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비결은 어머니의 손맛
성공의 비결은 어머니의 손맛
The Taste Makers
미국 뉴저지주 린든의 물류창고 거리. 기온은 34도쯤이지만 946ℓ짜리 찜솥이 놓인 조리실의 열기는 더 뜨겁다. 잘게 썬 양파 20㎏이 30㎝ 깊이의 솥 바닥에서 지글대는 버터 위로 쏟아부어졌다. 워싱턴주 캐스케이디언 농장에서 가져온 양파들이다. 여기에 신선한 샐러리가 추가됐다. 그러곤 킹 아서(버몬트주의 고급 제분회사)가 제조한 엄청난 양의 밀가루가 채로 걸러진 뒤 뿌려졌다. 채로 거른 이유는 밀가루가 덩어리째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 혼합물이 서서히 굳으면서 풍기는 냄새는 마치 포옹할 때처럼 ‘포근’하다.
다음엔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당근과 연녹색 완두콩, 몇 양동이 분의 닭 육수가 부어졌다. 벨&에번스 농장에서 방목해 기른 닭에서 뼈를 바르고 껍질을 벗겨낸 뒤 살코기(72㎏)만 삶아 우려낸 육수다. 땀 흘리며 열심히 휘젓는 모습에선 근사한 가정집 부엌의 분위기가 풍긴다. 우유·백리향·소금·후추를 곁들이고 아까 삶아 둔 살코기만 추가하면 250개(소자) 또는 800개(대자) 분의 닭고기 파이 재료가 만들어진다. 정성이 가득한 ‘트윈 헨즈’(쌍둥이 암탉)사의 제품이다. 물론 두 ‘암탉’은 주인인 린다 트위닝과 캐시 허링을 가리킨다. 둘 다 매력적인 40대 어머니들로 자신의 손때가 묻지 않은 냄비가 없을 만큼 열정적이다.
그들의 ‘회사’는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있다. 두 사람이 처음 시작했던 주방에서 불과 몇㎞ 떨어진 곳에 있지만 이젠 차원이 다르다. 트위닝과 허링은 7년 전 처음 만났다. 당시 트위닝은 두 사람의 자녀가 다니는 유치원에 환상적인 케이크를 갖고 왔다. 그 케이크엔 식품업에 종사하고 싶은 트위닝의 열망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었다. 그간 자신의 뉴욕 아파트에서 소규모 출장요리업을 해오던 허링도 결국 그 의미를 간파했고, 둘은 이내 맛깔스러운 파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을 차근차근 키운 트윈 헨즈는 미국에서 급성장하는 ‘명품’ 식품 업체 대열에 합류했다. 정성이 깃들이지 않은 대량생산 제품들로부터 식품업계를 구하는 일이야말로 인간과 식품 간의 진정한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었다는 말이다. 요즘엔 진정한 맛을 되찾으려는 열정 때문에 전통과 순수로 가득한 식품 제조에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우리의 식탁을 기쁘게 하는 각종 소매용 제품을 내놓는다. 식품 ‘장인’의 손맛은 최고의 소스와 소시지·식초·마멀레이드(오렌지·레몬 등으로 만든 잼)에서 나온다. 누구든 맛볼 수 있는 이 솜씨는 최고의 재료, 최고 품질의 돼지고기, 최고급 초콜릿에서 시작한다. 이 같은 운동은 ‘독자생존’이 가능한 유기농업에도 깊이 뿌리를 내려 이젠 제대로 된 영농과 품질을 중시하는 소규모 농가와 생산업자들의 생계를 떠받친다.
명품 식품업은 위험이 따르는 사업이다. 대개 위험 부담이 큰 자기 자본만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안정성이 떨어진다. 열정을 사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당초의 즐거움도 사라진다. 재료는 쉽게 상하기 때문에 다루기가 까다롭다. 훌륭한 딸기밭이 갑작스러운 폭풍에 초토화되면 잼 재료는 송두리째 날아간다.
그럼에도 2005년 질 좋은 식품 생산에 뛰어든 미국인 수는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일단 기본 배경부터 짚어보자. 대규모 식품업체들은 자신들이 질 좋고 안전한 식품을 저렴한 가격에 생산해서 공급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조리 과정에서 재료 고유의 풍미는 사라진다.
또 비용 절감을 위해 화학 처리된 질 낮은 원료를 구입한다. 그뿐 아니다. 싼값으로 입맛을 돋우기 위해 설탕과 소금을 지나치게 많이 넣고, 판매 기간 연장을 위해 첨가제와 방부제도 마다하지 않는다(혹시 트랜스 지방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게다가 편리성과 가격을 이유로 가공 과정에서 식품의 생명 자체를 날려버린다. 그래도 될까? 물론 대규모 업체는 우리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다. 그러나 영양을 공급해주진 않는다.
명품업체들은 아직도 창업자의 손재주와 열정을 지킨다. 고품질과 고풍미를 고수하기 때문에 규모도 작고, 가격도 비쌀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열심히, 그리고 항상 노력한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삶의 한 방식으로, 아니 거의 종교로 만든다. 음식에 대해 까다로운 구석이 있는 배우 폴 뉴먼이 1980년 자신의 집 지하실에서 처음 만든 샐러드 드레싱은 ‘명품’이었다.
미국판 푸아그라(거위 간 요리)와 오리도 마찬가지다. 그 거위와 오리는 식품에 관한 한 불굴의 소신을 가진 프랑스 여성 아리안 다깅이 아직 운영 중인 식품회사 달타냥에 납품하기 위해 1985년 이래 뉴욕주 북부에서 사육돼 왔다. 20년 전만 해도 건강에 좋은 자연 식빵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젠 화덕에서 구운 빵이 도처에 널려 있다. 미국산 치즈랍시고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오렌지색 슬라이스 치즈가 생각나는가? 요즘의 미국 농촌에선 훨씬 더 고급스러운 미국식 치즈를 만드는 곳이 수백 군데에 이른다.
고급 음식 전문지 스페셜티 푸드의 론 태너 편집장은 명품 식품의 성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잡지의 독자층은 전에는 주로 특별한 경우에 고급 식품을 구입하는 50대였다. 이젠 단지 훌륭한 식품에 더 익숙해졌기 때문에 더 비싼 값을 지불하려는 20, 30대층이 주류다.” 지난 2년간 고급 식품은 경이로운 18%의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250억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생산자들은 부유하지 않다. 명품 식품업계 단체인 NASFT의 회원 중 80%가 연매출이 100만 달러에도 못 미친다.
그 협회가 3년마다 개최하는 ‘명품 식품 전시회’(Fancy Foods Show)에서 부스 하나를 빌리는데도 3100달러가 든다. 그러나 일단 행사에 참가하면 윌리엄-소노마 같은 유명 고급 식품업체나, 명품 식품 판매대가 마련된 수퍼마켓, 그리고 고급 식품업계의 거물 홀 푸즈(Whole Foods)의 눈에 띌 가능성이 있다. 165군데의 매장을 보유한 홀 푸즈는 세계 최고의 명품 식품을 확보 중일 뿐 아니라 최근엔 ‘진정한 명품 식품 계획’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업체 중 눈에 띄는 수십 곳에는 소규모 브랜드임을 ‘과시’하는 특수 스티커가 붙여진다. 몬태나주에 위치한 ‘블랙 벨루가 렌틸즈’의 ‘영원한 씨’(Timeless Seeds)가 대표적인 예다.
모든 병과 항아리와 패키지엔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 있다. 가족의 이야기나 추억담, 아니면 사람들로 하여금 식품을 통해 자신의 삶을 크게 바꾸도록 자극하는 일종의 ‘뿌리 찾기’ 이야기일 때도 있다. 할리우드에서 대본 작가로 활동하는 하워드 레브는 루마니아와 유대인의 피가 반반 섞인 어머니의 고추 절임 비법을 이야기할 때면 전략적으로 눈물을 글썽인다. 그의 이 같은 버릇은 쇼 비즈니스계 이력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건 단순히 절인 고추가 아니다”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는 고인이 된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고추를 절이기 시작했고, 이 절인 고추를 영화 대본과 함께 영화 제작자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격찬을 받은 쪽은 절인 고추였다. 결국 레브는 어머니가 재료로 이용한 매운 헝가리산 고추의 재배가 워싱턴주 야키마 밸리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예 시애틀로 이주해 ‘마마 릴스’란 이름의 회사를 차렸다. 훌륭한 양념을 곁들인 올리브유에 절인 싱싱한 고추를 생산하는 업체다. 지난주 그는 약 250t의 고추 수확에 나서면서 농사를 망치는 이상저온을 끔찍이 우려했다.
유명 요리사인 폴 베르톨리는 1993년 이래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레스토랑 올리베토를 운영해 왔다. 이제 그는 ‘프라 마니’(‘손맛’이란 뜻의 이탈리아어)라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소시지 제조업자인 이탈리아계 조부를 끌어들이려 한다. 최고의 품질에 장기 보관이 가능한, 향미가 강한 미국식 ‘살라미’를 팔기 위해서다. 독특한 숙성과 건조법으로 제조되는 이 제품은 미국 시장에선 알려지지 않았다. 베르톨리는 TV 요리 프로 출연을 통한 화려한 출세길을 택하는 대신 육류를 적절히 보존·처리하는 방법을 배우며 지난 10년을 보냈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 현지로 가 지은 지 수세기가 지난 석조 광에서 소시지 제조업자들을 찾아내는가 하면, 아이오와 주립대에선 육류과학 강좌를 수강했다. “발효와 첨가제뿐 아니라 도축 시 고기 근육에 일어나는 변화까지 배워야 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 나라의 어떤 소시지 공장도 양질의 고기와 재료를 쓰지 않는다. 우리에 가둔 채 사육한 돼지를 가공한 18㎏짜리 냉동 돈육을 이용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베르톨리의 집착은 철저한 제조 과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아이오와주 수 시티에 위치한 니먼 목장에서 철저한 관리를 통해 사육된 돼지에 대해서도 남다른 열정을 보인다. “항생제도, 호르몬제도 맞히지 않고 기른 행복한 돼지”라고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년 봄이면 건조한 상태로 장기 보관된 살라미, 신선한 돈육 소시지 외에 쇠고기나 돼지고기로 만든 소시지의 ‘지존’ 모르타델라까지 맛보게 될지 모른다.
중국계 미국인 리처드 왕의 조부는 1964년 가족들을 이끌고 상하이에서 아시아인을 잘 모르는 미 중서부 오하이오주 톨레도로 이주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왕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고 느꼈다. “‘나는 너희 나라보다 더 심오하고, 풍부하며, 오래된 문화권에서 왔다. 너희들은 그것을 전혀 모른다’고 푸념하곤 했다”고 그는 말했다. 왕은 뭔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는 결국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대형 회사 소속 건축가가 됐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여성들과 교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어머니만큼 요리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할머니와 함께 부엌으로 가 내 어린 시절 상하이의 맛을 되찾기 위해 직접 요리했다. 미국인으로 자랐지만 내 몸속엔 중국인의 피가 흐른다. 나는 큰 프라이팬을 구입한 뒤 친구들을 위해 저녁 식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곤 쓰다 남은 참기름 간장을 단지에 담아 친구들에게 주곤 했다. 음식을 찍어 먹으라고 말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다시 나를 찾아와 ‘리처드, 우린 너처럼 세 시간씩 요리를 못 해. 그래서 그 소스를 음식 재료에 발라 오븐이나 석쇠로 구워 먹는다고’라고 말했다. 처음엔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들 방식으로 요리를 하며 생각했다. ‘음식도 상하이와 마찬가지군. 현지 문화와 뒤섞이게 되는군.’” 왕의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아시아식 소스 차이나블루는 그렇게 태어났다.
준 테일러는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의 청결한 창고에서 과일에 심취해 열정적인 삶을 산다. 그녀는 메이어 레몬과 선홍색 오렌지 잼, 딸기·라벤더 절임, 향신료를 곁들인 배 과육 잼 등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 테일러는 예부터 전해내려오는 방식의 완벽한 재현을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1903년 영국에서 출간된 책 ‘고요한 방’(Still Room)의 제목을 따 상호를 지었다. ‘스틸 룸’은 원래 정원에서 재배한 과일과 채소로 통조림과 절임을 만드는 영국의 한 시골집 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테일러의 ‘스틸 룸’은 그녀의 절임 음식이 판매되는 고급 레스토랑 셰파니스의 반대편 쪽에 있다. “나는 1950년대 영국에서 자랐고, 가정학과 출신으로 무(無)에서 모든 것을 일궜다. 아무것도 낭비하지 않았고, 계속 그런 방식을 고수하겠다.” 과일 자르기부터 병에 담기까지 전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화로 위에는 작은 오렌지의 일종인 클레멘타인이 담긴 17ℓ짜리 단지가 있다. 거기서 약 1.7∼2.4ℓ의 잼이 나온다. “200병을 만들려면 하루 종일 걸린다.” 그녀가 만든 절임의 설탕 함유량은 20%에 불과하다. 시중에서 구입한 잼은 펙틴 성분 때문에 굳기 쉽지만 테일러는 펙틴도 직접 만들기 때문에 과일의 풍미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음식에 대한 사랑과 마케팅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배우기 위해 굳이 하버드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딸 필요는 없다(있어도 손해는 안 되겠지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집에서 음식을 혼자 만들어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마야 카이말은 인도 남부의 가정집 요리법을 토대로 만든 소스(타마린드 커리, 티카 마살라, 코코넛 커리 및 빈달루)를 뉴욕주 북부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직접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어린 쌍둥이 딸들이 다리에 매달리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 소스는 현재 캐츠킬스에 위치한 소규모 업체에 의해 수작업으로 제조·포장된다. 공장에선 양파를 카라멜화한다(양파 500개를 카라멜화하는 데는 6시간이 소요된다).
그녀는 힘든 작업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소스 생산은 매우 노동집약적이다. 소스를 알맞게 만들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소스로 가득 찬 245ℓ짜리 솥을 들여다 볼 때다. 솥 안에서 수영도 가능하다! 규모를 늘리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막상 해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 짜릿한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온다. 품평회에서 사람들은 내게 다가와 내가 자신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말한다. 물론 나로선 ‘제발 내 마음 고생과 은행 잔고나 알아줬으면’하는 생각부터 들지만.”
상품을 만드는 일과 시장에 내놓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리처드 왕은 차이나블루를 시판하기 전에 판매 방법부터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유명 가구 제조회사인 크놀에서 2년간 근무했다. 그러곤 “계약을 마무리 짓는 법도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동산 중개인이 됐다.
그 후 그는 그간 저축한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소스를 완성하고, 상표와 병(작은 빌딩이 그려져 있다)을 디자인하며 4년을 보냈다. “웹 이름을 하나 얻는데도 20개월이 걸리고 2만2000달러가 들었다. 그러나 수중엔 그만한 돈이 없었다. 웹이름이 없으면 사업 개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그는 말했다. 1999년 모든 조건이 갖춰지자 왕은 자신의 소스를 윌리엄스-소노마, 크레이트&배럴, 수르 라 테이블 같은 대형 고급 식품 회사로 가지고 갔고, 세 곳 모두에 납품했다.
인터넷은 ‘장인’들에겐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특히 규모가 작아 대량 판매가 불가능한 업체들엔 유일한 판매구다. 물론 현지 농산물 직판장에 가도 된다. 준 테일러는 지금도 토요일이면 샌프란시스코의 페리 플라자를 찾아가 고객들과 얘기를 나눈다. “더 큰 성공을 위해 노력 중이다. 우리도 업계를 도와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판매 물량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판매는 junetaylorjams. com에서 이뤄진다.
전직 환경 전문 변호사이자 콜로라도주 볼더의 벤처 자본가인 토드 월로슨의 ‘인과응보 마케팅’도 등장했다. 월로슨과 동업자 그레그 스트로는 중남미 지역의 고아원에 도서관을 세워주는 비영리 단체인 ‘세계교육기금’(GEF)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2002년 ‘이즈’라는 소다수 회사를 세웠다. “우린 음료수를 가급적 간단한 방법으로 만들 방법을 궁리했다. 집에서 오렌지 주스와 산 펠레그리노 광천수를 섞어 만들었다.
그것이 순수 과일 주스와 소다수를 섞어 만든 음료수의 모델이 됐다.” 첫 제품이 매장에 출하돼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희망도 솟아났다. 월로슨의 딸 이사벨(6)의 이름을 따 지은 ‘이즈’는 블랙베리·블루베리·석류 등으로 탄산 주스를 생산해 유행과 자선을 동시에 추구하는 소비자층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사업은 창업 후 첫 2년간 매년 450%씩 성장했다.
이와 함께 사회적 공헌도 가시화됐다. 이즈는 자사의 과일 재배업자·채집자들이 사는 샌 호아킨 밸리와 메인주 오거스타의 탁아소·도서관에도 운영자금을 지원한다. “식품 사업을 사랑한다. 그것은 우리의 일부가 됐다. 나는 홀딱 빠져 있다.” 다른 모든 위대한 열정처럼 식품 사업에 대한 사랑도 우리 모두에게 달콤한 만족을 가져다준다.
With ANN MCCARTHY, KAREN BRESLAU, DAN BERRETT, BEN WHITFORD and JOHN RICHARDS
강태욱·정택진 t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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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저지주 린든의 물류창고 거리. 기온은 34도쯤이지만 946ℓ짜리 찜솥이 놓인 조리실의 열기는 더 뜨겁다. 잘게 썬 양파 20㎏이 30㎝ 깊이의 솥 바닥에서 지글대는 버터 위로 쏟아부어졌다. 워싱턴주 캐스케이디언 농장에서 가져온 양파들이다. 여기에 신선한 샐러리가 추가됐다. 그러곤 킹 아서(버몬트주의 고급 제분회사)가 제조한 엄청난 양의 밀가루가 채로 걸러진 뒤 뿌려졌다. 채로 거른 이유는 밀가루가 덩어리째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 혼합물이 서서히 굳으면서 풍기는 냄새는 마치 포옹할 때처럼 ‘포근’하다.
다음엔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당근과 연녹색 완두콩, 몇 양동이 분의 닭 육수가 부어졌다. 벨&에번스 농장에서 방목해 기른 닭에서 뼈를 바르고 껍질을 벗겨낸 뒤 살코기(72㎏)만 삶아 우려낸 육수다. 땀 흘리며 열심히 휘젓는 모습에선 근사한 가정집 부엌의 분위기가 풍긴다. 우유·백리향·소금·후추를 곁들이고 아까 삶아 둔 살코기만 추가하면 250개(소자) 또는 800개(대자) 분의 닭고기 파이 재료가 만들어진다. 정성이 가득한 ‘트윈 헨즈’(쌍둥이 암탉)사의 제품이다. 물론 두 ‘암탉’은 주인인 린다 트위닝과 캐시 허링을 가리킨다. 둘 다 매력적인 40대 어머니들로 자신의 손때가 묻지 않은 냄비가 없을 만큼 열정적이다.
그들의 ‘회사’는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있다. 두 사람이 처음 시작했던 주방에서 불과 몇㎞ 떨어진 곳에 있지만 이젠 차원이 다르다. 트위닝과 허링은 7년 전 처음 만났다. 당시 트위닝은 두 사람의 자녀가 다니는 유치원에 환상적인 케이크를 갖고 왔다. 그 케이크엔 식품업에 종사하고 싶은 트위닝의 열망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었다. 그간 자신의 뉴욕 아파트에서 소규모 출장요리업을 해오던 허링도 결국 그 의미를 간파했고, 둘은 이내 맛깔스러운 파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을 차근차근 키운 트윈 헨즈는 미국에서 급성장하는 ‘명품’ 식품 업체 대열에 합류했다. 정성이 깃들이지 않은 대량생산 제품들로부터 식품업계를 구하는 일이야말로 인간과 식품 간의 진정한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었다는 말이다. 요즘엔 진정한 맛을 되찾으려는 열정 때문에 전통과 순수로 가득한 식품 제조에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우리의 식탁을 기쁘게 하는 각종 소매용 제품을 내놓는다. 식품 ‘장인’의 손맛은 최고의 소스와 소시지·식초·마멀레이드(오렌지·레몬 등으로 만든 잼)에서 나온다. 누구든 맛볼 수 있는 이 솜씨는 최고의 재료, 최고 품질의 돼지고기, 최고급 초콜릿에서 시작한다. 이 같은 운동은 ‘독자생존’이 가능한 유기농업에도 깊이 뿌리를 내려 이젠 제대로 된 영농과 품질을 중시하는 소규모 농가와 생산업자들의 생계를 떠받친다.
명품 식품업은 위험이 따르는 사업이다. 대개 위험 부담이 큰 자기 자본만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안정성이 떨어진다. 열정을 사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당초의 즐거움도 사라진다. 재료는 쉽게 상하기 때문에 다루기가 까다롭다. 훌륭한 딸기밭이 갑작스러운 폭풍에 초토화되면 잼 재료는 송두리째 날아간다.
그럼에도 2005년 질 좋은 식품 생산에 뛰어든 미국인 수는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일단 기본 배경부터 짚어보자. 대규모 식품업체들은 자신들이 질 좋고 안전한 식품을 저렴한 가격에 생산해서 공급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조리 과정에서 재료 고유의 풍미는 사라진다.
또 비용 절감을 위해 화학 처리된 질 낮은 원료를 구입한다. 그뿐 아니다. 싼값으로 입맛을 돋우기 위해 설탕과 소금을 지나치게 많이 넣고, 판매 기간 연장을 위해 첨가제와 방부제도 마다하지 않는다(혹시 트랜스 지방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게다가 편리성과 가격을 이유로 가공 과정에서 식품의 생명 자체를 날려버린다. 그래도 될까? 물론 대규모 업체는 우리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다. 그러나 영양을 공급해주진 않는다.
명품업체들은 아직도 창업자의 손재주와 열정을 지킨다. 고품질과 고풍미를 고수하기 때문에 규모도 작고, 가격도 비쌀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열심히, 그리고 항상 노력한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삶의 한 방식으로, 아니 거의 종교로 만든다. 음식에 대해 까다로운 구석이 있는 배우 폴 뉴먼이 1980년 자신의 집 지하실에서 처음 만든 샐러드 드레싱은 ‘명품’이었다.
미국판 푸아그라(거위 간 요리)와 오리도 마찬가지다. 그 거위와 오리는 식품에 관한 한 불굴의 소신을 가진 프랑스 여성 아리안 다깅이 아직 운영 중인 식품회사 달타냥에 납품하기 위해 1985년 이래 뉴욕주 북부에서 사육돼 왔다. 20년 전만 해도 건강에 좋은 자연 식빵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젠 화덕에서 구운 빵이 도처에 널려 있다. 미국산 치즈랍시고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오렌지색 슬라이스 치즈가 생각나는가? 요즘의 미국 농촌에선 훨씬 더 고급스러운 미국식 치즈를 만드는 곳이 수백 군데에 이른다.
고급 음식 전문지 스페셜티 푸드의 론 태너 편집장은 명품 식품의 성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잡지의 독자층은 전에는 주로 특별한 경우에 고급 식품을 구입하는 50대였다. 이젠 단지 훌륭한 식품에 더 익숙해졌기 때문에 더 비싼 값을 지불하려는 20, 30대층이 주류다.” 지난 2년간 고급 식품은 경이로운 18%의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250억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생산자들은 부유하지 않다. 명품 식품업계 단체인 NASFT의 회원 중 80%가 연매출이 100만 달러에도 못 미친다.
그 협회가 3년마다 개최하는 ‘명품 식품 전시회’(Fancy Foods Show)에서 부스 하나를 빌리는데도 3100달러가 든다. 그러나 일단 행사에 참가하면 윌리엄-소노마 같은 유명 고급 식품업체나, 명품 식품 판매대가 마련된 수퍼마켓, 그리고 고급 식품업계의 거물 홀 푸즈(Whole Foods)의 눈에 띌 가능성이 있다. 165군데의 매장을 보유한 홀 푸즈는 세계 최고의 명품 식품을 확보 중일 뿐 아니라 최근엔 ‘진정한 명품 식품 계획’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업체 중 눈에 띄는 수십 곳에는 소규모 브랜드임을 ‘과시’하는 특수 스티커가 붙여진다. 몬태나주에 위치한 ‘블랙 벨루가 렌틸즈’의 ‘영원한 씨’(Timeless Seeds)가 대표적인 예다.
모든 병과 항아리와 패키지엔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 있다. 가족의 이야기나 추억담, 아니면 사람들로 하여금 식품을 통해 자신의 삶을 크게 바꾸도록 자극하는 일종의 ‘뿌리 찾기’ 이야기일 때도 있다. 할리우드에서 대본 작가로 활동하는 하워드 레브는 루마니아와 유대인의 피가 반반 섞인 어머니의 고추 절임 비법을 이야기할 때면 전략적으로 눈물을 글썽인다. 그의 이 같은 버릇은 쇼 비즈니스계 이력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건 단순히 절인 고추가 아니다”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는 고인이 된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고추를 절이기 시작했고, 이 절인 고추를 영화 대본과 함께 영화 제작자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격찬을 받은 쪽은 절인 고추였다. 결국 레브는 어머니가 재료로 이용한 매운 헝가리산 고추의 재배가 워싱턴주 야키마 밸리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예 시애틀로 이주해 ‘마마 릴스’란 이름의 회사를 차렸다. 훌륭한 양념을 곁들인 올리브유에 절인 싱싱한 고추를 생산하는 업체다. 지난주 그는 약 250t의 고추 수확에 나서면서 농사를 망치는 이상저온을 끔찍이 우려했다.
유명 요리사인 폴 베르톨리는 1993년 이래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레스토랑 올리베토를 운영해 왔다. 이제 그는 ‘프라 마니’(‘손맛’이란 뜻의 이탈리아어)라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소시지 제조업자인 이탈리아계 조부를 끌어들이려 한다. 최고의 품질에 장기 보관이 가능한, 향미가 강한 미국식 ‘살라미’를 팔기 위해서다. 독특한 숙성과 건조법으로 제조되는 이 제품은 미국 시장에선 알려지지 않았다. 베르톨리는 TV 요리 프로 출연을 통한 화려한 출세길을 택하는 대신 육류를 적절히 보존·처리하는 방법을 배우며 지난 10년을 보냈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 현지로 가 지은 지 수세기가 지난 석조 광에서 소시지 제조업자들을 찾아내는가 하면, 아이오와 주립대에선 육류과학 강좌를 수강했다. “발효와 첨가제뿐 아니라 도축 시 고기 근육에 일어나는 변화까지 배워야 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 나라의 어떤 소시지 공장도 양질의 고기와 재료를 쓰지 않는다. 우리에 가둔 채 사육한 돼지를 가공한 18㎏짜리 냉동 돈육을 이용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베르톨리의 집착은 철저한 제조 과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아이오와주 수 시티에 위치한 니먼 목장에서 철저한 관리를 통해 사육된 돼지에 대해서도 남다른 열정을 보인다. “항생제도, 호르몬제도 맞히지 않고 기른 행복한 돼지”라고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년 봄이면 건조한 상태로 장기 보관된 살라미, 신선한 돈육 소시지 외에 쇠고기나 돼지고기로 만든 소시지의 ‘지존’ 모르타델라까지 맛보게 될지 모른다.
중국계 미국인 리처드 왕의 조부는 1964년 가족들을 이끌고 상하이에서 아시아인을 잘 모르는 미 중서부 오하이오주 톨레도로 이주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왕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고 느꼈다. “‘나는 너희 나라보다 더 심오하고, 풍부하며, 오래된 문화권에서 왔다. 너희들은 그것을 전혀 모른다’고 푸념하곤 했다”고 그는 말했다. 왕은 뭔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는 결국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대형 회사 소속 건축가가 됐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여성들과 교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어머니만큼 요리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할머니와 함께 부엌으로 가 내 어린 시절 상하이의 맛을 되찾기 위해 직접 요리했다. 미국인으로 자랐지만 내 몸속엔 중국인의 피가 흐른다. 나는 큰 프라이팬을 구입한 뒤 친구들을 위해 저녁 식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곤 쓰다 남은 참기름 간장을 단지에 담아 친구들에게 주곤 했다. 음식을 찍어 먹으라고 말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다시 나를 찾아와 ‘리처드, 우린 너처럼 세 시간씩 요리를 못 해. 그래서 그 소스를 음식 재료에 발라 오븐이나 석쇠로 구워 먹는다고’라고 말했다. 처음엔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들 방식으로 요리를 하며 생각했다. ‘음식도 상하이와 마찬가지군. 현지 문화와 뒤섞이게 되는군.’” 왕의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아시아식 소스 차이나블루는 그렇게 태어났다.
준 테일러는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의 청결한 창고에서 과일에 심취해 열정적인 삶을 산다. 그녀는 메이어 레몬과 선홍색 오렌지 잼, 딸기·라벤더 절임, 향신료를 곁들인 배 과육 잼 등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 테일러는 예부터 전해내려오는 방식의 완벽한 재현을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1903년 영국에서 출간된 책 ‘고요한 방’(Still Room)의 제목을 따 상호를 지었다. ‘스틸 룸’은 원래 정원에서 재배한 과일과 채소로 통조림과 절임을 만드는 영국의 한 시골집 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테일러의 ‘스틸 룸’은 그녀의 절임 음식이 판매되는 고급 레스토랑 셰파니스의 반대편 쪽에 있다. “나는 1950년대 영국에서 자랐고, 가정학과 출신으로 무(無)에서 모든 것을 일궜다. 아무것도 낭비하지 않았고, 계속 그런 방식을 고수하겠다.” 과일 자르기부터 병에 담기까지 전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화로 위에는 작은 오렌지의 일종인 클레멘타인이 담긴 17ℓ짜리 단지가 있다. 거기서 약 1.7∼2.4ℓ의 잼이 나온다. “200병을 만들려면 하루 종일 걸린다.” 그녀가 만든 절임의 설탕 함유량은 20%에 불과하다. 시중에서 구입한 잼은 펙틴 성분 때문에 굳기 쉽지만 테일러는 펙틴도 직접 만들기 때문에 과일의 풍미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음식에 대한 사랑과 마케팅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배우기 위해 굳이 하버드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딸 필요는 없다(있어도 손해는 안 되겠지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집에서 음식을 혼자 만들어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마야 카이말은 인도 남부의 가정집 요리법을 토대로 만든 소스(타마린드 커리, 티카 마살라, 코코넛 커리 및 빈달루)를 뉴욕주 북부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직접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어린 쌍둥이 딸들이 다리에 매달리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 소스는 현재 캐츠킬스에 위치한 소규모 업체에 의해 수작업으로 제조·포장된다. 공장에선 양파를 카라멜화한다(양파 500개를 카라멜화하는 데는 6시간이 소요된다).
그녀는 힘든 작업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소스 생산은 매우 노동집약적이다. 소스를 알맞게 만들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소스로 가득 찬 245ℓ짜리 솥을 들여다 볼 때다. 솥 안에서 수영도 가능하다! 규모를 늘리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막상 해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 짜릿한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온다. 품평회에서 사람들은 내게 다가와 내가 자신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말한다. 물론 나로선 ‘제발 내 마음 고생과 은행 잔고나 알아줬으면’하는 생각부터 들지만.”
상품을 만드는 일과 시장에 내놓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리처드 왕은 차이나블루를 시판하기 전에 판매 방법부터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유명 가구 제조회사인 크놀에서 2년간 근무했다. 그러곤 “계약을 마무리 짓는 법도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동산 중개인이 됐다.
그 후 그는 그간 저축한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소스를 완성하고, 상표와 병(작은 빌딩이 그려져 있다)을 디자인하며 4년을 보냈다. “웹 이름을 하나 얻는데도 20개월이 걸리고 2만2000달러가 들었다. 그러나 수중엔 그만한 돈이 없었다. 웹이름이 없으면 사업 개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그는 말했다. 1999년 모든 조건이 갖춰지자 왕은 자신의 소스를 윌리엄스-소노마, 크레이트&배럴, 수르 라 테이블 같은 대형 고급 식품 회사로 가지고 갔고, 세 곳 모두에 납품했다.
인터넷은 ‘장인’들에겐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특히 규모가 작아 대량 판매가 불가능한 업체들엔 유일한 판매구다. 물론 현지 농산물 직판장에 가도 된다. 준 테일러는 지금도 토요일이면 샌프란시스코의 페리 플라자를 찾아가 고객들과 얘기를 나눈다. “더 큰 성공을 위해 노력 중이다. 우리도 업계를 도와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판매 물량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판매는 junetaylorjams. com에서 이뤄진다.
전직 환경 전문 변호사이자 콜로라도주 볼더의 벤처 자본가인 토드 월로슨의 ‘인과응보 마케팅’도 등장했다. 월로슨과 동업자 그레그 스트로는 중남미 지역의 고아원에 도서관을 세워주는 비영리 단체인 ‘세계교육기금’(GEF)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2002년 ‘이즈’라는 소다수 회사를 세웠다. “우린 음료수를 가급적 간단한 방법으로 만들 방법을 궁리했다. 집에서 오렌지 주스와 산 펠레그리노 광천수를 섞어 만들었다.
그것이 순수 과일 주스와 소다수를 섞어 만든 음료수의 모델이 됐다.” 첫 제품이 매장에 출하돼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희망도 솟아났다. 월로슨의 딸 이사벨(6)의 이름을 따 지은 ‘이즈’는 블랙베리·블루베리·석류 등으로 탄산 주스를 생산해 유행과 자선을 동시에 추구하는 소비자층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사업은 창업 후 첫 2년간 매년 450%씩 성장했다.
이와 함께 사회적 공헌도 가시화됐다. 이즈는 자사의 과일 재배업자·채집자들이 사는 샌 호아킨 밸리와 메인주 오거스타의 탁아소·도서관에도 운영자금을 지원한다. “식품 사업을 사랑한다. 그것은 우리의 일부가 됐다. 나는 홀딱 빠져 있다.” 다른 모든 위대한 열정처럼 식품 사업에 대한 사랑도 우리 모두에게 달콤한 만족을 가져다준다.
With ANN MCCARTHY, KAREN BRESLAU, DAN BERRETT, BEN WHITFORD and JOHN RICHARDS
강태욱·정택진 t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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