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정권 무너뜨리는 시한폭탄

정권 무너뜨리는 시한폭탄

국민연금 문제는 단순한 ‘돈’ 문제가 아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보더라도 정권 붕괴로 이어지기도 하고, 외환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연금액을 줄이거나 납부 기간을 늘리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많은 사회적인 혼란 요소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충분한 합의가 없이는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도 된다. 2001년 12월 아르헨티나의 페르난도 델라루아 대통령은 전격 사임했다. 임기가 2년이나 남았지만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던 폭동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르헨티나의 폭동사태는 사실 연금과 임금 삭감에 항의하는 노조의 총파업으로 촉발됐다. 그런데 경제난에서 비롯된 아르헨티나 폭동사태의 ‘숨은 1인치’ 속에는 연금 삭감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경제위기가 정권을 무너뜨린 요인이 됐지만 정작 국민을 흔든 것은 ‘내 주머니로 들어올 돈(연금)이 줄어든다’는 사실이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뿐만이 아니다. 유럽도 연금 문제로 홍역을 앓았다. 2003년 여름 유럽 전역은 파업사태로 혼돈에 빠졌다.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할 것 없이 노조가 총파업에 돌입하면서 유럽이 들썩였다. 당시 유럽을 뒤흔든 혼란의 숨은 1인치 속에도 역시 ‘연금’이 숨어 있었다. 연금 부담을 둘러싼 세대간 갈등의 단면이 폭발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1960년대 학원 봉기가 발생한 이래 최악의 폭동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뉴스위크는 프랑스의 소요사태를 보면서 ‘노·장 세대간 세금 분배를 놓고 벌어질 많은 투쟁의 첫 단계’라고 정의했다. 쉽게 말하자면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자꾸만 연금을 많이 내라고 하니까 ‘이젠 위고 아래고 다 필요없다’는 식의 불만이 터진 것이다. 프랑스 정부가 연금 의무 납부기한을 2년 늘리려다 전국적인 총파업을 불러온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연금 개혁을 둘러싼 갈등이 정권까지 무너뜨렸다. 1995년 이탈리아 연합정권은 연금 지급액을 삭감하는 내용의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러자 말 그대로 연금 지급액 삭감에 반대하는 연금당이 등장했다. 연금제도와 지급률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공약을 내걸고 창당한 연금당은 노년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결국 연합정권은 무너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탈리아가 1992년 맞은 외환위기 역시 연금 문제가 촉발했다. 연금 지급을 위해 국가 재정이 한꺼번에 투입되면서 외환위기로 이어졌고 급기야 이탈리아는 유럽연합(EU) 통화권에서 축출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럼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을 보자. 86년 12월 국민연금법이 공포된 후 88년부터 시행됐다. 원칙적으로는 20년 가입, 60세 도달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이른바 정식(완전 노령연금)으로 첫 번째 연금을 받는 수급자가 나온다. 따라서 1988년부터 20년이 지난 2008년부터 정식으로 연금 급여를 받는 사람이 생긴다. 국민연금과 관련해 ‘2008’이라는 숫자가 관심을 받는 이유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여태껏 국민연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정식으로 연금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일부 연금을 받는 사람들은 유족연금을 받거나 장해연금, 특례노령연금, 조기노령연금 등의 이른바 비정상적인 연금을 타고 있다. 특히 이런 식의 연금은 정식연금에 비해 액수가 적다. 특례노령연금 같은 경우는 정식연금 액수의 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은 출범 이후 거의 20년 동안 돈을 ‘적립’하기만 했지 실제로 돈을 ‘지급’하지는 않은 셈이다. 결국 2008년부터는 연습게임이 아닌 본게임에 돌입하게 된다. 국민연금 고갈 논란과 더불어 외국과 같은 ‘연금 대란’이 없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한국개발연구원이 내놓은 ‘인구구조 고령화의 경제적 영향과 대응과제’라는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노령연금 수급자는 182만 명이다. 2009년에는 200만 명을 넘어선다. 특히 노령연금 수급자 수는 2050년까지 꾸준히 증가해 800만 명을 뛰어 넘을 전망이다. 반면 국민연금 가입자는 직장과 지역을 합쳐 2008년 1900만 명이다. 노령연금 수급자가 2050년까지 증가하는 데 비해 가입자 수는 2020년 2000만 명을 넘어선 이후 내리막길을 걷는다. 수급자에 비해 25년 빨리 가입자 증가 추세가 줄어드는 셈이다. 서둘러 연금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3000억원대 횡령’ 경남은행 중징계….“기존 고객 피해 없어”

2수능 2개 틀려도 서울대 의대 어려워…만점자 10명 안팎 예상

3중부내륙철도 충주-문경 구간 개통..."문경서 수도권까지 90분 걸려"

4경북 서남권에 초대형 복합레저형 관광단지 들어서

5LIG넥스원, 경북 구미에 최첨단 소나 시험시설 준공

6“내 버스 언제오나” 폭설 퇴근대란에 서울 지하철·버스 증회 운행

7안정보다 변화…이환주 KB라이프 대표, 차기 국민은행장 후보로

8 KB국민은행장 후보에 이환주 KB라이프 대표

9한스미디어, ‘인공지능 마케팅’ 기술 담긴 ‘AI로 팔아라’ 출간

실시간 뉴스

1‘3000억원대 횡령’ 경남은행 중징계….“기존 고객 피해 없어”

2수능 2개 틀려도 서울대 의대 어려워…만점자 10명 안팎 예상

3중부내륙철도 충주-문경 구간 개통..."문경서 수도권까지 90분 걸려"

4경북 서남권에 초대형 복합레저형 관광단지 들어서

5LIG넥스원, 경북 구미에 최첨단 소나 시험시설 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