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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시원’을 찾아 만나는 나의 조상

‘존재의 시원’을 찾아 만나는 나의 조상

출판평론가 표정훈씨는 중국 여행중에 만난 중국인에게 “나의 조상은 아주 오래전에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왔다”고 슬쩍 농담을 건넸다. 그의 조상인 신창(新昌) 표씨의 시조는 고려시대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와 충남에 정착했으니 이 말이 농담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되돌아온 중국인의 대답은 이랬다. “으흠! 그랬구먼. 타향에서 얼마나 모질게 고생했으면 고국 말도 잊어버리게 되었는가?” 동이족인 그가 졸지에 한족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인들처럼 조상을 숭배하며 족보를 앞세우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표씨가 자신의 ‘존재의 시원’을 찾아나서는 ‘내 역사 찾기’에 나선 계기는 바로 그랬다. 그는 현대 한국사회를 만들어냈던 근현대사가 아니라, 핏줄의 내력이 담긴 ‘개인의 역사’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그는 “내 몸 안에 천년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고 주장하며, 표씨 성을 가진 조상들의 흔적들을 찾아나선다.

신창 표씨의 조상인 표대박은 광종 11년(960)에 중국에서 건너왔다. 성리학자 표연말이 등장했던 조선시대는 표씨 집안의 전성기였다. 표정훈씨는 조상인 표연말을 통해 조선 성리학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광해군 때 인물인 표헌은 역관으로 명성이 높았으나 후손인 표정훈씨에 의해 ‘욕심 많은 조상’으로 묘사된다. 임진왜란 당시 비옥한 토지에 욕심을 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상 가운데는 일제강점기에 조선공산당 조직원으로 활동한 표문학도 있다. 그의 아버지는 군사정권시대에 참된 군인의 길을 고민했던 육사 출신 표명렬 장군이다.

표씨가 의도하는 바는 ‘집안 자랑’도 아니고 ‘족보’에 쓰인 핏줄의 계보를 탐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조상들의 위대한 과거’를 미화하고 재현하려는 허황된 책들과 격을 달리한다. “나는 내 조상들과 솔직하게 대화하고 싶었다. 맹목적인 숭배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각자의 시대를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갔던 역사 속 그들과 만나고 싶다. 그런 만남이야말로 우리들 각자의 ‘나의 천년’이 고립적이고 배타적인 가계와 종족의 차원에서 벗어나, 온전히 ‘우리의 천년’이 될 수 있는 출발점이 아닐까.”

이 책은 조상의 계보 탐색을 통해 순수혈통이라는 신화를 부숴버린다. 하나의 핏줄이 이어져 왔다고 믿고 있지만, 어쩌면 그의 가계에는 어느 몽골 전사와 중국인 농부의 피가 섞였을지 모른다. 선조에 대한 맹목적 신화화가 아니라 객관적 성찰을 통해 내 안에 숨은 또 다른 ‘나의 역사’를 탐구하자는 것이다. 결론 부분이 현재의 자신에 대한 성찰로 채워진 이유도 그 때문이다. 조상은 그들 나름의 삶을 살았고 현재의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이지만, 그 둘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나의 정체성은 조상의 위대한 역사가 아니라 ‘현재의 나’ 속에서 찾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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