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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벌 2세는 전문경영인

한국 재벌 2세는 전문경영인


기업 이끌 역량 충분한데 경영권 승계 왜 문제되나 지난 1월 초 이재용(38) 삼성전자 전무가 전 세계 경제계에 공식 등장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아들로 미국 하버드대에서 공부한 이 전무는 미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전제품 박람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신 유행의 무테 안경을 쓴 그는 침착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루퍼트 머독(호주의 미디어 재벌 총수)을 비롯한 여러 참석자와 유창한 영어로 대화했다. 아버지 이건희 회장의 뻣뻣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몇 주 뒤 이 전무는 삼성의 ‘최고 고객관리 책임자(CCO)’로 임명됐다. 관측통들에 따르면 그것은 삼성그룹의 지휘권을 확보하려는 첫 번째 단계였다. 삼성의 이번 인사는 한국의 기업문화 심장부의 역설적 모습을 부각시켰다. 현재 한국의 재벌들은 적극적으로 기업 현대화를 추진하면서 첨단 경영방식을 도입하고 사업을 전 세계로 확장시켜 간다. 예컨대 삼성은 연간 매출액 약 570억 달러의 90%를 해외에서 벌어들인다. 그러나 이 같은 기업 현대화 과정을 촉진하는 이재용 전무 같은 2세 지도자들이 경영권 승계에선 가장 전통적인(일각의 주장에 따르면 ‘후진적인’) 방식에 의존한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방식이다. 이 전무의 승진은 가장 최근의 사례일 뿐이다. 2년 전 현대자동차는 정몽구 회장의 아들 정의선씨를 자매회사인 기아자동차의 사장으로 임명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2세 지도자들은 벌써 ‘한국 주식회사’의 운영 방식을 변화시켜 간다. 젊은 왕세자의 대다수는 미국의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사업방식을 포기하고 서구의 현대적 경영방식을 채택한다. 이는 정실 자본주의 내지 족벌주의를 버리겠다는 뜻이다(물론 자신들의 경영권 승계 문제는 예외). 사주(社主) 개인의 취향에 따른 모험적인 기업경영을 포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신 2세 지도자들은 신중한 계산과 과학적 연구를 중시한다. 메릴린치증권 서울사무소의 이남우 연구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영향 때문에 한국 기업들은 앞으로 고위험·고수익 전략보다는 신중한 전략을 택할 듯하다.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조심성 있고 계산적이다. ” 그런 새로운 접근방식은 과거에 비해 덜 극적이지만 훨씬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삼성의 경영실적은 보여준다. 1980~90년대 삼성은 이건희 회장 밑에서 반도체 같은 첨단분야에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이런 투자 방식은 성공했다. 삼성은 디지털 기술부문에서 세계적인 일류 기업이 됐고, 지난해에는 75억 달러의 이익을 냈다. 그러나 그런 모험적인 투자방식은 기술분야의 변화가 급격하고 예측이 힘든 오늘날에는 위험할지도 모른다. 이 전무는 위험을 공유하는 합작사업에서 해결책을 찾은 듯하다. 예를 들어 삼성은 4년 전 평면 LCD TV 모니터 생산부문에서 일본의 소니와 제휴했다. 오늘날 그 합작관계는 세계시장을 이끌어간다. 다른 대기업들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인다. 예컨대 현대자동차의 정몽구 회장은 해외공장을 증설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급격히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확장 속도를 늦춰 왔다. 또 대형 소매업체인 신세계와 두산중공업처럼 2세들이 경영권을 장악한 다른 대기업들도 좀 더 신중하고 치밀한 사업모델을 채택해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뒀다. 서울시립대 윤창현 교수에 따르면 그 같은 성공은 2세 경영진이 “전 세계 동향을 읽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부자(父子) 간 경영권 세습에는 단점도 있다고 비판자들은 지적한다. 능력과 전혀 상관없이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시민단체들은 삼성 등 재벌기업들의 가족 간 경영권 승계를 비판해 왔다. 삼성 이 회장 부자의 상속세 탈세 혐의 소송이 진행 중이다. 시민단체 측은 단순히 공정성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기업관행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동안 한국의 재벌기업들은 부정부패를 비롯한 여러 잘못을 저질러 왔다. 이를 정화하려면 가족 구성원이 아니라 전문경영인이 필요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4년 전 한국의 잘못된 기업관행을 바로잡겠다는 공약으로 권좌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규제정책은 기업의 투자 의욕을 꺾어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그의 개혁노선은 국민적 인기를 잃었다. 한국의 새로운 기업 지도자들이 실적을 내놓을 경우 그런 추세는 지속될지도 모른다. 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재벌들은 지금까지 효과적임을 입증했다. 그들의 강력한 족벌주의 지도력은 이익을 가져와 국민을 잘 살게 만들었다. ” 결국 가장 중요한 점은 결과다. 이재용 전무가 아버지보다 더 치밀하고 TV 화면에 더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으나, 국민에게 돈을 벌어다주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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