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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피하고 싶으면 그늘로 가라

태양을 피하고 싶으면 그늘로 가라

대낮의 뜨거운 햇볕이 그대를 미치게 할 수도 있으니 먼 이국의 피서지로 가거나 한밤중의 꿈 속으로 망명을 떠나라. 먼 이국으로 떠날 수 없다면, 그 대체재로 시원한 극장을 떠올릴 수 있다. 올 여름 공연계와 영화계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다. 이 불황의 유황불 속에서 그나마 ‘개량형 복고’들이 살아 남아 손짓을 보낸다. 어려운 때일수록 과거의 향수로 빠져드는 퇴행이 고개를 들게 마련이다. 여기에 현대적인 손질을 한 것들이 소개할 작품들이다.

뮤지컬 ‘달고나’
서랍 속에서 불러낸 추억


올 여름 수십개나 되는 뮤지컬의 홍수 속에서 빛을 발하는 두 작품이 있다면 류정한과 조승우가 열연을 펼치는 ‘지킬 앤 하이드’와 복고풍 뮤지컬 ‘달고나’다. 그러나 ‘지킬…’보다는 작품성 면에서 ‘달고나’가 윗길이다. 더구나 우리 말과 정서가 살아 있다는 점에서 ‘달고나’는 뻐근한 감동마저 덤으로 안긴다. 혹시 어릴 적 국자 속에서 녹던 달고나에 향수를 느낀다면, 이문세며 송골매며 해바라기의 선율을 자기도 모르게 흥얼댄 적이 있다면 ‘달고나’가 주는 위로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달고나’의 포맷은 사실 새롭지 않다. 영국 웨스트엔드의 ‘맘마미아’, 뮤지컬 ‘와이키키 브라더스’, ‘토요일 밤의 열기’가 유행가를 뮤지컬로 만든 사례들. ‘달고나’가 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극장 문을 나서면서 자기도 모르게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이나 트윈 폴리오의 ‘웨딩 케이크’를 흥얼거리게 된다는 것이다. 저마다 간직한 추억의 서랍 문은 모두 다르겠지만 1970~80년대를 지나온 이라면 서랍 안의 추억을 매만지며 감회에 빠져든다.
슬레이트와 기와로 덮은 지붕, 골목길과 장독대로 옹기종기 꾸민 소극장 무대는 소박하지만 옛 시절을 꽤나 정교하게 축소했다. 비좁은 무대 위로 배우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으면 우리는 최면에 걸리듯 나팔 바지를 입고 거리의 먼지를 쓸고 다니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

추억의 소품을 파는 홈쇼핑 PD인 세우(이계창)는 자신이 쓰던 구식 타자기가 옛 애인 ‘장독대 소녀’(임선애)에게 낙찰되자 젊은 날을 떠올린다. 세우가 장독대 안에 쌓아두었던 연애편지를 훑어갈 때 시계도 거꾸로 돌아간다.
TV를 켜면 요술공주 세리와 짱가가 나오고, 극장 문에 들어서면 선도교사와 학생들이 숨바꼭질을 한다. 그러나 길거리에선 최루탄이 터지고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더빙하는 성우를 등장시키고 무대 위의 스크린을 세워 보여주는 1970년대 영화, 김현식의 ‘골목길’에 맞춰 추는 비닐우산 춤, 아카펠라풍으로 바꾼 ‘사계’(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정취가 ‘달고나’의 맛을 더 깊게 만든다. 16번이나 수정한 대본, 누구 하나 튀지 않으면서도 잘 조화를 이루는 배우의 앙상블, 맛깔난 편곡이 즐길 만하다.
막이 내리고 커튼콜 시간. 배우들이 종이 비행기를 객석으로 날리면서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을 부를 때, 뭉클한 지복(至福)의 순간이다. 우리에게 행복을 주었던 그리운 이들을 호명해도 좋을 시간이다. 9월 5일까지 대학로 아룽구지 극장. (02)739-8288.

연극 ‘선데이 서울’
통속잡지의 눈으로 ‘말세’를 보다


연극 ‘선데이 서울’(연출 박근형)은 1970년대의 통속 잡지 스타일로 2004년을 바라본다. 공연장인 대학로 정미소 극장에 들어서면 복도에 과거의 ‘선데이 서울’ 잡지들이 펼쳐져 있다. 가수 인순이의 아슬아슬한 비키니 차림과 방학기의 만화, 그리고 군사독재 시절의 이면을 탐사하는 르포 기사들이 조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시절의 진실을 2004년 포스트모던식 건축물인 극장 안에서 바라본다는 게 이 연극의 묘미다.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 등이 대본을 썼기 때문일까. 첫 장면부터 들여다보자. 무대 왼쪽 귀퉁이에 남루한 셔츠 차림의 남자가 신입사원 교육을 받는다. 기관총을 쏘아도 뚫리지 않는다는 스웨덴제 냄비 회사다. 부장(영화감독 이무영이 배역을 맡았다)은 세일즈의 핵심은 아줌마 고객으로 하여금 오르가슴을 느끼게 하는데 있다며 개소리를 해대고, 사장(최정우)은 ‘고객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며 설교를 한다. 인생 밑바닥에서 어떻게든 살아 나오려는 우리의 가련한 신입사원 병호(김영민)는 노트에 코를 박고 받아 적느라 바쁘다.

이 무슨 신흥 종교집회 같은 장면인가. 무대 왼쪽의 등이 꺼지자마자 무대 오른쪽의 불이 켜진다. 베르디의 ‘레퀴엠’ 가운데 ‘진노의 날’에 맞춰 2층 무대에선 열광적인 푸닥거리가 열리고 있다. 천국 열쇠를 주겠다는 교주(고수희)의 말에 병호의 아내(권지숙)는 넙죽 절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세일즈 교육 장면과 집회 장면을 빠르고 재치있게 교차 편집하는 이 대목이 객석을 냉탕으로 만들었다가 온탕으로 만들기를 반복한다. 여기에 뼈가 녹는 불치병에 걸린 아내의 수술비를 구하려고 보험사기를 노리는 택시기사 종학(신덕호), 옌볜(延邊) 출신으로 식당에서 일하며 몸도 파는 정자(영화배우 배두나)의 이야기가 한겹씩 얽혀 들어간다.

녹슨 철제 셔터를 인상적으로 배치한 무대는 매우 극적으로 이 영화적 연출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박근형이 이끄는 극단 골목길의 배우들은 과장되지 않은 차분함으로 IMF 이후 ‘말세’를 맞은 서민들의 운명을 연기한다. 웃지 않을 수 없는 코믹한 상황과, 울지 않을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이 서로를 향해 삼투해 들어가는 진풍경이 열린다. 종학의 아내(김광덕)가 가족에게 짐이 될까 두려워 링거 호스를 자르는 장면처럼 연극은 슬며시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8월 15일까지. (02)3672-6989.

영화 ‘인형사’
인형 속의 영혼, 그 서늘한 공포


어릴 적 껴안고 자던 인형에게서 조금이라도 등골 오싹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혹시라도 인형 속에 혼령이 살 수 있다고 믿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인형사’는 분명 서늘한 공포를 안겨줄 것이다. 인형에 귀신이 깃들인다는 설정이 새롭지는 않다. 그러나 귀신의 원혼을 푼다는 복고풍 야담에 사람을 빼다 박은 구체관절인형이라는 트렌디한 소재를 결합해 진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비포장 도로를 한참 달려야 나오는 숲속 미술관. 으스스한 미술관 내부와 시체를 박제로 만들어 축소한 듯한 수백개의 인형들이 뿜어내는 귀기가 만만치 않다. 미술관과 인형작가는 인터넷으로 네명의 남녀를 지명해 초청했다. 이들을 모델 삼아 인형으로 뜰 계획이다. 조각가 해미(김유미), 인형을 ‘입양’한 뒤부터 인형에게 푹 빠져 사는 소설가 영하(옥지영), 여고생 선영(이가영), 사진작가 정기(임형준)가 초대받은 손님이다. 그리고 모델이 되고 싶어 수소문 끝에 왔다는 태승(심형탁)이 합류한다.

‘인형사’는 전형적인 ‘하우스 호러’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처럼 외딴 곳에 초대된 손님들이 영문도 모르게 죽어나가는 공식이 똑같다. 다만 그 살해의 방식이 인형과 연결되어 있다는 게 특이하다. 창백한 표정으로 유령처럼 떠도는 집사의 딸 미나(임은경)와 이 연쇄 살인이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밥도 거른 채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는 인형작가 재원(김보영)의 짓일까. 그것도 아니면 전화선이 이미 끊어져 있는데도 경찰에게 신고를 했다고 시치미를 떼는 미술관장(천호진)의 음모일까.

아마 이 영화를 본 뒤 인형을 이전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화장실과 벽장·문 밑에 숨은 인형의 눈빛은 넋을 뺄 정도로 무섭다. 2억원을 들여 만들었다는 인형들의 섬세한 디자인이야말로 공포의 진원지다. 진정한 공포란 IMF 이후보다 더 어려워졌다는 경제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살짝 트릭을 써서 ‘네 주위의 사물에서 공포가 스며나온다’고 우리의 시선을 돌려놓는다. 잠시나마 우리는 공포의 진앙지를 잊고 귀신도, 무서운 인형도 없는 일상에 안도의 숨을 내쉰다.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for NW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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