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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랑가는 아직 ‘깊은 잠’

한국 화랑가는 아직 ‘깊은 잠’

경기가 극도로 침체된 요즘 우리 미술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세계 미술시장은 대체로 활황을 누리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까닭은 경기 침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역사적인 배경이나 의식구조도 그 중 하나다.
네덜란드 판화가 피터 솅크의 <술타니에 풍경> .석농 김광국의 소장품으로 2003년에 학고재에서 전시됐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미술시장이 붐이다. 미국은 물론 유럽 ·멕시코 ·캐나다를 비롯, 아시아에서도 일본 ·중국 ·홍콩 등에서 미술품의 가격이 치솟고 거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상승세를 탄 시장은 시끄럽게 마련이다. 일부에서는 거품을 들먹이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검증받지 않은 생존 작가들의 지나친 가격상승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우리 미술시장은 예외다. 해외 시장의 움직임과는 관계없이 요지부동의 침체상태를 지속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다. 우리 미술시장의 장기 부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으나 우리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의식구조도 한 몫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미술품을 사는 이유는 다양하다. 정말 미술을 사랑해서 사는 애호가들이 있다. 미술품은 그들에게 생의 활력을 주고 살아 있는 희열을 느끼게 한다.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다. 미술에는 애정도 관심도 없지만, 소파 위 공간이 허전해서 거기에 어울리는 장식용으로 그림을 산다. 허영으로 사는 부류도 있다. 집안이나 사무실에 비싼 그림을 걸어 놓으면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 높아 보이므로 작품을 사는 사람들이다. 투자를 위해 사는 사람들도 많다. 미술품을 사고팔아서 매매 차익을 보겠다는 이들이다.

모든 종류의 수요가 시장발전에 필요하다. 흔히 말하기를 미술을 정말 사랑해서 사는 사람들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실은 단견이다. 작품을 마냥 좋아해서 소장만 하고 있는 사람들만 있으면 시장의 수급에 차질이 생긴다. 작품을 파는 사람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살 수가 있다. 요즘 우리 미술시장이 겪는 블루칩 작품의 품귀현상이 그렇다. 물건의 손 바뀜 없이는 시장이 형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에 역동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 투자를 위해 미술품을 사고파는 사람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미술시장에 가장 아쉬운 것이 미술품을 투자로 보는 인식이다. ‘미술’에 ‘시장’이나 ‘투자’, ‘돈’과 같은 것들을 결부시키면 대부분의 사람이 신성모독쯤으로 받아들인다. 아직도 ‘예(藝)’를 천한 것으로 생각하는 의식이 잔존하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묘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미술시장의 역사가 극히 짧다. 아마도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유교가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예술은 잡기(雜技)나 말예(末藝)로 취급됐다. 군자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예술 활동뿐만 아니라 예술 감상도 마찬가지였다. 사대부는 ‘완물상지(玩物喪志)’, 즉 ‘물건을 즐기면 뜻을 잃는다’고 해 서화 감상도 경계했다.

임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종실록> 을 보면 성종이 화원을 불러 화조화(花鳥畵)를 그리게 한 것을 두고 언관(言官)인 이세광(李世匡)은 이렇게 말했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완물상지라 했으니, 전하께서 그림 그리는 일에 마음을 두시는 것이 완물에 빠지는 조짐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무릇 임금께서는 마땅히 좋아하심을 삼가셔야 하오니, 지나치게 좋아하면 반드시 폐단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 이처럼 예술을 좋아하는 임금들은 신하들로부터 공박을 받았다. 신하들은 수나라 양제, 송나라 휘종, 고려 공민왕 같은 망국의 군주들을 예로 들곤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미술품이 거래되는 시장이 형성될 리 없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드물게나마 서화에 관심을 가지고 모으는 애호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지원의 <필세설> (筆洗說)에 나오는 김광수(金光遂 ·696~?)와 <석농화원> (石農畵苑)이라는 화첩을 만든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이 대표적인 서화수집가이다.
물론 우리나라 미술시장의 역사를 서양과 비교할 수는 없다.

서양에서는 이미 로마시대에 화상(畵商)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네로 황제 시절 화상들이 그리스의 수많은 미술품을 로마로 실어 날랐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화상이라는 직업이 기록에 등장하고 있으며, 17세기 프랑스에서는 화가가 직접 작품을 파는 것이 금지되면서 화상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오늘날 세계 경매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소더비와 크리스티는 25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서양에서 미술품은 중요한 실물투자자산이다.

석농 김광국이 소장한 일본 우키요에 <미인도> .
동양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중국에도 일찍부터 미술시장이 발달했다. 중국은 예부터 “곡식과 기름의 장사는 한 푼의 이득이 있고, 베와 잡화는 열 푼의 이득이 있으며, 장례용품과 혼수품은 백 푼의 이득이 있다. 보석과 서화(書畵)는 만 푼의 이득이 있다”고 해 서화의 투자가치를 인정했다.

중국은 건륭황제 36년(1773년) 때 서화 ·골동 ·고서적 등 미술품을 거래하는 시장으로 베이징(北京) 거리에 ‘류리창(琉璃倉)’을 조성했다. 류리창은 오늘날에는 1,000여 개의 상점이 들어선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요즘 세계적으로 중국 미술이 붐이다. 르네상스라고까지 불리는 작금의 붐은 명 ·청시대의 고미술부터 청년작가들의 작품까지 광범위한 시대를 망라하고 있다.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미술품을 사는 사람들은 대개 중국 고도성장의 혜택을 본 중산층 이상에 속한다. 이들에게 미술품을 구입한 이유를 물어보면 하나같이 “투자가치 때문에 구매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중국 현대미술 전문가 하워드 파버는 “20세기 미술이 미국의 것이었다면 21세기의 미술은 중국의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중국보다 더 일찍이 세계 미술시장에서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 같은 작가는 이미 세계 미술시장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 역시 유구한 미술시장 역사가 있다. 일찍이 다도가 발달한 일본은 이미 센코쿠(戰國) 시대부터 다완(茶碗)을 모으는 것이 선풍적으로 유행했는데, 특히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수집가로 유명하다.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조선에서 만든 것으로 명품은 성(城)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할 만큼 값이 비쌌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선다기로 일본의 국보가 된 오이도다완(井戶茶碗)이다. 일본에는 완물(玩物)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없었다. 임진왜란이 값비싼 도자기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까지 말할 정도다.
우리나라에 미술시장이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 하였다. 대부분의 상인이 일본인이었고, 경매회사도 일본인들이 만들어 그들 중심으로 움직였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수집가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당시 일본인들의 영향이었다.

우리나라는 자타가 공인하듯 빼어난 문화와 예술을 가지고 있다. 역사가 말해주고 예술가들의 능력이 말해준다. 그러나 세계 미술시장에서의 우리 위치는 이에 걸맞지 않게 초라하다. 국내 시장이 죽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몇몇 젊은 작가들은 재능만으로 세계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이 더 큰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국내 시장이 살아야 한다. 우리의 미술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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