 그 이름에 걸맞은 부를 물려받지 못했다.
케리는 아버지쪽 가계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2003년 그는 보스턴 글로브지의 한 기자로부터 자신의 조부가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콘에서 케리로 바꾸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미국에서 많은 돈을 벌고 또 잃은 뒤 1921년 보스턴의 한 호텔 화장실에서 머리에 총을 쏴 자살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자신의 가족사에 대한 케리의 오랜 무지와 심지어 무관심, 그리고 그런 사실을 들었을 때 받았다는 갑작스러운 충격은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케리라는 이름은 아일랜드 이름처럼 들린다.
매사추세츠주에는 정치적으로 활발한 아일랜드계 가톨릭 인구가 많다는 점을 감안할 때 표를 얻어야 하는 케리로서는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지 않았을까? 뉴스위크의 질문에 케리는 처음엔 “한번도 그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나중에는 “16세나 17세쯤에 할아버지가 빈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지만 그게 다였다. 난 늘 그들이 아일랜드인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일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빈 출신이 어떻게 영국인이나 아일랜드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는 가운데 그가 2000년 사망한 부친에게 가족 배경에 대해 묻기를 꺼렸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중간급 외교관이었던 부친 리처드 케리는 격식을 차리며 과민하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케리는 “아버지에게서는 항상 깊은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비밀이나 자신의 약점을 털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케리의 전 처남이자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자부하는 데이비드 손은 케리와 아버지는 서로 경원시하고 경쟁적인 사이였다고 말했다.
케리의 부친은 아들을 혹독하게 다룬 것 같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케리의 동생 캐머런은 저녁 식탁에서 벌어진 세계 정세에 대한 토론에서 아버지가 젊은 존 케리의 ‘순진한’ 생각을 꺾으려 했었다고 말했다. 예일대 시절 케리의 룸메이트였던 댄 바비에로는 “그의 아버지는 만족시키기 어려운 인물로 모든 것을 숙달하고 통제할 것을 요구했었다”고 말했다.
어머니 로즈메리는 동네에서 빈병들을 모으고, 가진 자들은 남들에게 베풀 의무가 있다는 점을 설파하는 사회적으로 온정 있는 사람이었다. 2002년 임종시 그녀가 케리에게 한 유언은 “정직하게 살라”였다. 냉전이 한창인 1950년대 초 부친이 베를린에서 근무할 때 겨우 10세였던 케리는 스위스의 기숙학교 몬타나 인스티튜트로 보내졌다. 그는 “1백50명의 이탈리아인들과 50명의 독일인들 사이에서 미국 학생은 3명 뿐이었다. 그 아이들이 얼마나 거친가”라고 말했다. 케리의 기숙사 친구였던 악셀 퓨저스는 이탈리아 아이들이 방학을 지내고 돌아오는 날은 마치 “지옥 같았다”고 돌이켰다.
그런 호된 신고식과 향수병에 대해 케리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잘함으로써, 그리고 그런 사실을 그들이 깨닫도록 함으로써 대응했다. 학교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가정통신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케리는 자신의 성적으로 인해 좀 지나친 자신감을 갖게 됐으며 때때로 부드러운 제재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케리는 1957년 13세 때 세번째 기숙학교(그리고 부모의 잦은 전근에 따른 일곱번째 학교)인 세인트폴에 입학했다.
케리의 오만한 듯한 자신감은 이 학교에서 그를 지켜주는 보호막 역할을 했다. 케리는 “색다른 종류의 유머감각과 서열 체계를 접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겉에서 보면 세인트폴은 격식을 따지지 않으며 자만한 듯한, 어떤 일관된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학교는 대다수 고교처럼 미묘한 서열과 동아리들이 횡행했다. 그 서열의 꼭대기에는 ‘레그즈’(regular guys)가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뉴욕의 사립학교 출신들로 다른 학생들로부터 많은 시샘을 샀다. 케리는 ‘레그즈’에 가까웠지만 완전히 그 부류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장학생이었던 리처드 드러비어는 그를 ‘잘난 체하는 녀석’으로 기억한다.
급우들에 따르면 가톨릭계인 점이 케리의 교우관계에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은 듯하며 어머니가 명문가 출신인 것도 그의 부족한 재력을 보완했다(외가쪽 친척이 그의 학자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는 ‘대죄’를 저질렀다. 그 시절 대입예비 사립학교의 학생들은 냉소적이고 무기력한 태도를 보였지만 “케리는 친구들의 환심을 사고 싶어했다”고 케리의 급우였던 존 루스매니어는 말했다.
케리에게는 이 학교 최초의 흑인 교사(그리고 훗날 워싱턴주의 성공회 주교)인 존 워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게 행운이었다. 워커는 케리를 비롯해 바비에로처럼 ‘왕따’당하던 학생들에게 해리 벨라폰테의 음반을 들려주고 랠프 왈도 에머슨의 글을 읽도록 권했다. 케리는 정치와 국제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그 탓에 너무 진지한 태도를 갖고 있다고 조롱받았다. 그는 JFK에 푹 빠졌으며 학내 토론에서 JFK의 편을 들었다. 1964년 졸업생인 데이비드 아이언스는 “그것은 용기가 없었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정치와 사회 정의는 젊은이들의 유행과 거리가 멀었다”고 말했다.
케리는 1962년 9월 예일대에 입학했다. 예일대는 그의 적성에 더 맞았다. 케리는 입학 후 첫번째 주말, 자신의 룸메이트이자 세인트 폴 동기생이었던 바비에로에게 캠퍼스의 건물들, 특히 예일대에서 가장 권위있는 비밀 서클 ‘스컬 앤드 본스’의 건물을 구경시켜주면서 학교가 무척 마음에 든 듯했다.
케리는 항상 목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렸다”고 손은 말한다. 룸메이트였던 하비 번디는 “케리는 이 모임에서 저 모임으로 전전하며 방을 수시로 들락거려 친구를 가깝게 사귈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케리는 모임에 적극 참여했으며 서클이 많은 예일대에서 그것은 눈길을 끄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국무부 서신양식에 편지를 쓰는 등 사소한 과시적 행동으로 몇몇 라이벌들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의 논쟁 파트너인 윌리엄 (칩) 스탠베리는 그에게 “이봐, ‘미국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표시는 이제 좀 그만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케리는 인기를 끌던 급진주의자 리처드 퍼싱과 친구로 지낼 만큼 여유로운 모습도 보였다(훗날 베트남전에서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케리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반전의식이 싹텄다). 예일대 시절 케리는 비행 강습을 받고 여름에 유럽대륙 횡단 자동차 여행에 나서 과속주행을 하는 등 무모한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차에 함께 타는 것이 무서웠다”고 바비에로는 말했다.
베트남전 당시 케리의 고속정 대원들은 통제 가능한 위험에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케리의 열정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견뎌내야 했다. 언젠가 기습공격을 받자 케리는 도망가기는커녕 뱃머리를 돌려 포탄이 날아오는 쪽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기로 결정했다. 몇몇 대원들에 따르면 처음 그의 부하들은 대경실색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케리의 대담성이 실제로 영리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보트는 근접해 적을 격파할 수 있었던 반면 적은 목표물을 맞히기가 더 어려워졌던 것이다. 긴급상황에서 케리가 보여주는 냉정함은 돋보였다. 그가 뱃머리를 돌린 후 총알이 빗발치는 속에서 자신의 다친 한쪽 팔을 뱃머리 건너로 뻗어 물에 빠진 사람을 끌러올리는 이미지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케리의 대원들은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를 흠모하는 것 같다. 이들은 케리가 마음을 활짝 열고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그룹이다. 최근의 한 재회 모임에서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에서 따와 이름을 지은 이들 ‘밴드 오브 브러더스’는 그들의 옛 상사에게 농을 던지고 놀릴 수 있었다. 케리도 곧바로 뉴스위크에 실릴 사진을 찍기 위해 메이크업을 한 그들을 놀려댔다. “자네들은 샌님들처럼 보이는구만.”
케리의 전쟁 기록에 대한 논란은 끝없이 반복됐다.
케리 스스로도 자신의 전투 경험을 거론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한 가벼운 외상을 내세워 명예 전상장(戰傷章)을 탄 데 대해 비판받았으며 귀국 후 반전 지도자가 됐을 때 전쟁의 잔학상을 과장한 데 대해 비난받았다. 그러나 때때로 더 본질적인 문제가 간과된다. 유복한 아이비 리그 출신들 대다수가 베트남전 동안 기숙사 방에서 스쿼시 경기 중 입은 부상으로 징집면제를 받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릴 동안 케리는 그 시대 최대의 시련과 도덕적 위기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케리는 첫 정계 입문 실패(1970, 72년 하원의원 낙선)를 “맹목적 이상주의와 순진함” 탓으로 돌린다. 그는 자신에게 조 케네디 같은 아버지나 ‘허니 피츠’ 피츠제럴드 케네디 같은 조부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애석해한다. “그런 아버지나 조부가 있었다면 내게 (근로자가 대다수인 보수적인 선거구에서 장발의 반전 후보로 출마하다니)‘너 미쳤니?’라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케리는 지난 20년 동안 상원에서 동료로 지낸 에드워드 케네디를 “좋은 스승”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가 상원에서 인맥을 쌓아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정계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인맥보다는 이슈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결국 사람이었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됐다.”
그는 보스턴 칼리지 로스쿨에 다닌 뒤 지방검사보를 지내면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장황하며 웅변조인 연설로 그는 매사추세츠주에서 주류 민주당 인사들의 조롱감이 됐다. 민주당 매사추세츠주 지부장인 필립 존스턴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케리는 케네디와 함께 선거운동을 하면서 그를 모방하려고 애썼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미 연방 상원의 민주당 의원 휴게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테디는 친절하고 말주변이 좋았다”고 밥 케리 전 상원의원은 말했다. “그런데 존 케리는 늘 부정적인 쪽으로 비교됐다.”
케리는 복잡한 가정생활 때문에 더욱 동료 상원의원들과 친하게 지낼 수 없었다. “케리는 주말만 되면 딸들과 같이 지내기 위해 매사추세츠주로 가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 동료들과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고 그의 수석 참모였던 조너선 와이너가 말했다. 케리의 첫번째 아내 줄리아 손은 심한 우울증으로 1982년 별거를 요구했다. 케리는 두 딸 알렉산드라와 바네사를 위해 한주에 두번씩 보스턴에 가기도 했다. 케리과 줄리아는 1988년 결국 이혼했다.
1980년대에 케리는 때때로 소파에서 자고 친구집에서 지냈다. 그는 재산을 탕진했지만 2만달러짜리 고속 모터보트와 8천달러짜리 이탈리아제 경주 모터사이클을 구입했다. “케리는 늘 돈을 좋아했다”고 손은 말했다. “그는 상류사회에 드나들고, 좋은 집에서 살며, 여행을 좋아했기 때문에 돈을 원했다.”
1995년 케리와 결혼한 테레사 하인즈는 1980년대와 90년대 초 케리의 방황을 “집시 시절”이라고 부른다. 10억달러 이상의 재산을 가진 테레사는 케리에게 새 집 다섯채와 원하는 모든 놀잇감을 다 사주었다. 그녀는 199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첫 남편 존 하인즈 상원의원을 자주 언급해 사람들의 의아심을 샀다. 그러나 지금까지 간과된 것은 그녀가 케리에게 제공한 지원이다. 거기에는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케리가 지금까지 받지 못했던 정서적인 온정도 포함된다.
테레사와 케리는 우아한 조지타운 저택에서 저명인사들의 파티를 자주 열었다. ‘우리가 최고’라는 자만심으로 가득찬 그 파티는 늘 진지한 분위기였다. 그 때문인지 케리는 자신의 지적인 사고력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조 바이든은 케리에게 설명을 그만하고 “그냥 할 말을 하라”고 충고했다. 케리의 참모들도 케리가 변호사처럼 문제점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데 질릴 정도다.
그런데도 케리의 참모들은 충성심으로 이름높다. 그리고 이슈에 관한 그의 철저한 논증은 해묵은 문제에 관한 새로운 시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케리는 미국의 인종문제가 좀더 완벽한 해결책을 필요로 하는 듯했던 1992년 예일대에서 어퍼머티브 액션(여성 및 소수민족 우대 정책)의 효과에 이의를 제기하는 솔직한 연설을 했다. 그러자 민주당 골수 지지파들은 신성한 정책에 감히 의문을 제시한다며 그를 호되게 비난했다. 케리는 그 뒤로는 그 문제에 관해 그처럼 단호한 언급을 회피했다. 그러나 1998년 그는 민주당의 또다른 신성불가침 주제인 고교 교사들의 정년 문제에 대해 섣불리 이의를 제기해 곤경에 처했다.
케리는 분열을 조장할 수 있는 민감한 문제도 정면으로 다루었다. 그것은 그가 인기를 얻으려는 기회주의자라는 평판과 배치된다. 케리는 베트남전 실종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성된 상원 소위원회에서 침착한 중재자 역할을 함으로써 처음에는 회의적이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회의 도중 매케인과 찰스 그래슬리 상원의원(아이오와주) 사이의 설전이 과열되자 케리는 주먹질이 오갈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그렇게 감정이 격해진 와중에서도 그는 모두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실종자의 생존 가능성을 배제하는 최종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케리는 더 큰 목표를 위해 적과 동맹을 맺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이란-콘트라 스캔들 조사를 위해 우익 지도자인 제시 헬름스 상원의원과 협력했다. 또 케리는 인기가 전혀 없는 이슈에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기꺼이 손을 댔다. 그는 정부가 국민들에게 홍수지대에 집을 짓도록 허용하고는 홍수로 파손된 집을 다시 짓도록 계속 돈을 대주는 것이 모순이라고 생각하고 홍수 보험 관련법의 수정을 위해 애썼다.
케리는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레이건처럼 설득력이 뛰어난 ‘그레이트 커뮤니케이터’(Great Communicator)가 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평생 자신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대담하고 강단 있으면서도 양심적이고 신중한 공복(公僕)이 됐다.
대다수의 대통령 후보들은 같이 농담하며 실수를 범했을 때는 알려줄 수 있는 정계 동료 같은 신뢰하는 친구와 같이 다니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케리는 그 대신 기타를 치거나 흘러간 영화를 보며 고독한 여정을 즐긴다. 지난 7월 4일 밤 케리는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유세용 전세기에 15분 정도 머물렀다. 사람들은 기상 때문이라고 추측했지만 사실은 그가 영화 ‘꿈의 구장’을 마저 보느라고 그랬다. 그것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영화는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 자아를 찾기 위해 별난 여행에 나선 사람이 아이오와주에서 꿈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늘 가만히 있지 못하는 케리는 아직도 이곳저곳을 다니며 꿈을 찾는 것 같다.
With RICHARD WOLFFE, ANDREW ROMANO, ARIAN CAMPO-FLORES, SUSANNAH MEADOWS,
T. TRENT GEGAX and ERIC P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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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리는 어디서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뉴스위크가 그의 세인트폴 고교 시절 급우 90여명 중 약 30명에게 케리와 친했던 친구들의 이름을 대보라고 하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대다수는 몇몇의 이름을 댄 후 케리가 누구와 자주 어울렸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예일대 시절 케리는 모임에 간다, 옷을 갈아입는다고 하면서 늘 바삐 움직였다. 그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한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파벌이 심한 매사추세츠주 정계에서 케리는 ‘부잣집 도련님’이나 ‘라이브 샷’(카메라를 독차지하려는 사람)으로 불렸다. 배타적인 연방 상원의원 휴게실에서도 케리는 쉬운 놀림감이었다. 2002년 어느 금요일 늦은 오후 상원의원들이 그곳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몇몇 동료가 멋지게 차려 입은 시골 유지풍의 케리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조 바이든 상원의원(델라웨어주)도 비슷한 옷차림이었다. 케리는 “왜 나만 갖고 그래? 바이든도 나처럼 입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그를 놀리던 이들 중 한명은 “그렇지만 자네 옷이 그의 것보다 네배는 비싸”라고 꼬집었다. 케리를 온전히 포용해준 것은 그의 전우들밖에 없는 듯하지만 그중에서도 일부는 케리가 나중에 반전운동가로 변신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최근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케리는 자신이 그렇게 냉담하고 쌀쌀한 사람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그는 진지하면서도 약간은 간청하는 듯한 태도로 자신이 왜 ‘무뚝뚝한’ 인상을 주게 됐는지 설명했다. 인터뷰에 임하는 그의 태도는 오히려 좀 겸손하고 심지어는 유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작고 검으며 움푹 파인 눈은 그토록 오랫동안 공직에서 명예롭게 일을 해온 자신이 이제 와서 고교 시절 인기가 없었던 이유와 지금도 놀림감이 되곤 하는 이유를 왜 설명해야 하느냐고 묻는 듯했다. 당연한 질문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학창시절 급우들에게 말쑥한 차림의 이기주의자라고 조롱받지 않았던가. 미래에 위대한 인물이 될 사람이 반드시 어린 시절에도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불확실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내면에 상식과 바른 판단이 뚜렷이 정립돼 있고, 확신에 차있는 듯 보이는 지도자를 원한다. 때로 케리는 다소 지나치게 자기 확신에 찬 인물로 평가되곤 한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 그것은 좀 더 웃고, 장황하게 말하지 말고, 돌아온 JFK처럼 보이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적인 자리에서의 케리는 (때로는 사석에서도) 여전히 뻣뻣하고 경직돼 있다. 때로 그는 겉은 우아하지만 속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소품을 만드느라 황급하게 움직이는 일꾼들이 들어 있는 무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들 중 일부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의 냉담함과 불투명함은 유권자들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신념을 종종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키는 면은 있지만 간단하게 전달할 줄 안다. 반면 케리는 지칠 정도로 장황한 설명이 필요한 듯하다. 때로는 지나치게 신중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혹은 그가 베트남전에서 고속정을 상륙시킨 뒤 뛰어내려 로켓포로 무장한 베트콩을 쫓아가 사살한 용기와 결단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리고 많은 정적들이 예비선거에서 패배를 시인하기 직전까지 그를 과소평가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케리는 뉘앙스와 미묘함을 좋아한다. 아마도 자신의 삶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모순적인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모순적인 욕구들이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사립고교 시절의 케리를 본다면 ‘위선자’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케리는 상원의원으로서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참된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실용주의자다. 그가 어떤 그룹에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독립심이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케리는 여행 끝에 마시는 마티니 술맛 때문만이 아니라 바람·바위·파도 그 자체가 좋아서 항해를 한다. 그는 악천후에 도전하고 자신만의 길을 찾는 것을 즐긴다. 그를 이해하려면 어두운 밤의 안개를 헤치고 항해하는 그를 탐구해야 한다.
케리 가계의 가족사 중 절반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 로즈메리는 1630년 미국의 유명한 첫 정치 연설문을 쓴 매사추세츠 초대 주지사 존 윈드롭의 직계 자손이다. 그녀의 결혼 전 성(케리의 중간 이름)은 포브스다. 그것은 지금도 가족 휴양지로 매사추세츠 해안의 한 섬을 소유하고 있는 19세기 한 부호 가문의 성이다. 그러나 케리의 어머니는 형제가 11명이었던 탓에 그 이름에 걸맞은 부를 물려받지 못했다.
케리는 아버지쪽 가계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2003년 그는 보스턴 글로브지의 한 기자로부터 자신의 조부가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콘에서 케리로 바꾸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미국에서 많은 돈을 벌고 또 잃은 뒤 1921년 보스턴의 한 호텔 화장실에서 머리에 총을 쏴 자살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자신의 가족사에 대한 케리의 오랜 무지와 심지어 무관심, 그리고 그런 사실을 들었을 때 받았다는 갑작스러운 충격은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케리라는 이름은 아일랜드 이름처럼 들린다.
매사추세츠주에는 정치적으로 활발한 아일랜드계 가톨릭 인구가 많다는 점을 감안할 때 표를 얻어야 하는 케리로서는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지 않았을까? 뉴스위크의 질문에 케리는 처음엔 “한번도 그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나중에는 “16세나 17세쯤에 할아버지가 빈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지만 그게 다였다. 난 늘 그들이 아일랜드인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일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빈 출신이 어떻게 영국인이나 아일랜드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는 가운데 그가 2000년 사망한 부친에게 가족 배경에 대해 묻기를 꺼렸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중간급 외교관이었던 부친 리처드 케리는 격식을 차리며 과민하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케리는 “아버지에게서는 항상 깊은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비밀이나 자신의 약점을 털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케리의 전 처남이자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자부하는 데이비드 손은 케리와 아버지는 서로 경원시하고 경쟁적인 사이였다고 말했다.
케리의 부친은 아들을 혹독하게 다룬 것 같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케리의 동생 캐머런은 저녁 식탁에서 벌어진 세계 정세에 대한 토론에서 아버지가 젊은 존 케리의 ‘순진한’ 생각을 꺾으려 했었다고 말했다. 예일대 시절 케리의 룸메이트였던 댄 바비에로는 “그의 아버지는 만족시키기 어려운 인물로 모든 것을 숙달하고 통제할 것을 요구했었다”고 말했다.
어머니 로즈메리는 동네에서 빈병들을 모으고, 가진 자들은 남들에게 베풀 의무가 있다는 점을 설파하는 사회적으로 온정 있는 사람이었다. 2002년 임종시 그녀가 케리에게 한 유언은 “정직하게 살라”였다. 냉전이 한창인 1950년대 초 부친이 베를린에서 근무할 때 겨우 10세였던 케리는 스위스의 기숙학교 몬타나 인스티튜트로 보내졌다. 그는 “1백50명의 이탈리아인들과 50명의 독일인들 사이에서 미국 학생은 3명 뿐이었다. 그 아이들이 얼마나 거친가”라고 말했다. 케리의 기숙사 친구였던 악셀 퓨저스는 이탈리아 아이들이 방학을 지내고 돌아오는 날은 마치 “지옥 같았다”고 돌이켰다.
그런 호된 신고식과 향수병에 대해 케리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잘함으로써, 그리고 그런 사실을 그들이 깨닫도록 함으로써 대응했다. 학교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가정통신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케리는 자신의 성적으로 인해 좀 지나친 자신감을 갖게 됐으며 때때로 부드러운 제재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케리는 1957년 13세 때 세번째 기숙학교(그리고 부모의 잦은 전근에 따른 일곱번째 학교)인 세인트폴에 입학했다.
케리의 오만한 듯한 자신감은 이 학교에서 그를 지켜주는 보호막 역할을 했다. 케리는 “색다른 종류의 유머감각과 서열 체계를 접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겉에서 보면 세인트폴은 격식을 따지지 않으며 자만한 듯한, 어떤 일관된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학교는 대다수 고교처럼 미묘한 서열과 동아리들이 횡행했다. 그 서열의 꼭대기에는 ‘레그즈’(regular guys)가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뉴욕의 사립학교 출신들로 다른 학생들로부터 많은 시샘을 샀다. 케리는 ‘레그즈’에 가까웠지만 완전히 그 부류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장학생이었던 리처드 드러비어는 그를 ‘잘난 체하는 녀석’으로 기억한다.
급우들에 따르면 가톨릭계인 점이 케리의 교우관계에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은 듯하며 어머니가 명문가 출신인 것도 그의 부족한 재력을 보완했다(외가쪽 친척이 그의 학자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는 ‘대죄’를 저질렀다. 그 시절 대입예비 사립학교의 학생들은 냉소적이고 무기력한 태도를 보였지만 “케리는 친구들의 환심을 사고 싶어했다”고 케리의 급우였던 존 루스매니어는 말했다.
케리에게는 이 학교 최초의 흑인 교사(그리고 훗날 워싱턴주의 성공회 주교)인 존 워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게 행운이었다. 워커는 케리를 비롯해 바비에로처럼 ‘왕따’당하던 학생들에게 해리 벨라폰테의 음반을 들려주고 랠프 왈도 에머슨의 글을 읽도록 권했다. 케리는 정치와 국제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그 탓에 너무 진지한 태도를 갖고 있다고 조롱받았다. 그는 JFK에 푹 빠졌으며 학내 토론에서 JFK의 편을 들었다. 1964년 졸업생인 데이비드 아이언스는 “그것은 용기가 없었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정치와 사회 정의는 젊은이들의 유행과 거리가 멀었다”고 말했다.
케리는 1962년 9월 예일대에 입학했다. 예일대는 그의 적성에 더 맞았다. 케리는 입학 후 첫번째 주말, 자신의 룸메이트이자 세인트 폴 동기생이었던 바비에로에게 캠퍼스의 건물들, 특히 예일대에서 가장 권위있는 비밀 서클 ‘스컬 앤드 본스’의 건물을 구경시켜주면서 학교가 무척 마음에 든 듯했다.
케리는 항상 목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렸다”고 손은 말한다. 룸메이트였던 하비 번디는 “케리는 이 모임에서 저 모임으로 전전하며 방을 수시로 들락거려 친구를 가깝게 사귈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케리는 모임에 적극 참여했으며 서클이 많은 예일대에서 그것은 눈길을 끄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국무부 서신양식에 편지를 쓰는 등 사소한 과시적 행동으로 몇몇 라이벌들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의 논쟁 파트너인 윌리엄 (칩) 스탠베리는 그에게 “이봐, ‘미국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표시는 이제 좀 그만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케리는 인기를 끌던 급진주의자 리처드 퍼싱과 친구로 지낼 만큼 여유로운 모습도 보였다(훗날 베트남전에서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케리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반전의식이 싹텄다). 예일대 시절 케리는 비행 강습을 받고 여름에 유럽대륙 횡단 자동차 여행에 나서 과속주행을 하는 등 무모한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차에 함께 타는 것이 무서웠다”고 바비에로는 말했다.
베트남전 당시 케리의 고속정 대원들은 통제 가능한 위험에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케리의 열정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견뎌내야 했다. 언젠가 기습공격을 받자 케리는 도망가기는커녕 뱃머리를 돌려 포탄이 날아오는 쪽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기로 결정했다. 몇몇 대원들에 따르면 처음 그의 부하들은 대경실색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케리의 대담성이 실제로 영리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보트는 근접해 적을 격파할 수 있었던 반면 적은 목표물을 맞히기가 더 어려워졌던 것이다. 긴급상황에서 케리가 보여주는 냉정함은 돋보였다. 그가 뱃머리를 돌린 후 총알이 빗발치는 속에서 자신의 다친 한쪽 팔을 뱃머리 건너로 뻗어 물에 빠진 사람을 끌러올리는 이미지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케리의 대원들은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를 흠모하는 것 같다. 이들은 케리가 마음을 활짝 열고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그룹이다. 최근의 한 재회 모임에서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에서 따와 이름을 지은 이들 ‘밴드 오브 브러더스’는 그들의 옛 상사에게 농을 던지고 놀릴 수 있었다. 케리도 곧바로 뉴스위크에 실릴 사진을 찍기 위해 메이크업을 한 그들을 놀려댔다. “자네들은 샌님들처럼 보이는구만.”
케리의 전쟁 기록에 대한 논란은 끝없이 반복됐다.
케리 스스로도 자신의 전투 경험을 거론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한 가벼운 외상을 내세워 명예 전상장(戰傷章)을 탄 데 대해 비판받았으며 귀국 후 반전 지도자가 됐을 때 전쟁의 잔학상을 과장한 데 대해 비난받았다. 그러나 때때로 더 본질적인 문제가 간과된다. 유복한 아이비 리그 출신들 대다수가 베트남전 동안 기숙사 방에서 스쿼시 경기 중 입은 부상으로 징집면제를 받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릴 동안 케리는 그 시대 최대의 시련과 도덕적 위기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케리는 첫 정계 입문 실패(1970, 72년 하원의원 낙선)를 “맹목적 이상주의와 순진함” 탓으로 돌린다. 그는 자신에게 조 케네디 같은 아버지나 ‘허니 피츠’ 피츠제럴드 케네디 같은 조부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애석해한다. “그런 아버지나 조부가 있었다면 내게 (근로자가 대다수인 보수적인 선거구에서 장발의 반전 후보로 출마하다니)‘너 미쳤니?’라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케리는 지난 20년 동안 상원에서 동료로 지낸 에드워드 케네디를 “좋은 스승”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가 상원에서 인맥을 쌓아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정계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인맥보다는 이슈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결국 사람이었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됐다.”
그는 보스턴 칼리지 로스쿨에 다닌 뒤 지방검사보를 지내면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장황하며 웅변조인 연설로 그는 매사추세츠주에서 주류 민주당 인사들의 조롱감이 됐다. 민주당 매사추세츠주 지부장인 필립 존스턴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케리는 케네디와 함께 선거운동을 하면서 그를 모방하려고 애썼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미 연방 상원의 민주당 의원 휴게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테디는 친절하고 말주변이 좋았다”고 밥 케리 전 상원의원은 말했다. “그런데 존 케리는 늘 부정적인 쪽으로 비교됐다.”
케리는 복잡한 가정생활 때문에 더욱 동료 상원의원들과 친하게 지낼 수 없었다. “케리는 주말만 되면 딸들과 같이 지내기 위해 매사추세츠주로 가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 동료들과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고 그의 수석 참모였던 조너선 와이너가 말했다. 케리의 첫번째 아내 줄리아 손은 심한 우울증으로 1982년 별거를 요구했다. 케리는 두 딸 알렉산드라와 바네사를 위해 한주에 두번씩 보스턴에 가기도 했다. 케리과 줄리아는 1988년 결국 이혼했다.
1980년대에 케리는 때때로 소파에서 자고 친구집에서 지냈다. 그는 재산을 탕진했지만 2만달러짜리 고속 모터보트와 8천달러짜리 이탈리아제 경주 모터사이클을 구입했다. “케리는 늘 돈을 좋아했다”고 손은 말했다. “그는 상류사회에 드나들고, 좋은 집에서 살며, 여행을 좋아했기 때문에 돈을 원했다.”
1995년 케리와 결혼한 테레사 하인즈는 1980년대와 90년대 초 케리의 방황을 “집시 시절”이라고 부른다. 10억달러 이상의 재산을 가진 테레사는 케리에게 새 집 다섯채와 원하는 모든 놀잇감을 다 사주었다. 그녀는 199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첫 남편 존 하인즈 상원의원을 자주 언급해 사람들의 의아심을 샀다. 그러나 지금까지 간과된 것은 그녀가 케리에게 제공한 지원이다. 거기에는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케리가 지금까지 받지 못했던 정서적인 온정도 포함된다.
테레사와 케리는 우아한 조지타운 저택에서 저명인사들의 파티를 자주 열었다. ‘우리가 최고’라는 자만심으로 가득찬 그 파티는 늘 진지한 분위기였다. 그 때문인지 케리는 자신의 지적인 사고력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조 바이든은 케리에게 설명을 그만하고 “그냥 할 말을 하라”고 충고했다. 케리의 참모들도 케리가 변호사처럼 문제점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데 질릴 정도다.
그런데도 케리의 참모들은 충성심으로 이름높다. 그리고 이슈에 관한 그의 철저한 논증은 해묵은 문제에 관한 새로운 시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케리는 미국의 인종문제가 좀더 완벽한 해결책을 필요로 하는 듯했던 1992년 예일대에서 어퍼머티브 액션(여성 및 소수민족 우대 정책)의 효과에 이의를 제기하는 솔직한 연설을 했다. 그러자 민주당 골수 지지파들은 신성한 정책에 감히 의문을 제시한다며 그를 호되게 비난했다. 케리는 그 뒤로는 그 문제에 관해 그처럼 단호한 언급을 회피했다. 그러나 1998년 그는 민주당의 또다른 신성불가침 주제인 고교 교사들의 정년 문제에 대해 섣불리 이의를 제기해 곤경에 처했다.
케리는 분열을 조장할 수 있는 민감한 문제도 정면으로 다루었다. 그것은 그가 인기를 얻으려는 기회주의자라는 평판과 배치된다. 케리는 베트남전 실종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성된 상원 소위원회에서 침착한 중재자 역할을 함으로써 처음에는 회의적이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회의 도중 매케인과 찰스 그래슬리 상원의원(아이오와주) 사이의 설전이 과열되자 케리는 주먹질이 오갈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그렇게 감정이 격해진 와중에서도 그는 모두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실종자의 생존 가능성을 배제하는 최종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케리는 더 큰 목표를 위해 적과 동맹을 맺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이란-콘트라 스캔들 조사를 위해 우익 지도자인 제시 헬름스 상원의원과 협력했다. 또 케리는 인기가 전혀 없는 이슈에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기꺼이 손을 댔다. 그는 정부가 국민들에게 홍수지대에 집을 짓도록 허용하고는 홍수로 파손된 집을 다시 짓도록 계속 돈을 대주는 것이 모순이라고 생각하고 홍수 보험 관련법의 수정을 위해 애썼다.
케리는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레이건처럼 설득력이 뛰어난 ‘그레이트 커뮤니케이터’(Great Communicator)가 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평생 자신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대담하고 강단 있으면서도 양심적이고 신중한 공복(公僕)이 됐다.
대다수의 대통령 후보들은 같이 농담하며 실수를 범했을 때는 알려줄 수 있는 정계 동료 같은 신뢰하는 친구와 같이 다니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케리는 그 대신 기타를 치거나 흘러간 영화를 보며 고독한 여정을 즐긴다. 지난 7월 4일 밤 케리는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유세용 전세기에 15분 정도 머물렀다. 사람들은 기상 때문이라고 추측했지만 사실은 그가 영화 ‘꿈의 구장’을 마저 보느라고 그랬다. 그것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영화는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 자아를 찾기 위해 별난 여행에 나선 사람이 아이오와주에서 꿈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늘 가만히 있지 못하는 케리는 아직도 이곳저곳을 다니며 꿈을 찾는 것 같다.
With RICHARD WOLFFE, ANDREW ROMANO, ARIAN CAMPO-FLORES, SUSANNAH MEADOWS,
T. TRENT GEGAX and ERIC P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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