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 해도 지금 제일 죽을 지경”
“뭐라 해도 지금 제일 죽을 지경”
종이를 건조해야 할 보일러는 멈춰 있는데 생산라인은 활발히 돌아가고 있었다. 경기도 군포시에 위치한 대왕제지공업의 공장 내부 모습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대왕제지는 세계 각국에서 모은 우유팩을 원료로 휴지 원지(原紙)를 생산한다. 폐지를 찌고 표백한 뒤 건조하는 과정에서 열이 필요하다. 이 열을 얻기 위해 보일러에 기름을 때는 것이다. 생산비의 15%를 차지하는 기름값은 액수로 따지면 한 달에 1억5000만원이 넘는다. “기름값을 300만원까지 줄였습니다. 모두 이 장치 덕분이지요.” 김승규(53) 사장이 가리킨 손끝 너머로 커다란 원통형 소각로가 보였다. 우유팩을 분리하고 남은 폐비닐을 태우는 소각보일러다. 의아함이 풀렸다. 이곳에서 나오는 열이 기름보일러 대신 종이를 건조하는 것이다. 김 사장은 “소각보일러가 없었다면 비싼 기름값 때문에 공장문을 닫았을지 모른다”며 안도와 불안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처음부터 고유가를 대비해 소각보일러를 설치한 것은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공장 마당에 쌓이는 폐비닐을 줄이려 한 겁니다. 따로 치우는 사람을 고용했는데 자꾸 돈을 더 달라고 하더라고요. 1999년인가…. 답답한 마음에 20억원 들여서 설치했지요. 당시 상황에서 우리 회사 규모로는 무지 큰돈이었는데 지금은 효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99달러와 100달러는 천지 차이 4628㎡(1400평) 공장, 67명 직원. 제지업체로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지난해 이 회사 매출은 106억5400만원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영업이익 7억8100만원을 기록했다. 짠돌이 경영을 한 덕분이다. 중소 제조업체 사장에게 유가 100달러는 어떤 의미일까. “1달러가 큽니다. 세 자리가 됐다는 것은 앞으로 계속 오른다는 걸 의미하니까요. 설마설마 하던 한계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지요.” 1979년 문을 연 대왕제지는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온갖 풍파를 겪었다. 97년 외환위기를 비켜갈 묘수도 없었고, 2002년에는 1년 반 동안 부도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김 사장은 “지금이 제일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부도는 한 번 실패한 것이니 다시 일어서면 되지만 기름값은 앞으로 계속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이 점점 사라지네요.” 고유가로 원자재값도 올랐다. 나무로 펄프를 만들 때도 연료비가 적지 않게 들기 때문이다. 지난해 초부터 원자재값은 두 배 이상 올랐지만 제품 판매가는 그대로다. 물류 비용도 점점 많이 든다. 원자재인 폐지는 미국 서부, 캐나다 등에서 배로 수입하는데 한 달에 40피트(약 12m)들이 컨테이너가 50개 들어온다. 김 사장은 뱃삯을 아끼기 위해 수입량을 줄이고 국내 조달 비중을 높였다. 그나마도 쉽지 않다. 국내에서 나오는 폐지가 대부분 중국으로 수출되고 있어서다. 원자재가 없어 가동을 중단한 공장도 여럿 있다. 김 사장은 “다음날 바로 현찰을 건네야 원자재를 받을 수 있을 정도”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줄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줄였다. 화물차 여섯 대는 꼭 필요할 때만 운행하고 운전기사들에게 연비를 낮추라고 수시로 당부했다. 입버릇처럼 “물건 하나라도 더 싣고 가라”고 말한다는 김 사장의 착잡한 표정이 어려운 사정을 대변했다. ‘마른 수건도 짜야 하는’ 현실에 직원들의 사기도 떨어졌다. “직원들에게 가장 미안합니다. 원가를 줄이려면 기계를 쉬지 않고 돌려야 하거든요. 24시간 365일 근무하니 다 같이 야유회 한 번 가는 게 꿈이 됐어요.” 대왕제지는 30명으로 시작해 100명까지 직원 수가 늘었지만 88년 신도시 건설로 인건비가 오르면서 인원을 감축했다. 이곳의 현장 직원들은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2교대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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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문 닫고 다른 거 해야지” 대왕제지의 희망은 경기도 화성 ‘발안 공장’에서 찾을 수 있다. 김 사장은 30년 동안 자체 브랜드 개발에 목말랐다. 발안 공장은 올해 12월 말부터 대왕제지의 첫 브랜드 ‘홈 코튼’ 휴지를 생산할 예정이다. 점점 오르는 기름값과 원자재값에 불안을 느낀 김 사장이 오히려 위기가 기회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술 개발에 꾸준히 투자해 온 성과다. 저가로 경쟁해서는 대기업 물량을 쫓아갈 수 없다. 그때 김 사장이 떠올린 것이 웰빙시대를 겨냥한 고가전략이었다. “유한킴벌리보다 더 고급 제품을 만들 겁니다. 목화 솜으로 펄프를 뽑아내는 공장과 계약을 맺었어요. 기존 제품보다 20% 정도 값을 올리고 아토피 피부용, 유아 전용 티슈 같은 아이템을 내놓을 계획입니다. 로봇 기계를 들여와 인력 문제도 해결했지요. 28년 동안 다져 온 유통망을 총동원해 홈 코튼을 성공시킬 거예요.” 목화로 휴지를 만드는 기술은 특허 출원 중이고, 홈 코튼 상표 등록도 마쳤다. 중소기업진흥공단, 기업은행의 지원을 받아 땅값 50억원을 뺀 설비에 47억원을 쏟아 부었다. 28년 동안의 노하우와 식지 않는 열정도 함께였다. 그는 “동남아시아, 중국에 밀려 막막하고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다고 생각한 순간 탈출구를 찾았다”며 “발안 공장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난다”고 말했다. 김 사장에게 발안 공장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군대 제대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버지가 꾸리던 작은 제지공장을 이어받은 김 사장은 “그때는 무조건 열심히 하자는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목표가 뚜렷하다”고 강조했다. 목표는 1등 제품을 만드는 것. “‘포기하지 않으면 저런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먹고살기 바쁘지만 제지업 종사자로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 아시겠어요?” 28년 전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 아들에게 공장을 물려줄 것이냐고 묻자 김 사장의 표정이 달라졌다. “생각 없습니다. 내가 겪은 아픔과 시달림까지 고스란히 물려줘야 하니까요. 제 세대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해볼 겁니다.” 김 사장은 오랜 세월 동안 느껴 온 자부심은 그저 가슴에 묻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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