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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스포츠’를 되살리자

‘아름다운 스포츠’를 되살리자


선수들의 ‘할리우드 액션’과 심판들의 오심으로 얼룩진 월드컵… 경기 운영방식 개혁 시급 나는 축구에 관한 한 실패자다. 그리고 시대정신에 맞춰 나의 실패를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자 한다. 무슨 얘기인지 들어 보시라. 지난 20년간 나는 진정한 ‘soccer man’(축구인)으로 자처해 왔다. 물론 실제로는 축구의 본고장인 유럽 대륙적인 분위기를 풍기려고 ‘football man’이라고 말해 왔다(미국에서는 축구를 soccer라 하며, football은 미식축구를 가리킨다. 반면 유럽에서는 축구를 football이라 한다). 축구에 조예가 깊고, 축구와 관련된 여러 미묘한 부분도 어렵지 않게 간파하며, 축구의 역사·행사·현실을 유럽인 못지 않게 꿰뚫고 있는 듯 행세해 왔다. 나는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구세계(유럽)의 일원이다. 실제로 축구 경기를 보려고 야외에서 하던 보치볼 게임(잔디에서 하는 볼링의 일종)을 중단하고 자갈길을 걸어 카페에 들어간 적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2006년 독일 월드컵은 한 가지 고통스러운 진실을 깨닫게 해줬다. 축구에 관한 한 나는 결국 본질적으로 신대륙에 속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축구계의 최대 행사인 월드컵에서조차 세계축구연맹(FIFA)의 구태의연한 기득권 탓에 축구팬을 기만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통이라는 가면 아래 사기극을 영속시킨다. 구닥다리 방식으로 축구 경기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서도 새로운 경기 운영방식을 도입하는 데는 반대한다. 그 결과 ‘축구가 아름답다’는 얘기는 이제 전설이 돼 버렸다. 오늘날 축구는 선수가 일부러 엎어지고 자빠지는 속임수의 경연장이 됐다. 심판 한 명으론 결코 그런 속임수를 정확히 가려내지 못한다(실제로 이번 대회에서 심판 역할을 제대로 해낸 사람은 보지 못했다). 결국 심판들의 치명적 오심이 줄지어 나타났다. 경기의 승패가 충동적으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경우가 속출했다. 그런 오심 사례는 수없이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최근의 몇몇 경기만 국한해 지적하겠다. 16강전에서 파비오 그로소는 이탈리아 선수 특유의 풀썩 넘어지는 기술로(또한 심판의 축복으로) 아주리 군단을 8강으로 올려놓고, 용감했던 사커루(호주) 선수들을 지구 반대편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가나팀과의 16강전에서 브라질의 아드리아누 선수는 명백한 오프사이드 반칙을 범했지만 심판들의 외면 속에 득점으로 연결시켰다. 가나팀의 부활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티에리 앙리는 상대 선수의 팔꿈치에 얼굴을 얻어맞은 듯한 속임수 동작 뒤에 마치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고꾸라졌다. 덕분에 얻은 프리킥으로 프랑스팀은 스페인전에서 결정적인 두 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FIFA는 분명히 현대의 축구 경기에 대해 많은 문제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번 월드컵에 앞서 뒤에서의 태클, 옷 잡아당기기, 지연 전술 등의 반칙을 엄격하게 다스리라고 심판들에게 촉구했다. 취지는 좋았다. FIFA는 그럼으로써 축구 본연의 우아함과 경기 흐름을 되살리는 데 기여하기를 바랐다. 초반 몇 경기에서는 생각대로 되는 듯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의욕에 넘친 심판들은 좋은 취지를 결국 웃음거리로 전락시켰다. 심판들은 선수들의 온갖 행동에 호각을 불어댔다. 그러면서도 어찌된 영문인지 경기장 한복판에서 포르투갈의 루이스 피구가 상대 선수를 머리로 들이받는 장면은 놓쳤다. 심판들은 많은 오심을 저질렀지만 옳은 판정도 그만큼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오심이 경기의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나는 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들이 반칙 장면을 소개하면서 “심판을 멋지게 속였군요”라고 말할 때마다 역겨움을 느낀다. 그들은 반칙을 당한 듯이 속이는 행위를 마치 펠레의 멋진 기술이라도 되는 듯 떠들어댄다. 또 정직한 경기를 가장 중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경기 흐름을 깨지 않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식의 태도에 혐오감을 느낀다. 인간적 실수나 야비한 속임수를 막음으로써 경기의 정확성과 정직성을 보호하는 데 기여할 만한 혁신적 방안은 많다. 몇 가지만 소개한다. 제2의 주심: FIFA가 아직도 단 한 명의 주심 손에 축구 경기의 통제권을 맡기는 처사는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 한 사람이 통제하기에 운동장은 너무 넓고, 선수들은 무척 빠르며, 경기는 너무 복잡하다. 주심은 결정적인 반칙 행위를 판정하기에 유리한 위치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프로농구(NBA)는 상대적으로 경기장이 좁고 선수의 수도 적다. 그런 NBA도 1980년대 말 제3의 심판을 도입하는 혁신적 조치를 취했다. 축구에 제2의 주심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선수의 모든 행동을 경기장 내 두 군데에서 감시하자는 제안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에 속한다. 또 경기장 양끝 골라인에 또 다른 부심을 두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 경기장 양측의 선심들처럼 골라인의 부심들은 가장 결정적인 호각소리가 날 수 있는 페널티 에어리어만 감시하도록 한다. 협의: 주심이 무선 송수신기 장치를 착용해 선심 2인의 도움을 받는다는 점은 나도 안다. 그러나 그동안 월드컵 경기에서 주심이 그런 도움을 제대로 활용해 왔는지 의심스럽다. 자신의 판정을 번복하는 주심을 본 적이 없다. 판정을 번복하는 행위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 잘못된 판정을 밀어붙이는 행위가 더 부끄러운 것이다. 더욱이 월드컵이라는 중요 대회에서 그런 오심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밝혀지면 영원한 오점으로 남는다. 지금은 86년 멕시코 월드컵이 열리던 시대와 다르다. 당시 축구팬은 악명높은 ‘신의 손(Hand of God)’ 사건 같은 오심 판정을 낭만적으로 생각했다.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마라도나가 손으로 슬쩍 공을 건드려 득점한 사건 얘기다. 녹화 화면 판정: 다시 말하지만 ‘경기 흐름을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집어치워라’는 이야기다. 한 골이 승패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 스포츠에서는 결정적인 판정을 수정할 수도 있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 4년에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선 득점 논란(득점 불인정 논란)과 페널티킥을 받은 반칙만이라도 녹화 화면으로 판정하면 어떨까. 공이 골라인을 넘어갔는지 여부를 알려주는 완벽한 전자감지기를 축구공에 장착할 경우 전자는 필요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후자는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화면 판정으로 경기가 잠시 지연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미 프로풋볼리그(NFL)의 화면 판정만큼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듯하다. NFL 경기에서는 헬멧 등의 장비를 갖춘 거구의 선수들이 한데 뒤엉켜 넘어지는 경우가 많아 화면 분석으로도 시비 가리기가 쉽지 않다. 이에 비해 축구는 선수의 복장도 단순하고 모든 행위가 노출돼 있다. 따라서 화면 분석을 통해 문제(선수가 실제로 걸려 넘어졌거나, 밀쳐졌거나, 아니면 그가 속임수를 썼거나 등)를 신속하게 밝혀내는 일이 가능하다. 페널티킥이 선언된 뒤 공을 찰 때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페널티킥 선언 직후 곧바로 화면 판정에 들어간다면 경기를 오래 지연시키지도 않을 듯하다. 이의 제기: 미식축구에서 배워야 할 점이 또 하나 있다. 녹화 화면 판정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주심이 호각을 불지 않을 경우 이의를 제기하는 권한을 양팀 감독에게 부여하는 방안이다. 만일 감독을 통제하고 이의 제기의 남용을 막고 싶다면, 이의 제기가 잘못됐다고 판정될 경우 세 번의 선수교체 권한 중 한 번을 박탈하는 등의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면 감독은 정말 확실할 때에만 이의 제기권을 사용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목격한 반칙을 심판만 보지 못하는 경우에 대비, 이의 제기 선택권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2002년 한·일 월드컵 준준결승에서 독일 선수의 핸들링 반칙을 심판이 보지 못하는 바람에 미국이 패한 경기를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난다. 이의 제기 선택권 제도는 경기의 형평성을 개선하는 데도 도움이 될 듯하다. 왜냐하면 판정하기 모호한 경우 심판은 수퍼스타나 기존 강팀에 유리한 판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경기 후 재검토: 최근에는 심판의 판정 내용을 FIFA가 경기 뒤 재검토한다는 사실을 나도 안다. 그러나 그런 재검토 뒤에도 아무런 시정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듯하다. 잘못 발부된 경고·퇴장 카드를 취소하고 제때 보지 못한 반칙을 처벌하는 권한을 지닌 공식적인 재검토 제도가 필요하다. 물론 경기 중에는 만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재검토 담당자가 사후라도 경고·퇴장 카드를 발부하는 권한을 갖고 경기를 재검토하면서 해당 선수의 다음 경기 출전 여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선수들은 부상당한 체하거나 무차별 태클 때 좀 더 신중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경기 뒤 녹화 화면 분석에서 앙리의 얼굴에 상대 선수의 팔꿈치가 닿지도 않았을 경우 그에게는 다음 경기 출전을 금지하는 레드카드가 발부될 가능성도 있다. 부정 행위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한다면 소위 ‘할리우드 액션’도 사라질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잘못 발부된 경고·퇴장 카드가 취소될 수도 있다. 심판의 오심 때문에 선수가 경기 도중 치른 억울함 외에 또 한번 잘못된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아름다운 스포츠에 뒤늦게 합류한 신참자이자 추악한 미국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안다. 내게는 어떤 견해를 제시할 권한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말은 있다. 비할 데 없이 멋진 몇몇 순간(아르헨티나를 8강으로 이끌었던 “막시 로드리게스여, 영원하라!”)을 제외하면, 아름다운 축구는 이제 환상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도리안 그레이(악행을 일삼은 소설 속 주인공)도 멋진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일지 모른다. 장병걸 cbg58@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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