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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결단의 순간] 3년 매출 430억 신기술에 ‘올인’

[CEO 결단의 순간] 3년 매출 430억 신기술에 ‘올인’

시골 농부 같다고 하면 결례일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반도체 검사 장비 제조업체인 파이컴의 이억기(52) 부회장에 대한 첫인상은 영락없는 강원도 촌부(村夫)다. 넥타이 매기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 하며 ‘손가락 빗질’ 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오른쪽 볼이 자연스레 들어가는 무공해 웃음도 이 부회장의 ‘강원도식’ 전매특허다. 역시나, 해발 700m인 평창에서 태어나 17년을 자랐단다. 그래서 파이컴의 옛 이름도 평창하이테크산업이었느냐고 물어보니 볼을 싱긋거린다. “강원도 촌놈으로 자라다가 서울에 올라온 게 1976년입니다. 친척의 소개로 청계천 인근에 있는 주유소 영업사원으로 취직했어요. 꼬박 3년 동안 석유를 팔았는데 단골이 참 많았습니다.” 그는 영업방식이 독특했다. 당시 주유소의 주요 고객은 택시.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택시들은 휘발유를 채우고 회사로 돌아가는 일이 급했다. ‘영업사원 겸 주유원’이었던 이 부회장은 이들에게 외상을 받았다. 택시 기사에게는 “시간이 곧 돈”이었기 때문이다. 결제는 이튿날 받는 것으로 했다. 택시 번호를 적으니까 돈을 떼일 염려도 별로 없었다. 실적이 늘어난 것은 당연했다.

소 외양간에서 첫 사업 시작 이 부회장은 여기서 받은 성과급 비슷한 퇴직금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79년 설립된 파이컴(당시 백현전자)은 처음에는 텔레비전이나 VCR에 들어가는 와이어 하네스(전기 배전)를 만들었다. 동네 아주머니 세 명을 고용해 무모하게 도전한 일이다. “토굴 같은 소 외양간에서 시작한 첫 사업이었어요. 스물넷, 겁없을 때 얘기지요. (거의 없는 앞 머리카락을 움켜잡으면서) 처음엔 견적서도 쓸 줄 몰라 고생 많이 했지요. 더 솔직히 말하면 도면 읽을 줄도 몰랐어요. 바이어에게 ‘한 번만 가르쳐 주면 고맙겠다’는 것이 인사였습니다. 어깨 너머 배운 대로 매뉴얼을 만들었지요. 이때가 79년 2월인데, 촌놈이 벌인 사업치고 괜찮았어요. 단 하루도 월급을 밀린 적이 없으니까요!” 반도체 검사 장비를 만드는 회사로 변신한 것은 91년이다. 해마다 1년에 100%씩 임금이 오르는 것을 보고 노동집약적 산업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반도체가 뜰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그의 새로운 ‘비즈니스 카드’는 프로브 카드(Probe card)였다. “(프로브 카드는) 반도체 직접회로(IC)칩의 회로 상태나 특성이 설계도면대로 제조됐는지 여부를 검사하는 장치입니다. 수십 개의 미세 핀으로 반도체 성능을 테스트하는 거지요. 100% 수제품이다 보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일본의 프로브 카드 업체에 기술 제휴를 의뢰했다. “제품화하려면 최소 8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이 날아왔다. 이 부회장의 답변은 간단했다. “기술 전수를 받는 기간은 3년으로 하겠다. 공장 규모를 2배로 키워서 3년 내 매출을 올리면 서로 이익이 나는 것 아닌가?” 공고·농고·인문계 고교를 졸업한 세 명의 새파란 엔지니어를 일본에 파견했다. 기술의 ABC도 모르는 인력을 “일단 믿고” 보냈단다. 이들이 보배였다. 기름종이처럼 기술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든 프로브 카드 시제품을 들고 삼성전자로 달려갔다. 기흥공장 정문에서 담당자를 만나 ‘오케이(OK)’ 사인을 받은 것이 92년. 국산화가 거의 제로였던 터라 반응이 뜨거웠다. “직원들이 고마웠지요. 사장이 먼저 퇴근한다고 하면 ‘저희도 나간다’면서 직원들이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어요. 그런데 5분 있다 보면 사무실 불이 다시 켜집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못 말리는 사람들’이라는 유니폼을 맞춰줬을까요.” 구로 일대에서 파이컴은 유명한 회사가 됐다. ‘못 말리는 사람들’이란 슬로건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거래 은행에 찾아가면 ‘알아서’ 대출을 해줬단다. 직원들의 열정만으로 ‘되는 회사’였다. 이것도 잠시. 되는 사업이다 싶으니까 프로브 카드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후발주자들이 늘어나면서 인력 스카우트 붐이 일었다. 당연히 파이컴 출신이 영입 대상 1순위였다. 어렵사리 키운 사람들이 회사를 떠나갔다.

티셔츠에 새긴 ‘못 말리는 사람들’ “기침 소리만 해도 누군지 아는 사람들었는데. 제 덕이 부족했는지 하나둘 사표를 내더군요. 언제 떠났는지도 모르겠는데…. 가끔 반도체 장비 행사에서 만나게 돼요. 그 친구들이 제 눈을 피하지요. 그러면 일일이 잡아다가 ‘회사 욕 먹이지 마라’고 충고를 해줬습니다. 그래도 가슴은 쓰리지요. 사람을 훔쳐서 기술을 만들다니….” 희망이 없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다. 이 부회장의 결단은 무모했다. “100% 멤스(초미세전자기계시스템·MEMS) 기술로 만든다.” 프로브 카드는 반도체 전 공정 단계에서 검사 장비에 탑재된 소모성 부품. 멤스 기술은 기존의 프로브 카드 제조에 반도체 공정을 적용한 신개념 검사 부품이었다. 기존 제품이 1회에 최대 32개 칩을 검사할 수 있었던 데 반해 멤스 카드는 한 번 검사로 200개 이상 칩을 다룰 수 있다. 생산성이 늘어난 것은 물론 정밀도가 100% 이상 향상됐다. 또 D램·플래시메모리 등 다양한 종류의 반도체 검사 공정에 적용이 가능하다. 12인치(300㎜) 이상 대 면적 반도체 웨이퍼에도 적응력이 뛰어나다. 파이컴은 2000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하면서 투자받은 자금을 몽땅 여기에 쏟아부었다. 반도체 공정은 창사 이래 처음이었다. 당연히 사람도, 설비도 없었다. 내부에서조차 “너무 성급하다”는 반대 여론이 대세였다. 이 부회장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고집적화·고속화·대용량화가 반도체의 시장 트렌드다. 검사 장비도 변한다.” “잠을 자면서도 고민했어요. 그래도 맞는 길이다! 확신을 했습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매출이 400억원이 조금 넘었는데…. 기찻길 옆 오막살이 공장을 새로 짓고 멤스 장비를 설치하는 데 정확히 430억원이 들었습니다. ‘저러다 파이컴이 죽는다’는 소리 많이 들었어요.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요.”

▶“잠을 자면서도 고민했어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매출이 400억원이 조금 넘었는데…. 기찻길 옆 오막살이 공장을 새로 짓고 멤스 장비 설치하는 데 정확히 430억원이 들었습니다. ‘저러다 파이컴이 죽는다’는 소리 많이 들었어요.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요.”

등줄기로 땀이 흐를 때가 있고 피눈물이 흐를 때가 있다. 이 부회장 등줄기에 쭈뼛! 하고 긴장감 섞인 피눈물이 흐를 때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시 파이컴의 규모로는 시도하기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2001년에 적자가 100억원이 넘었다. 신제품 개발이 더뎌지면서 회사 주가가 공모가의 10%로 곤두박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의 ‘강원도 뚝심’은 거칠 것이 없었다. 몸집도 과감하게 불렸다. 120명이던 직원을 연 20명씩 신규 채용해 200명으로 늘렸다. 국내 반도체 검사 장비 업체 최초로 멤스 공장을 구축하고 제품을 개발한 것이 2003년. 파이컴이 내놓은 ‘멤스 프로브 카드’는 회사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현재 이 회사가 만드는 멤스 프로브 카드는 하이닉스반도체·LG필립스LCD 등에 공급되고 있다. 연간 매출만 800억원대. 지난해에는 산업자원부가 선정한 ‘대한민국 10대 신기술’에 선정되기도 했다. 삼성전자의 초고속 이동인터넷(WiBro) 기술, LG전자의 듀얼 인젝션 스팀 방식 드럼세탁기, 현대·기아자동차의 V-6 람다 엔진 등 쟁쟁한 대기업과 함께 선정된 것인 만큼 그 기술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이 부회장의 목소리가 굵어진다. 최근 이 회사는 미국의 폼팩터로부터 특허 침해 소송을 겪고 있다. “(특허 소송을 당한 것이) 35개월째입니다. 회사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소송입니다. 꼼꼼히 내용을 검토해 보니 오히려 파이컴 기술을 침해한 것이 있더군요. 영업 방해 전략입니다. 정면 돌파할 생각입니다. 덕분에 파출소 한 번 가보지 않은 이력에 오점(?)이 생겼어요. 기업의 자존심을 넘어서 국가 산업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지요.” 목소리가 굵어지는 것이, 역시나! 믿는 구석이 있었다. ‘육민관(育民館) 정신’이다. 이 부회장은 9남매 중에 가운데다. 워낙에 가난했던 터라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어렵사리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나이로 열아홉 때였다. 그의 새 둥지는 강원도 원주의 육민관고등학교였다. “제가 고등학교를 가면 아랫동생이 중학교를 못 가요. 대학을 가면 그 아랫동생이 중학교를 못 갑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저를 학교에 보내주셨어요. 그게 육민관고등학교예요. 독립운동가 홍범희 선생이 지은 강원도 최초의 사학입니다. 기를 육, 백성 민, 집 관자를 써서 육민관입니다.”

“나를 키운 것은 育民館 정신” 이렇게 해서 9남매 가운데 처음으로 인문계 학교에 진학한 것. 그는 이 학교의 교훈인 ‘참된 실력, 굳센 자주, 따뜻한 사람’을 잊을 수 없다. 육민관 얘기를 꺼내자마자 이 부회장은 신이 났다. “육민관 정신이 뭔지 아세요? 근성입니다. 벌써 40년도 지난 얘긴데요. 육민관이 전국 여자배구대회에서 3연패한 적이 있어요. 그때 여학생이 9명이었는데, 9인제 배구대회였지요. 후보도 한 명 없이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겁니다!” 그에게 육민관 정신은 ‘진인사(盡人事)’라는 좌우명으로 남았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사람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뒤에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가운데 앞자만 가져온 것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고사지요.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제갈량이 관우에게 조조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관우는 조조에게 도망갈 길을 내주고 말지요. 이때 제갈량이 ‘조조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므로 조조에게 은혜를 입었던 관우로 하여금 그 은혜를 갚으라고 한 것이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모두 다 해도 목숨은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다’며 탄식을 합니다. 저는 이게 불만입니다. 사람의 일을 다하면 그뿐이지 왜 하늘을 바라보느냐(待天命)는 겁니다.”


이억기 대표는…


“회장은 아버지가, 나는 부회장.”

1955년 강원도 평창 생. “하루 한 갑 반”이라고 하던 흡연량은 거짓말이다. 이억기 파이컴 대표이사 부회장은 적어도 하루 세 갑을 피우는 애연가다. 그래서 10개월마다 한 번씩 건강검진을 받는다고. 주유소 영업사원으로 상경한 것이 76년. 79년부터 사업을 시작해 지금은 연 매출 800억원대의 기술 회사 대표가 됐다. “왜 부회장이냐”고 물으니 “구순(九旬)이 넘은 아버지에게 ‘회장’ 명함을 파드렸으니 당연히 부회장”이라고 한다. “보기 드문 효자”라고 덕담을 건네자 “‘품격 있게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 말씀을 지키는 것뿐”이란다. 그래서일까. 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벤처기업을 경영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사람이 먼저다. 아무리 기술 시대라고 해도 ‘테크니컬한 사람’에게는 거부감이 온단다. 그냥 우직한 사람이 좋다. “말할 것도 없어요. 사람이 먼저지요. 그래야 미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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