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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중견기업] ‘백색 혁명’으로 철제 책상 몰아내

[파워 중견기업] ‘백색 혁명’으로 철제 책상 몰아내

1980년대만 해도 일반 사무실 책상은 철재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철제 책상은 보기에도 투박하고, 무겁고, 낡으면 녹이 슬어 보기가 흉했다. 이런 철제 책상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획일적인 사무실에 ‘백색 혁명’을 이룬 기업이 바로 사무용 가구 전문기업 ‘퍼시스’다. 퍼시스가 등장한 후 어디서나 산뜻한 원목 책상과 인간 체형에 맞춘 곡선 책상, 등받이 의자, 작업공간에 맞게 짜인 맞춤형 사무가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퍼시스는 85년 국내 최초의 시스템 사무가구 ‘DR시리즈’를 출시해 주목받았다. 이 제품은 책상 상판의 양끝을 라운드로 처리하고 측면을 두꺼운 PVC로 마감해 내구성을 높이고 부드러운 느낌의 외관을 갖춰 눈길을 끌었다. 86년 잇따라 출시한 ‘유로테크 시리즈’도 관심을 모았다. 기능성과 경제성이 조화된 이 제품은 모던한 유러피안 스타일로 조립이 가능해 다양한 형태의 사무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가구라는 평가를 받았다. 동남아에서는 복제품이 유행했고 제품 수준에 놀란 바이어들이 한국을 방문해 확인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부터 ‘퍼시스가 만들면 트렌드가 된다’는 말이 업계에서 유행처럼 떠돌았다. 1조원 규모의 사무가구 시장은 군소업체 시장점유율이 69%, 나머지 31%가 브랜드 업체다. 이 중 퍼시스는 국내 사무가구 시장점유율 16%, 사무가구 브랜드 시장점유율 52%를 차지하며 동종 업계 1위를 달리고 있다. 뒤를 이어 코아스웰(20%), 리바트(16%), 보루네오(12%)가 경쟁하고 있다. 종업원 207명을 거느리고 올 매출액 2000억원 달성을 바라보는 퍼시스가 사무용 가구를 사업화하기 시작한 건 지난 83년부터다. 손동창(58) 회장을 주축으로 서울 성수동에서 초기 자본금 2억원, 인원 30명으로 출발했다. 출범 당시 회사 이름은 ㈜한샘공업이었다. 이후 87년 한샘퍼시스로, 95년 지금의 퍼시스로 상호가 바뀌었다. 초창기에는 ㈜한샘의 브랜드를 혼용해 썼지만 한샘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퍼시스 관계자는 “현 한샘 회장인 조창걸 회장이 퍼시스 지분 11.6%를 보유하고 있지만 업무적으로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퍼시스는 창업 초기엔 스테인리스 싱크대를 주로 제조했다. 84년 김영철 퍼시스 명예회장이 대표로 있던 한샘건축연구소와 합병하면서 본격적으로 인테리어와 조화된 시스템 사무가구로 전환했다.

“퍼시스가 만들면 트렌드 된다” 손 회장과 함께 퍼시스 창업 멤버였던 양영일 사장은 한샘건축연구소장으로 있으면서 상업공간 및 가구 전반에 걸쳐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84년 한샘건축연구소가 합병되면서 퍼시스로 자리를 옮긴 양 사장은 갈고 닦은 디자인 역량을 발휘해 사무용 가구를 규격화하는 데 기여했다. 양 대표는 “다양한 가구를 디자인하면서 사무용 가구도 전체 공간과의 조화, 시스템을 고려한 맞춤형 가구의 필요성을 느꼈다”며 “특히 80년대 중반부터 PC가 대중들에게 급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해 PC 환경에 맞는 맞춤형 사무용 가구의 수요 증가를 예측한 것이 적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을 당장 끌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고품질 원칙을 고수하며 고급 원자재와 디자인 개발에 투자한 퍼시스 제품이 기존 가구보다 두 배 이상 비쌌기 때문이다. 가격보다는 품질경쟁력을 앞세워 시장을 개척해야 했다. 그래서 일반 고객보다는 외국계 회사나 디자인 계통 일을 하는 사람의 사무실을 공략해 퍼시스 제품의 우수성을 알려 나갔다. 처음엔 가격 때문에 멈칫하던 고객들도 퍼시스만의 독특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에 관심을 보였다. 퍼시스는 디자인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연구개발(R&D)을 핵심부문으로 여겨 89년 국내 최초로 과학기술처 인증 기업부설 가구디자인연구소를 설립했고, 현재는 50여 명이 디자인은 물론 신기술·신소재 개발에 힘쓰고 있다. 이 중 절반은 디자인 전공자, 나머지 절반은 공대 출신의 엔지니어들이다. 양 대표는 “인체 공학에 맞는 의자, 작업 동선을 고려한 책상 구조 등은 디자인 출신과 엔지니어들의 합작품”이라고 설명했다. 2003년 열악한 교육환경을 바꾸기 위해 교육용 가구 ‘팀스’를 개발했다. 팀스의 매출은 2004년 94억원에서 2005년 166억원을 기록, 무려 76.6% 성장을 이뤘다. 신흥증권 이주병 애널리스트는 “팀스 사업은 매년 기록적인 성장으로 퍼시스의 주력으로 자리 잡았다”며 “연구개발로 탄생한 전자칠판이나 전자교탁 등에 따른 매출 호조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분석했다. 퍼시스의 디자인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99년 독일 하노버의 iF(세계 3대 디자인어워드 중 하나)가 주최하는 ‘iF 국제디자인공모전’에서 프레고 의자로 ‘우수디자인상’과 ‘에콜로지 디자인상’을 받았다. 에콜로지 디자인상은 환경친화적인 디자인 제품에 주는 상이다. 디자인 개발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가 낳은 결과였다.

외환위기 때 오히려 사업 확장 이 회사는 구조조정이 단 한 번도 없는 회사로도 유명하다. 97년 외환위기로 가구업계가 줄줄이 도산할 때도 퍼시스는 오히려 회사를 확장했다. 가정용 가구 ‘일룸’을 만들어 일자리 창출을 시도한 것. 일룸은 짧은 시간에 급속히 시장을 넓혀 나갔다. 이에 따라 양 대표는 디자인과 제작을 함께하되, 유통은 따로 하는 ㈜일룸을 설립했다. 규모를 키워 일거리를 더 확보하겠다는 뜻이었다. 퍼시스는 창업 이후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양 대표는 직원들에게 항상 “시장에서 팔리는 우수한 제품을 만들고 재무와 수익구조가 건강해야 회사가 산다”고 강조했다. 퍼시스가 초창기 싱크대 제조에서 사무용·가정용·교육용 가구를 잇따라 출시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던 것도 시장의 트렌드를 바로 읽은 덕분이다. 퍼시스가 무적자 운영을 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100% 대리점 영업을 한다는 점이다. 퍼시스는 무운송차량·무창고·무납품·무재고 등 대리점 ‘4무(無) 정책’을 펴고 있다. 다른 동종 업계가 대리점 영업과 본사 특판 영업을 동시에 하는 것과 달리 본사는 지원만, 대리점은 영업만 하는 분업체제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 양 대표는 “이런 점이 지금도 튼튼한 유통망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이 체제는 본사에 큰 이익이 되고 있다고 한다. 본사와 대리점 간 판매권 분쟁을 최소화하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양 대표는 “가구업계에서 유통이 한 번 무너지면 회복할 수 없다”며 “본사와 대리점의 신뢰관계가 퍼시스의 튼튼한 재무구조를 받쳐주는 힘”이라고 말했다. 삼성증권 황정하 애널리스트는 “2005년 이후 경쟁업체들의 공격적인 투자 속에서도 퍼시스가 50% 이상의 높은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대리점 경쟁력”이라고 분석했다.
퍼시스 대리점은 84년 1호점을 연 이후 현재 전국에 133개가 생겼다. 발로 뛴 영업 덕분에 이제 고객군도 넓어졌다. 일반 회사부터 정부·학교·도서관·기숙사·가정 등 어디서나 퍼시스 제품을 쉽게 볼 수 있다. 인천국제공항과 KTX 역사 등 주요 공공시설에도 퍼시스 제품 일색이다. 이 회사는 99년부터 무차입 경영을 하고 있다. 현재 순 현금자산만 1000억원, 현금 유보율은 1149%에 이른다. 이 같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전국에 사옥을 설립하고 전시장과 물류센터를 만드는 등 사세를 확장하고 있다. 퍼시스는 2008년 완공을 목표로 250억원을 투자해 지하 4층, 지상 10층, 연면적 3446평 규모의 신사옥을 지을 예정이다. 대전과 광주에도 각각 2206평, 1203평 규모의 사옥을 지어 전시장과 물류센터를 갖출 계획이다.

현금 자산만 1000억원 보유 양 대표는 전국에 물류센터를 만드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가구 물류 시스템은 단순하지 않다. 소비자에게 운반해주고, 끌어올려 주고, 조립해주는 일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물류에서 효율성이 떨어지면 수익을 못 맞추게 된다.” 중동과 동남아를 주무대로 수출도 꾸준히 하고 있다. 2004년엔 147억원, 2005년엔 165억원을 달성해 12.2%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향후 미국 시장도 노리고 있다. 요즘 가구업계는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 저가 상품은 중국이, 고가 상품은 유럽 제품이 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양 대표는 “ ‘극중월구(克中越歐)’를 모토로 세계 유수 가구 디자인 벤치마킹과 새 모델 개발 등으로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가구회사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지난 상반기 퍼시스는 관계사인 일룸을 통해 상장 가구업체인 리바트(5.02%), 에넥스(6.42%), 하츠(12.24%)의 지분을 각각 취득했다. 리바트는 가정용 종합가구업체, 에넥스는 종합가구업체다. 업계에선 퍼시스가 종합가구업체로 가기 위한 행보가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았지만 퍼시스는 ‘단순투자’라고 공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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