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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울린 한 장의 사진

뉴욕을 울린 한 장의 사진

뉴욕에 다시 무슨 일이 생겼나? 차와 사람으로 더없이 북적거려야 할 57번가 거리가 텅 비었다. 누구는 황량하게 버려진 사막 같다고 표현했고, 큐레이터로 일하는 한 뉴요커는 “오, 마이 뉴욕!”이라고 탄식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9·11 이후에 미국 사람들의 정신은 공동화됐다. 그것의 실체를 보여준 것”이라고 사진작가 김아타(50)는 작품 ‘온에어 프로젝트-뉴욕’을 자평했다. 8시간 동안 노출해 찍은 뉴욕의 거리는 자동차의 희미한 전조등만 점점이 명멸한 채 폐허 같은 모습으로 남았다. 뉴욕의 미술계는 그 한 장의 사진에 충격을 받았고, 또 스님처럼 머리를 밀어버린 작가에게 열광했다. 김아타는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유명하다. 사진계에서는 꿈의 무대로 일컬어지는 국제사진센터(ICP)에서 올해 6월 8일부터 8월 27일까지 개인전을 열었고, 이미 2004년에 세계적인 사진 전문 출판사 애퍼추어에서 한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사진집을 냈다. 그의 작품은 이미 5만 달러 이상을 호가한다. ICP 전시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뉴욕 에섹스 하우스는 호텔 안에 영구 전시할 목적으로 12만 달러에 작품 두 점을 의뢰했다. 센트럴 파크를 주제로 한 이번 작품은 현재 3분의 2쯤 진행됐다. 경상남도 거제도에서 태어난 김아타는 창원대 기계공학과 출신으로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다. “사진이나 미술을 전공하지 않아서 큰 다행”이라며 우리나라 예술 교육의 병폐를 성토했다. “가장 큰 문제는 ‘잘못됐다’고 말하는 풍토다. ‘다르다’는 말이 옳다. 한 명의 개인이, 하나의 개체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나가는 데 거기에 어떻게 잘못됐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잘못이라고 말하는 판단의 근거가 대체 뭔가.” 전공도 하지 않았고, 한국에 있는 동안 활동의 근거지도 서울이 아닌 부산이었다. 그렇다면 사진계의 아웃사이더가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기준으로 보면 내가 인사이더고 그들이 아웃사이더 아닌가?” 끊임없이 정체성의 물음에 천착했던 낙관주의자다운 대답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해체 시리즈(1991∼95년)’ ‘뮤지엄 프로젝트(1995∼2001)’ ‘온에어 프로젝트(2002∼05)’로 나뉜다. “예술가의 스타일은 크게 두 가지다. 시대성이나 조류에 따라 아이디어를 가지고 작업 하는 부류가 있는 한편 철저히 세상을 해석해 가면서 작업하는 부류가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고 김아타는 말했다. “예술가의 길을 반대하던 아버지를 떠나 몇 년 동안 나의 정신과 물리적 환경을 철저히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다…그것이 명징해지고 아버지를 다시 만난 이후에는 다시 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작업을 했다. 바로 해체 작업이었다. 마치 볍씨를 뿌리듯 호주머니에서 인간을 꺼내 흩뿌려놓는 그런 작업이었다.” 이때까지 김아타는 흑백작업에 천착했다. 뻘밭, 들판, 돌무더기, 휘어진 도로 등에 나체의 모델들이 마치 시체처럼 엎어져 있는 풍경은 한마디로 기괴했다. ‘가학적’이고 ‘질식할 듯 압도적’이라는 국내 평단의 반응은 해체 시리즈와도 연관이 깊다. 아버지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어릴 때부터 사물을 깊이 관찰하고 관조하는 법을 가르쳤다. “해체는 바로 자크 데리다의 용어다. 하지만 데리다의 해체는 철저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해체였다.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나는 물리적 해체와 정신적 해체가 동시에 이뤄져야 진정한 해체라고 생각했다. 선(禪)적인 아우라, 선적인 투쟁을 거쳐야 한다. 해체 작업은 바로 그런 의미”라고 작가는 말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나 스스로 해체가 됐다.” 너와 내가 하나라는 뜻의 아타(我他)는 이런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불교 사상에 정통하지만 불교 신자는 아니다. “석가·예수·마호메트 모두 위대한 사상가이다. 그들 모두를 받아들인다.” 185㎝는 족히 넘어 보이는 데다 몸집도 커다란 작가의 목소리는 의외로 조용하고 부드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변가다. 작품 세계의 사상과 철학을 설명하는 얘기를 듣다 보면 철학책 몇 권쯤은 당장이라도 써낼 듯하다. 해체 작업 후에는 뮤지엄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내가 만났던,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사적인 박물관 안에 고정시켰다. 인간의 본능, 성적인 행태, 정치·종교 이데올로기…그리고 뮤지엄 프로젝트는 다시 온에어 프로젝트로 전이됐다.” 현재 그의 작업이 놓인 곳이다. 온에어는 한마디로 덧없음이다. 하지만 그의 덧없음은 “지독한 역설인 동시에 커다란 긍정”이다.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그 사라짐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신에 대한 지독한 긍정을 이끌어 내게 된다”고 말했다. 뉴요커들이 열광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네가 어떻게 나의 뉴욕을 이렇게 날려버릴 수 있느냐”고 항의하던 뉴요커들은 텅 비고 사라진 뉴욕의 거리를 보며 커다란 긍정, 즉 “더 큰 사랑을 느끼게 된다”고 김아타는 말했다. “지금 미국은 아시아에 열광한다. 정신적 공동화의 공간을 동양으로 메우는 셈이다…하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동양은 신비주의적 오리엔탈리즘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아시아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뉴욕 시리즈도 그러한 의지의 일환이었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은 욕심이 있다. ICP의 큐레이터 크리스토퍼 필립스는 어느새 김아타의 열광적 지지자가 됐다. 김아타 작품의 사상적 배경을 필립스만큼 잘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 정도다. “내년에는 컬럼비아대학과 영국 데이트모던 갤러리에서 세미나를 열고 뉴욕에서는 워크숍도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아타의 작품에는 대작이 많다. 그리고 컴퓨터를 이용한 디지털 작업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가장 원시적이고 아날로그적이라고 할 만한 8×10인치 필름으로 촬영해 고화질 드럼스캔을 받고 한국에서 디지털 아트웍 작업을 거친 후 다시 미국으로 가져가 프린트와 프레임 작업을 한다. 프레임 등의 후반 작업에 정성을 들이는 데는 그만의 뼈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사진작가로는 처음으로 한국 대표작가로 뽑혀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석했다. 한국에서 프레임을 만들어 가면 운송비만 수천만원이 드는 터라 어쩔 수 없이 브라질 현지에서 프레임 작업을 해야 했다. “전시 오프닝 날 오로지 전시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보다 조악했던 브라질의 프레임 기술 덕에 액자가 울고 사진이 들러붙어 못 봐 줄 지경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독일관이나 미국관은 최고의 공법으로 프레임을 만들었더라. 한마디로 내 것은 시골초등학교 학예회 액자나 다름이 없었다. 내용은 둘째치고 기본도 갖추질 못한 셈이었다”고 낯뜨거웠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그동안의 작품을 몽땅 없애버렸다.” 이 일은 뼈아픈 교훈으로 남아 작품의 외적 완성도에도 완벽주의를 추구하게 됐다. “그렇게 만들면 제작비만 500만원 정도가 든다. 세계 최고의 작가들이야 여력이 되니까 그렇게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가격에 작품도 팔지 못한다. 그러니 그네들을 따라갈 수 없다. 하지만 가랑이가 째지는 한이 있더라고 그렇게 해야 한다.” 완벽주의의 고집은 지난 ICP 전시에서 빛을 발했다. “욕심껏 제대로 보여줬다”는 그는 한국에서도 그런 정도의 규모와 품질로 전시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중은 아직 그가 낯설다. 평단에서는 그의 작업이 한국에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듯 하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어쩌면 소위 미국에서 떴다고 갑자기 칙사 대접을 해주기보다는 현재의 부정이 작가 본인이나 우리 문화계에 약이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한편으로는 미국 사람들이 크게 공감하는 아시아적 정서가 사실은 우리의 정서가 아닐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또 하나의 ‘온에어 프로젝트’인 ‘비무장지대(DMZ)’를 보며 ‘뉴욕 57번가’와 묘한 상관 관계를 느꼈다. 가장 번잡하고 바쁜 첨단의 공간과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한가한 비개발의 공간이 8시간의 노출을 통해 완전히 역전이 된다. 뉴욕은 텅 비고, DMZ는 가득 찼다. DMZ는 오히려 가득 차서 슬플까? 김아타는 어떤 역설로 DMZ를 보여주고 싶었을까? 미처 물어보지는 못했다. 앞으로 사진작가 김아타가 미국과 세계의 대중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과의 잦은 만남으로 보다 깊은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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