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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의 반미 실용주의

라틴아메리카의 반미 실용주의


신자유주의 정책 실패로 심화된 빈곤 극복 노력일 뿐 독자 노선 걷되 소중한 지역 통합에도 신경 써야 대부분의 사람은 중남미 국가들이 좌경화됐고, 신(新) 대중영합주의로 기울었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국가 간섭주의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서로 다른 나라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가기는 한다. 그러나 대체로 볼 때 좌파로 기운다기보다는 미국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반미 경향이 좋은지 나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중남미 지도자들이 1990년대의 경제 실정(失政)에서 비롯된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이데올로기보다는 실용주의에 입각해 움직이는 경향이 늘어간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90년대보다는 지금 시대에 행복한 결말(지속가능한 경제 성장)이 나올 가능성이 커졌다. 물론 중남미 몇몇 나라의 정부가 경제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경향이 커지는 측면은 있지만 말이다. 최근 중남미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대부분은 고유가에 놀라서 야기된 과잉반응일 뿐이다. 사실 고유가는 모든 사람을 약간 어지럽게 만든다. 그런 우려를 촉발한 직접적인 빌미는 볼리비아와 에콰도르였다. 고유가로 엄청난 불로소득을 얻는 외국계 회사와 석유·가스 회사들을 국유화했기 때문이다. 사실 석유는 평범한 가정용품이 아니다. 중요한 전략적 자원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이런 자원이 부족해지면 어떤 나라의 정부도 그 자원을 통제하려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한다. 생각해 보자. 중국의 한 석유회사가 미국 에너지 회사 유노칼을 인수하겠다고 제의했을 때 미 정부가 나서서 막은 적이 있다. 그때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국가 간섭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지난해 말 미 의회가 석유회사들에 초과이윤세를 물리는 법안을 논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볼리비아와 에콰도르의 에너지 국유화 조치를 놓고 중남미 국가들의 정책 노선이 좌경화하는 신호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좌경화라는 이미지는 중남미가 최근에 실용주의 노선을 강화해 왔다는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요즘 중남미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민주주의가 유행한다. 덕분에 경제정책 결정자들도 전례 없이 확대된 자유를 만끽하며, 대부분의 경우 그 자유를 현명하게 활용한다. 중국발 원자재 특수 덕분에 중남미의 수입(收入)과 외환보유액도 늘어났다. 정책결정자들은 그 돈으로 재정흑자를 누적시키고 부채를 상환한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실용주의의 극단까지 갔다. 결코 좌익 정부의 친구라고 하기 힘든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빌린 돈을 상환기한에 앞서 갚아버렸다. 대중 영합주의 문제도 그렇다. 그런 노선의 상징적 인물인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취임 이래 25% 낮아진 근로자 실질임금을 아직도 올리지 않았다. 새로운 실용주의 노선은 1990년대와의 극적인 단절을 의미한다. 당시 중남미 지도자들은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를 그대로 따랐다. ‘워싱턴 합의’는 자유시장을 정착시키는 철저한 개혁만이 중남미를 구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개혁 계획을 잘못 세워서였는지, 또는 실행을 잘못해서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대규모 민영화, 급격한 구조개혁, 무차별적인 규제 철폐가 심어준 원대한 희망은 배신감만 안겨줬다. 무역과 금융시장이 세계적으로 평등해진다는 약속도 마찬가지였다. 중남미 전역에서 실업률이 치솟고 빈곤지수는 올라갔으며 소득격차가 확대됐다. 불행하게도 1억4500만 명이 하루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는 중남미 대륙에서 정치인들은 잘살게 해달라는 국민적 요구와 사회적 긴장이 증대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대다수 정부가 그런 사회적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동시에 보수적인 거시경제 정책을 유지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대중영합주의적 수사(修辭)는 그런 목표를 달성하려 할 때 치러야 하는 작은 대가일 뿐이다. 중남미의 앞길에는 세 개의 장애물이 놓여 있다. 첫째, 정책이 실패할 경우 유권자들의 불만이 커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중남미 지도자들이 이 험난한 정치적 암초들 사이를 무사히 항해하도록 도와준 세계적인 경제성장 붐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둘째, 급박하고 우선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몇몇 정부는 장기적 성장을 희생시키고 단기적 성장을 극대화하는 길을 선택했다. 베네수엘라의 방만한 재정정책이 대표적인 예다. 또 전략 품목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상품(예컨대 쇠고기, 최신 유행복 등)의 가격을 통제하고 수출할당제를 취한 아르헨티나의 경우도 있다. 이런 통제정책은 보다 뿌리깊은 재정·통화 정책상의 모순을 덮을 우려가 있다. 또 근거 없는 인플레이션 심리와 함께 이런 통제정책은 장기적으로 안정된 성장에 필요한 투자를 위축시킨다. 이들 두 나라는 덜 호화롭고 더 지속가능한 성장정책을 추구하는 편이 오히려 낫다. 마지막으로 각국 정부가 조심스럽게 독자 노선을 걷는 만큼 국가 간의 결속력이 약화될지도 모른다. 지역 통합은 이데올로기에, 혹은 친미나 반미 노선에 맡기기에는 너무도 소중한 가치다. 중남미 국가들은 당연히 각자의 목표를 추구하겠지만 그러면서도 이웃 나라들을 격분하게 만들지 말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 각국이 지역 통합을 희생시켜 가며 사회적 결속을 이룬다면 그 얼마나 덧없는 아이러니겠는가. (필자는 2002~2004년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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