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을 지나자 최근 8차로로 확장된 자유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있었다. 10분쯤 달리자 길 옆으로 간간이 임진강이 보이다 사라졌다. 잠시 후 ‘파주 LG필립스LCD단지’라고 씌어 있는 낙하IC가 나왔다. 이곳에서 자유로를 빠져나와 4차로 도로를 달리자 높고 낮은 산들만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 땅이 있을까’하는 생각에 빠진 것도 잠시. ‘LG로’라는 돌로 만들어진 팻말이 보이자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면서 생긴 높이 수십m의 축대가 거대한 성벽처럼 버티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산업 불모지였던 경기북부를 첨단산업단지로 바꿔놓고 있는 파주 LG필립스LCD단지가 자리 잡은 곳이다. 2006년 4월 가동한 파주 LG필립스LCD의 7세대 공장은 그 규모가 엄청나다. 가로 205m, 세로 213m, 높이 63m로 연면적이 9만 평에 달한다. 공장의 높이가 아파트 20층에 해당할 정도로 높다. 연면적은 서울 여의도 63빌딩의 두 배다. 공장 바닥면적만 따지면 상암월드컵 경기장 같은 국제 규격의 축구장 6개가 들어설 수 있는 규모다. LG필립스LCD는 이곳에 총 투자비 5조2970억원을 들여 42인치짜리 LCD패널 8장을 만들 수 있는 7세대 LCD 생산라인을 깔았다. 공장 전체가 거의 반도체 공장의 클린룸에 해당하는 시설로 이뤄지는 등 최첨단 설비로 가득 찬 공장이다. 현재 3000여 명의 생산직 근로자들이 월 4만5000장 가량의 7세대 LCD패널을 생산하고 있다. 올 연말께는 생산량을 두 배인 9만 장으로 늘릴 계획이다.
맑은 날엔 개성공단도 보여 공장 꼭대기 층에 마련된 전망대에서는 51만 평 규모의 LCD단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7세대 공장 바로 옆에는 8세대 공장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공장 건물의 뼈대는 거의 완성됐다. 단지 중앙을 가로지르는 만우천은 서울의 청계천처럼 잘 정비되어 있고, 4000명이 입주할 수 있는 15층 규모의 직원용 아파트 4개 동이 산 아래쪽에 우뚝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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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23만t까지 처리할 수 있다는 폐수종말처리장, 북한까지 전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변전소도 보였다. 공장과 공장 사이에는 980m에 이르는 LNG 이동용 파이프라인이 보였고, 한국SMT, 희성전자 등 협력업체도 눈에 들어왔다. 또 7, 8세대 공장 주변에는 잘 정비되어 있는 9,10,11세대 공장 부지도 마련되어 있다. LG필립스LCD는 이 단지에만 2012년까지 모두 27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이럴 경우 상암월드컵 경기장의 30배 규모의 공장이 들어서게 돼 세계 최대 규모의 LCD단지로서 위용을 자랑하게 된다. 안내를 맡은 LG필립스LCD 파주사업장 이근행 대리는 “2012년 이후 단지에서 사용할 공업용수는 하루 22만t이고 이를 모두 팔당댐에서 끌어올 계획”이라며 “공업용수와 전력, LNG 등 각종 에너지의 사용량이 인구 100만 명 도시와 맞먹는다”고 말했다. 웬만한 신도시 하나가 이곳에 새로 생기는 셈이다. 전망대 아래로는 ‘LG로’, 건너편에는 우리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다. 또 전망대 망원경을 통해서는 북한 땅이 뚜렷이 보였다. 맑은 날이면 북한의 개성공단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들 간의 거리는 10㎞가 채 안 된다. 이곳이 접경지역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수도권 지역이면서도 접경지역이라 개발이 뒤처졌던 점은 이 지역의 차별적 경쟁력으로 작용했다. LG필립스LCD 파주사업장 허만복 총무담당(상무급)은 “파주가 우수 인재 확보가 용이하고 인천공항과 항구 등 물류환경이 빼어난 수도권에 위치해 LCD 클러스트 입지로 정했다”며 “접경지역이란 지정학적 위치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 지역의 차별적 경쟁력과 첨단산업에 필요한 우수 인재 확보가 쉬워야 한다는 기업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면서 군사도시였던 파주지역을 첨단산업도시로 바꿔놨다. 2002년 5월 28일 LG필립스LCD 관계자가 경기도 측에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는 전화 한 통을 했다. 파주가 바뀌기 시작한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당시 LG필립스LCD가 제시한 최초 투자 규모는 100만 평 부지에 투자예상액 100억 달러. 2002년 한 해 전체 외국인 투자유치액 91억 달러를 능가하는 규모였다. LG필립스LCD는 경북 구미에 1∼6세대 LCD 생산라인을 가동 중이다. 당시 LG필립스LCD와 삼성전자가 주도하고 있던 한국의 LCD산업은 일본, 대만 등 경쟁국과 치열한 신제품 개발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경쟁에서 이기려면 발빠른 대규모 투자가 필수였다. 하지만 구미공장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추가투자를 하려 해도 새 라인을 설치할 부지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새 공장 후보지를 찾아나서게 된 것이었다. 국내는 물론 대만 등 외국지역도 함께 검토하던 LG필립스LCD가 처음 국내에서 부지를 찾던 곳은 경기 남부지역. 하지만 이미 이 지역은 포화상태라 향후 투자규모까지 소화할 수 있는 대규모 부지를 찾기 어려웠다.
중국까지 배로 3.5일 걸려 그러는 사이 경기도가 “파주는 어떠냐”고 물어왔다. 현지 답사한 결과 파주가 몇 가지 강점을 갖고 있다고 판단됐다. 본 단지가 들어설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는 서울 여의도에서 30㎞, 인천공항에서 40㎞ 떨어진 곳. 서울에서 가까운 수도권 지역이었다. 파주 LG필립스LCD 추일성 총무팀장은 “첨단산업을 하는 데에는 우수 인재 확보가 필수적”이라며 “파주는 서울에서 가까워 이 같은 우수 인재 확보가 용이하다”고 말했다. LG전자의 안양연구소와 가까워 이들을 묶은 연구개발 네트워크를 형성하기에 유리했다. 물류환경도 좋았다. 제품의 80% 이상을 수출하는 LG필립스LCD 입장에서는 물류비용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는 회사의 경쟁력을 좌우했다. 중국 난징과 폴란드에는 아예 모듈공장을 세워놓고 있는 것도 물류비를 줄이자는 의도였다. 파주는 이런 물류비용을 줄이는 데 적합한 곳이었다. 추 부장은 “난징으로 제품을 배로 실어나를 경우 구미 공장에서는 6.5일이나 걸리지만 파주에서는 평택항을 통하더라도 3.5일이면 충분했다”며 “인천공항도 가까워 이를 통한 수출물량 이동도 용이해 물류비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됐다”고 말했다.
게다가 경기도 등 관계당국이 최단 시일 내에 입주가 가능하도록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투자에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LG필립스LCD는 2003년 2월 경기도와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그러면서 공장 착공 시기를 2004년 10월로 잡았다. 그 뒤 LG필립스LCD 측은 착공 시기를 7개월가량 앞당겨 달라고 경기도에 요청했다. 세대교체가 급격한 LCD산업의 특성상 생산이 빠르면 빠를수록 우위를 점하기 때문이었다. 정부와 경기도 등은 LG필립스LCD 측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줬다. 중앙정부 부처와 경기도, 파주시 등 15개 부처로 구성된 태스크포스팀이 구성됐다. 그러고는 공장 착공 시기에서 역산해 단지 조성을 위한 업무 처리 일정을 잡고 이를 맞추기 위해 ‘시간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경기지방공사 파주사업단 신현용 단장은 “파주 LCD단지는 통상 3년이 걸리던 산업단지 조성을 관계부처가 힘을 합쳐 13개월에 끝낸 성공작”이라고 설명했다. 2006년 4월 7세대 공장이 본격 가동하면서 파주를 비롯한 경기 북부지역은 첨단산업단지로 급속하게 바뀌고 있다. 본 단지와 함께 파주 LCD클러스터를 형성할 협력업체 단지 조성 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협력업체 단지는 본 단지에서 6㎞ 거리에 있는 당동지구와 선유지구 두 곳에 조성되고 있다. 문산읍 당동리·문산리 일원의 당동지구는 19만4000평 규모로 TFT-LCD 관련부품 및 소재·장비 제조 외국투자기업 전용단지로 조성되고 있다. 5개사가 입주 예정인 이곳에는 파주전기초자와 코템 등 2개 업체가 이미 입주를 마쳤다. 파주전기초자는 2005년에 공장을 착공해 2006년부터 양산을 시작했다. 코템도 2006년 말 양산 예정으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파주전기초자는 현재 1만 평 규모인 공장을 향후에는 3만 평 수준으로 늘릴 계획이다. 선유지구는 문산읍 선유리와 파주읍 향남리 일원에 39만8000평 규모로 조성되고 있다. TFT-LCD 관련부품 및 소재·장비 제조 국내 업체가 입주할 예정이다. 1단계로 파이컴 등 31개사가 입주할 예정인데, 파이컴과 코멧네트워크 등 2개사가 이미 공사에 들어갔다. 이 같은 파주LCD클러스터의 경제적 파급효과는 엄청나다. 경기개발연구원에 따르면 파주LCD클러스터의 생산유발 효과는 15조원에 달하고 고용유발 효과는 협력업체나 간접고용 인원까지 포함해 9만여 명이 넘는다. LG전자 등 LG계열사들을 위한 산업단지 조성도 본격화되고 있다. 이들을 위해 조성되는 문산읍 내포리 일원 33만 평의 산업단지 지정이 2006년 10월 수도권정비위원회 심의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LG전자 등 LG계열 4개사가 입주해 2009년부터 가동할 예정이다. LG화학은 파워모듈, LG 마이크론은 포토마스크(LCD용 사진원판), LG화학은 편광판·감광제 등 모두 본 단지에 공급되는 부품을 제조한다. LG전자는 이들 3사가 본 단지에 납품해 모듈(Module)화 작업을 통해 나온 LCD 패널로 LCD TV 완제품을 만들게 된다. 이 4개 계열사는 2010년까지 3조5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며, 이 경우 연간 2조8000억원, 5년간 14조원의 매출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제 파주를 ‘LG촌’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LCD단지가 본격 가동되면서 군사도시에 불과했던 파주의 분위기도 크게 달라졌다. 인구가 늘고 있다. 파주시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현재 파주시 인구는 29만 명을 돌파했다. 1년6개월 만에 4만 명이 늘어난 수치다. 파주시 관계자는 “최근에는 월 4000여 명씩 인구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LCD단지가 들어선 월롱면 일대의 유입 인구는 올해에만 2만 명을 넘어섰다. 본 단지와 협력업체, 계열사 단지 등 모두 140만 평의 LCD클러스터가 완공되면 지역인구는 5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자동차 수도 1년반 전에 비해 1만5000대가 늘어 파주시민들은 요즘 교통체증을 경험한다고 한다. 인구 유입과 함께 지역 경제와 상권도 살아나고 있다. 파주에서 근무하고 있는 LG필립스LCD 관계자는 “현재 입주해 있는 직원 3000여 명만으로도 이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금촌지역 식당은 불황을 모른다”고 말했다. 또 1번 국도 통일로 양쪽에서 본 단지 초입에 이르는 LG로엔 ‘LG’와 ‘필립스’를 상호로 내건 식당·주점·노래방 등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젊은 층이 많아 문화코드도 급속히 바뀌고 있다. 파주시는 접경 군사도시에서 시 승격 10년 만에 자족도시를 꿈꾸며 캐치프레이즈도 ‘대한민국 대표 기업도시’로 바꿨다. 파주 LCD클러스터는 이 같은 시의 캐치프레이즈를 현실로 만들어주는 한편 경기북부권 산업지도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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