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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의 향수

2차대전의 향수


실상 그대로 담은 TV 다큐멘터리 '전쟁'…이라크 상황 상기시켜 켄 번스가 7부작 다큐멘터리 ‘전쟁(The War)’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독일과 손잡고 러시아와 싸웠다고 생각하는 고교생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화가 났기 때문이다. 믿기지 않았다.” 우리는 엉망이 된 미국의 교육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나설지 모르지만 번스는 실용적인 사람이다. 적어도 그가 PBS 방송용으로 만든 총 방영시간 14.5시간 분량의 이 영화는 실현 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6년의 세월, 기가바이트 분량의 영상, 기금 조성 능력, 올바른 감성-노력 지수, 악몽을 견뎌내는 끈기는 필요했다. “지난밤 펠렐리우에 관한 악몽을 꿨다”고 그는 말했다(1944년 필리핀 근처에서 벌인 전략적 가치가 전혀 없었던 악전고투를 가리킨다. 9월 23일 첫 전파를 타는 시리즈의 3부로 나간다). “작은 둑에 오르려고 애쓰는데 모래가 자꾸 꺼졌다. 영화를 찍는 내내 그런 일이 벌어졌다. 편집실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궁리하는 꿈을 꾸는데 내가 갑자기 전투 현장에 가 있고는 했다.” 번스는 독자 여러분도 그곳에 데려가려 한다. 펠렐리우, 타라와, 이오지마, 디데이, 휘르트겐 숲, 벌지 전투, 아우슈비츠, 히로시마의 한복판으로. 그리고 평범한 병사와 조종사의 가족들이 기다리며 걱정하는 워터베리(코네티컷), 모바일(앨라배마), 루번(미네소타), 새크라멘토(캘리포니아)로. 번스의 1990년 영화 ‘남북전쟁(The Civil War)’을 본 사람은 이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짐작이 간다. 다만 이번에는 카메라를 좌우로 움직이며 흐릿한 사진들을 폭넓게 잡는 전매특허 수법뿐 아니라 전투 필름을 보충했다. 놀랍게도 상당수는 생생한 총천연색이다. 셸비 푸트 같은 역사학자 대신 현장에 있었던 참전용사들의 증언도 나온다. 어느 영화제작자의 눈길이라도 사로잡을 만한 얼굴들이다. 지금도 체구가 날렵하고 미남자인 시드 필립스(모바일시 거주)는 태평양에서 자행된 만행을 회상했다. 그와 동향인 존 그레이는 몸동작이나 생김새가 블루스 가수 하울링 울프를 닮았다. 사모아 처녀들과 춤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들은 흑인에게 정말로 꼬리가 달렸는지 확인하려고 그의 등 뒤를 더듬었다고 한다. 루번에 사는 점잖게 생긴 틴 아넨슨은 전쟁의 악몽에 시달리는 표정으로 지금도 트럭을 탄 독일군들에게 오른손으로 총을 갈겨대는 꿈을 꾸고 난 날에는 오른손이 말을 안 듣는다고 말한다. 번스가 사진과 필름을 가장 많이 얻어낸 곳은 미군이 공식 인정한 전쟁 사진들이 보관된 국립문서보관소였다. “무엇보다 화가 나는 일은 이용료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독일과 일본이 가장 많은 돈을 청구했는데 말이다. 이 영화 어디가 맘에 안 들었기에 그랬지?” 최근 발견된 컬러 필름(옛날 뉴스에서는 일부 컬러 영상을 흑백으로 보여줬다)에는 무시무시한 긴박성이 담겼다. “처참한 장면에 최대한 가까이 갔다.” 그래도 번스는 준비작업이 별일 아니었다는 투로 말했다. “다들 그렇듯이 나 역시 처음 공개하는 희귀 영상이라는 말을 자주 써먹었다. 그러나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림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관객을 그 순간으로 데려가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또 번스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순간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현재의 이라크, 그리고 모습이 사뭇 다른 후방이다. 그곳에는 재활용 운동도 없고, 전쟁채권이나 배급도 없으며, 등화관제를 하라고 소리치는 공습 감시인도 없다. 실은 남 다르게 받아들일 이유가 있는, 2차대전 때보다 수가 훨씬 적은 파병자 가족을 제외하고는 “후방”이라는 말 자체가 별스러운 표현이다. “전쟁 지원”이라는 말도 쇼핑몰 주차장의 노란 리본 스티커를 뜻할 뿐이다. 현재 벌어지는 전쟁에서는 “주검으로 돌아오는 전사자의 관 촬영은 금지된다. 이 영화에는 선박에서 커다란 그물이 내려지는 광경이 나온다. 그물마다 성조기를 두른 관이 15~20개씩 가득하다. 요즘에는 나쁜 장면은 보여주지도 못한다. 인터넷 포르노 업자처럼 굴지 않는 한 나쁜 장면을 찾기도 힘들다. 우리가 어떤 희생을 치르는지도 모른다”고 번스는 말했다. 그가 2001년 ‘전쟁’의 제작을 시작했을 때는 영화에서 언급도 안 되는 이라크가 부차적 주제가 될 줄은 몰랐다. 전쟁이 끝나고 고작 9년 뒤 출판된 존 치버의 1954년 단편 ‘시골 남편(The Country Husband)’을 보면 교외의 칵테일 파티에서 전쟁 이야기 거론은 “적절치 않고 무례한”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파쿼슨의 거실에 모인 사람들은 과거나 전쟁은 없었다고, 세상에 위험이나 말썽은 없었다고 무언의 합의를 본 듯했다.” 월남전이 끝난 뒤, 특히 디데이 40주년(워싱턴 포스트의 수필가이자 서평가 조너선 야들리는 당시 분위기를 “감성과 자축의 긴 잔치”라 불렀다)인 1984년 이후 우리는 2차대전을 떠올리면서 어물어물 향수(鄕愁)를 느끼기 시작했다. 관련 프로의 텔레비전 시청률이 높아지고 서점과 극장에서도 돈벌이가 됐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해설자로 나온 1974년 다큐멘터리 ‘전쟁 중인 세계(The World at War)’에서 톰 브로코가 쓴 1998년 책 ‘위대한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에 이르는 작품들의 보편적 자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스터즈 터컬이 관련자들의 증언을 모아 낸 1984년 책의 제목 ‘좋은 전쟁(The Good War)’과 같았다. 사실 전쟁 그 자체에 매료됐다기보다는 “우리와 우리가 추구하는 대의명분의 선량함”에 매료됐을 뿐이라고 야들리는 주장했다. 번스의 영화는 2차대전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는 부류에 속한다. 그것은 톰 행크스의 1998년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좋은 본보기인 무표정한 리얼리즘이다. 그 영화는 병사들의 시각에서 잔혹성과 불합리성을 생생하게 보여줬다(행크스는 번스의 다큐멘터리에서 일부 해설을 맡았다). 현시대 학자들에게 상의하달식 역사관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하겠으며, 그런 수정주의가 번스의 포퓰리즘적 감성에 맞는다. ‘전쟁’은 아이젠하워가 쓴 ‘유럽의 십자군(Crusade in Europe)’보다는 어니 파일(종군기자) 스타일의 보도, 빌 모들린의 시사만화 전통에 속한다. 그런 감성은 이미 ‘남북전쟁’과 1994년 작 ‘야구(Baseball)’에서 선보였다. ‘야구’에서 가장 인상적인 선수는 베이브 루스가 아니라 흑인리그의 강타자 벅 오닐이다. 그러나 번스의 모든 영화와 마찬가지로 ‘전쟁’ 역시 그의 가장 중요한 사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그것을 “죽은 사람 깨우기”라 불렀다. 본인이 자주 말했듯이 어머니를 일찍 여읜 사실이 그의 생애와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진부한 심리학 표현은 쓰고 싶지 않지만”). 번스가 이 영화 제작을 서둔 또 하나의 촉매는 2차대전 참전용사가 매일 1000명씩 세상을 떠난다는 뉴스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1000명이라니,” 그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억누르고 지냈든, 무엇이 비밀이었든 간에 그들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그 모든 연상과 추억이 사라진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전쟁’은 결코 논쟁이 아니다. ‘반전’ 영화도 아니다. 다만 실제로 전투를 치르는 사람의 눈에 비친 전투의 실상을 보여주는 영화가 으레 내재적으로 지니는 반전 성격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마이클 무어처럼 논쟁을 벌이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려는 목적이 있다”고 번스가 말했다. “그것도 좋지만 그러면 구속을 받게 된다.” 번스는 아무 속셈 없이 영웅적 행위와 잔학 행위, 탁월한 지휘력과 형편없는 결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펠렐리우이거나 큰 희생을 치른 1944년의 마켓가든 작전이 그런 예다. 공연히 8일 동안 542명을 희생시킨 마켓가든 작전은 “아이젠하워가 몽고메리의 건의를 승인한 멍청하고 바보같이 서툰 짓”이었다. 2차대전 한 달 동안에 이라크전 4년에 맞먹는 사상자가 나왔다. 번스의 영화에 잘 나오듯이 무능하고 잔혹한 면은 양측 모두에 있었다. 태평양의 미군 병사들은 목이 잘리고 입에 성기가 물린 전우들의 모습을 봤다. 그들은 일본군 포로를 받아주지 않는 방식으로 보복했다. 그렇다고 해서 번스가 기본적으로 도덕적 등가(等價)였다는 생각으로 양측을 보여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잔인하게 행동하더라도 누가 좋은 편인지는 늘 분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누가 정색을 하고 좋은 전쟁 운운하겠는가? 40만 명 정도의 미군을 포함해 약 6000만 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표현을 써온 내내 그 사람들이 아닌 다음에야. “ 2차대전이라는 용감한 무혈 신화의 포장을 벗기고 그야말로 최악의 전쟁이었다고 말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번스가 말했다. 다만 첫 회분 제목처럼 필요한 전쟁이었을 뿐이다. 지금까지는 그런 부차적 주제에 발끈하고 나선 애국자들이 없었다. 실은 “시사회 때마다” 참전용사들이 자신이 체험한 전쟁의 모습을 보여줬다며 감사를 표했다고 번스가 말했다. 물론 이 영화는 아직 방영되지 않았다. 현재로선 히스패닉 집단과 일부 인디언의 이야기가 잘 반영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만을 표출했다. 일부 관련 단체는 심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홀로코스트 사진이나 기관총 세례에 병사의 머리가 날아가는 장면에는 아무 말 안 하면서 욕설이 네 차례 나왔다고 항의했다. 그중 하나는 ‘FUBAR’라는 5회 분의 제목에서 언급된다[젊은 세대를 위해 설명하자면 FUBAR는 “Fucked Up Beyond All Recognition(엉망이 됐다)”이라는 뜻의 군대용어였다. 어쩌면 그 말을 넣은 게 실수였나 모르겠다]. 타락한 요즘 후방은 자기 코끝 너머 이상은 보지도 못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더 이상 필요한가? 여태 뭘 보고 들었나. 번스는 참전용사, 가족, 지역사회를 신중하게 골랐고, 우리는 그들의 눈을 통해 전쟁을 보게 된다. 이들을 고를 때는 지역과 민족을 안배했고, 가식 없이 호감이 가는 사람을 뽑았다(그냥 보통사람이 아닌 분도 있다. 카메라 앞에서 인상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학자이자 에세이 작가이자 역사가인 폴 푸셀은 그냥 보병으로 나온다. 전쟁 때 그는 그냥 폴 푸셀이었을 뿐이라고 번스는 주장했다). 그래도 번스는 1940년대의 후방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전쟁’은 국가적 수치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앨라배마주 버밍햄의 인종폭동을 부른 흑인 억압, 한창 좋은 전쟁을 치르는 다른 장소들, 일본계 미국인들을 가둔 대규모 수용소 등등. 번스는 관객의 90%가 그 수용소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고 하더라고 말했다(이거야말로 국가적 수치다). 영화는 히로시마의 폐허와 방사능 희생자들의 모습에서 글렌 밀러의 노래가 사운드트랙으로 깔리면서 온당치 않게 환호작약하는 타임스 광장의 유럽전승기념일(5월 8일) 모습으로 바뀐다. 고의적으로 그렇게 했다. “물론 보라고 코앞에 들이댔다”고 번스는 말했다. 그는 이 부분이 신경 쓰여 후속 e-메일을 보내 설명했다. “핵 말살 뒤에 기뻐하는 모습이 이어지니 나 역시 심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참 무시무시한 일이지만 당시 미국은 실제로 그런 분위기였다.” 우리가 2차대전 때 체험한 단결이 재현된 경우는 단 한 번, 9·11 직후였다. 그 단결이 얼마나 오래갔는지는 주지의 사실이다. 지난 6월 말 어느 날 오후, 번스는 콩코드(뉴햄프셔)에서 ‘전쟁’의 한 시간짜리 저녁 시사회를 앞두고 작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집과 회사가 있는 시골 월폴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는 1년 내내 이 일을 해왔다. 어떤 영화도 봐주는 관객이 없으면 걸작이 못 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큰손이 돈을 대주지도 않는다(PBS는 이 시리즈 홍보에 근 1000만 달러를 쓴다). 시청 예술센터의 참나무 회의실에 들어온 사람은 1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4시30분이 되자 적어도 100명이 무료 입장권을 받으려고 밖에 줄을 섰다. 뉴햄프셔 전우회 버스 두 대가 왔다. 휠체어나 보행보조기를 쓰는 백발 노인들이 내렸다. 산소 탱크를 구비한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이 합류한 대기자 줄은 보도를 넘어 차도로 이어졌다. 손자나 증손자가 분명해 보이는 아이들을 제외하면 50세 미만은 거의 없었다. 번즈는 욕설에 관한 질문이나 히스패닉들의 항의를 마치 공 받기 연습하듯 가볍게 받아 넘겼다. 욕설 문제는 그보다 더 욕설이 난무하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비교하고, 1940년에는 히스패닉이 미국 인구의 1.4%에 불과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50만 명으로 추산되는 히스패닉이 참전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 상영할 때는 본인이 약간 내용을 손보고, 다큐멘터리 작가 엑토르 갈란과 함께 히스패닉 병사들을 다룬 보충자료를 찍었다. 28분 분량이 공식 DVD나 재방송에 들어가게 된다. 또 첫 방송 때 두 회에 나눠 제작진 소개가 나오기 전에 집어넣을 생각이다. 또 인디언 부대 자료도 삽입했다. 그가 다음에 들르는 곳은 아래층의 리셉션장이다. 천장이 낮고 바닥에 카펫이 깔린 방에 테이블들이 차려져 있다. 야채, 소스, 과자류, 치즈, 과일, 병맥주, 플라스틱 컵에 담긴 포도주 등. 그가 이런 상차림을 몇 번이나 봤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실은 먹지도 않는다.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인사 나누느라 정신이 없다. 게다가 탄수화물과 당분은 안 먹는 다이어트를 실시해 기운도 얻고 몸무게도 9㎏을 뺐다고 한다. 강당은 만원이다. 참전용사가 몇 명이나 되는지 묻자 약 3분의 1이 일어섰다. 시사회 후의 질의응답에 대비해 벌써 마이크가 준비됐다. 번스는 연설을 했다. 무식한 고교생들, 하루 1000명씩 타계하는 참전용사들, 카퍼레이드 벌이는 영웅도 없는 현실, 좋은 전쟁은 못 되지만 필요한 전쟁 이야기 등이 나왔다. 무대 뒤에서 그는 필름(1회분마다 한 토막씩 총 일곱 토막이다)이 돌아가는 동안 치즈를 약간 먹었다. 영화가 끝난 뒤 다시 무대에 올라 기립박수를 받았다. 관객들이 마이크 앞에 줄을 섰다. 반바지 차림에 말총머리를 한 사람이 나와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 보라고 제안했다(번스는 우리가 폭력에 이끌리는 듯하다는 데 동의하고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 대가를 상기시키는 일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가장 불쾌한 장면 가운데 하나인 1943년 타라와 전투의 한 참전용사가 종이봉투를 들고 무대에 다가갔다. 그는 옛 사령관을 찬양한 뒤 그 사령관의 여동생이 책을 썼으며, 실은 그것을 들고 왔다고 말했다. 한 중년남자는 부친과 숙부들이 참전용사라고 말했다. 한 숙부는 격추당했으나 승무원들을 살렸고, 또 한 숙부는 바탄 반도에서 벌어진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았다. “감정에 북받쳐서 미안하다”고 그는 말했다. 2주 뒤 번스의 사무실에 갔다. 우리 머리 위에는 재키 로빈슨의 큰 사진이 걸렸다. 번스의 사무실은 1979년 이곳에 이사온 이래 살아온 농가 안에 있다. 이곳에 자리 잡고 만든 첫 영화 ‘브루클린 다리(Brooklyn Bridge)’로 유명해진 뒤 기금을 조성해 다음 영화를 만들고, 이어 20여 편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내가 만든 것 중 최고’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최초 작품”이라고 그가 말했다(우리는 그가 2001년 ‘재즈’를 완성한 뒤에도 이 방에 함께 앉았으며, 그때도 그는 같은 소리를 했다). 그의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전쟁’은 수백 개의 작은 순간들을 번득이는 영감으로 잘 연결한 데서 설득력이 나온다. 심란한 전투 장면이나 관객을 보고 절규하는 듯한 시체들뿐 아니라 그토록 힘들게 가슴에 담아뒀던 이야기를 이제 늙은이가 되어 회상하는 참전용사들 등. 워터베리에서 온 유대인 참전용사 레이 레오폴드(얼마 전 그는 하루 1000명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의학실험이 실시된 나치 “정신병원”을 해방시킨 이야기를 하다 말고 “내가 본 장면을 도저히 말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런 다음 번스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한없이 오래 카메라를 응시했다.” 번스는 자기가 하는 일을 이야기하기 좋아한다. 정말이지 잘 떠든다. 어떤 장면에선 더 좋아하는 엘링턴이나 빌리 할러데이가 부른 노래를 놔두고 굳이 베니 굿맨의 ‘Solitude’ 녹음을 쓴 이유를 설명했다. 홀로코스트 장면에 쓸 음악을 위해선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메시앙은 삭막하고 법열적이며 무시무시한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를 1940년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작곡하기 시작했다)의 미망인을 찾아가 홀로코스트 장면에 발췌곡을 써도 좋다는 좀처럼 주지 않는 귀한 승낙을 얻어냈다. “클라리넷 소리가 두개골들의 영상 위로 겹치면서 가슴을 아프게 한다”고 번스는 말했다. “가만히 들어보면 그 장면에서 음악이 세 차례 절정에 올랐다가 끝난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그 마지막은 정말 견디기 어렵다. 다시는 시작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 된다. 우리는 아주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다.” 그는 원칙적으로 너무 자주 본 영상은 피한다. ‘전쟁’에는 이오지마의 성조기 게양 장면이 안 나온다. ‘전쟁’은 공들여 중립을 유지하지만 번스 본인은 그 많은 작품을 통해 찬양해온 나라의 요즘 돌아가는 꼴에 분통을 참지 못한다. 현재 완성 중인 미국 국립공원을 다룬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런 이야기로 새고는 했다. “루스벨트는 민간자원보전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석 달 이내로, 놀라지 마시라, 석 달 이내로 젊은이 30만 명이 일자리를 얻어 돈을 송금하면서 수백만 명을 도왔다. 그런데 우리는 석 달 동안 뉴올리언스에 빌어먹을 트레일러 한 대 못 들여보냈다. 지금 우리 꼴이 그렇다.” “에” 내가 말했다. “그 이야기를 하시려면,” 그러나 그는 이미 그 이야기에 들어갔다. “미국은 머리를 외주(外注)에 맡겼다. 무슨 일을 할 능력을 말이다. 끔찍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서비스 산업,” “그건 앞뒤가 안 맞는 용어다.” “지방기사 보도를 외주 맡겼다는 신문사 이야기를 들었나?” “끔찍한 일이다. 이게 어느 나라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든다. 끝까지 버텨 여기서 숨을 거두는 일이 가능할까?” “여기서 죽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난 영화를 어떤 점에선 방벽이 아니라 일종의 ‘우리 잘해볼 수 없을까?’ 하는 식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왜 단결하기로 동의했는지 기억나지 않는가?’” 번스는 ‘전쟁’이 국수적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공들여 신중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전쟁에 관한 질문을 하고 우리 정부가 오직 필요한 전쟁만 하도록 챙기면 좋겠다. 국민은 어떤 전쟁이 필요한 전쟁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영화 주제곡으로 사운드트랙에 나오는 노라 존스가 부른 유명하지 않은 옛날 노래 ‘America’(미국이여, 미국이여, 나의 모든 것을 바쳤노라)를 듣노라면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이 노래는 리본 장식이 달린 스포츠유틸리티차량이나 장갑(裝甲)이 불충분한 험비에서나 나오는 노래로 상상할 만하다. 노래를 듣는 사람 100명 중 한 명이라도 존스의 서글픈 목소리가 실은 필요한 전쟁에서 자신을 희생한 일은 이제 5센트짜리 콜라나 악수만으로 계약을 체결한 일처럼 다 지나간 옛일(아프가니스탄의 경우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다)이 됐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을 눈치 챌까? 그러나 번스는 낙관주의자다. 확실하게 전하기만 하면 대규모 관객(PBS 시청자를 대규모 관객이라고 불러도 된다면)이 이야기와 그 함의를 잘 알아들으리라고 생각한다. 번스는 일반대중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는지 모른다. 그들은 자국 역사 지식이 너무 부족하고 홍보술, 쉽게 말하면 거짓말에 속는 데 익숙해졌으며, 대중음악에서 영화와 연예인과 뉴스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1회용 “정보”에 길들여진 나머지 사실은 한 귀로 들어가 다른 귀로 새나가 버린다. 미국이 독일과 맞서 싸웠는지, 아니면 함께 싸웠는지가 시험 문제가 됐으며, 시험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라크 전쟁은 이 세상이 변화하는 형상과 잠정적 진실들의 모체라는 인식을 드러낸 가장 최근의 사례일 뿐이다. 후세인이 오사마로 변하고 오사마가 힐러리로 변한다. 전쟁의 근거는 마치 매직8볼의 신비한 해답들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미군 사상자 수치(오늘 ‘바그다드’나 ‘안바르 지방’에서 두 명, 어제는 일곱 명, 그저께는 세 명)의 현실 체감도는 신용카드 전표나 연방예산(거기에 전쟁비용은 나오지 않는다)의 수치를 보며 느끼는 수준과 같다. 전우나 병사들 가족의 경우는 예외지만 말이다. 사상자의 관을 찍은 사진을 보게 하면 실감이 날까? 아니면 ‘MoveOn.org’(민주당 지원단체)에서 포토숍으로 조작했다고 생각할까? 2차대전에서 향수를 느낄 이유를 찾자면, 그 시절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틀림없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으리라는 점이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일부 거북스러운 진실을 감췄을지는 몰라도 정부 관리라면 그 누구도 2002년 어느 고위 보좌관이 익명으로 그랬듯이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만든다”고 자랑하지 않았으리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사실로 인정했던 시절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여주려고 영화를 만든 번스는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우리는 국민을 하나로 엮는 요인이 무엇인지 알았다. 굳이 선한 일이라는 생각은 아니어도 적어도 필요 때문이었다. 번스가 운이 좋다면 우리의 미국 역사 이해를 도운 그의 기여는 며칠 동안 시청자들을 따라다니리라. 내가 그를 실용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던가? 모래가 푹푹 꺼져도 그는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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