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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색창연한 역사엔 혼이 있다 (해외기업)

고색창연한 역사엔 혼이 있다 (해외기업)

세계 각국에는 고색창연한 기업이 많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처럼 이들 기업은 지금도 강력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다. 100년 넘게 이어 오는 동안 얼마나 위기가 많았겠는가. 때론 주변 환경 때문에, 어떨 땐 회사 내부 문제로 주저앉을 뻔한 일들이 숱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이런 고난들도 100년 기업이 되는 밑거름이 됐을 법하다. 이번에는 세계적인 장수기업들의 가풍(家風)과 경영 철학을 들여다본다. 이들 기업을 통해 우리 기업도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발렌베리(스웨덴) 거대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
150년 동안 5대에 걸쳐 스웨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발렌베리 가문. 그들은 스웨덴 최초의 근대적 상업은행을 세워 이미 1870년대부터 ‘북유럽의 메디치’로 불릴 만큼 큰 부를 일궜다. 이를 기반으로 ‘가난한 동토의 땅’ 스웨덴의 산업화를 이끈 100년 기업들을 키워냈다. 오늘날 발렌베리를 빼놓고 스웨덴 경제를 말할 수 없는 이유다. 한 가문이 이처럼 오랫동안,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둔 경우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 발렌베리는 스웨덴 국민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스톡홀름 시청 골든홀에는 가문의 2세대인 크누트 발렌베리의 흉상이 서 있다. 시청 신축 자금을 기부한 그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스웨덴의 수많은 경영자를 길러낸 스톡홀름경제대학은 ‘발렌베리대학’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북유럽 최초의 경제대학인 이 대학의 설립을 발렌베리 가문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다. 발렌베리재단은 스웨덴 기초 과학기술 연구의 최대 후원자다. 스웨덴 출신 노벨상 수상자 대다수가 발렌베리의 지원을 받아 연구활동을 시작했다.


발렌베리는… 1856년 창업. 에릭슨, ABB(발전설비), 일렉트로룩스(가전) 등 세계 1등기업을 5개나 가지고 있다. 스웨덴 GDP의 30%, 스웨덴 증권거래소 시가총액의 40% 차지.
발렌베리는 에릭슨, 사브, ABB, 일렉트로룩스, 스카니아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13개 기업을 소유하고 있다. 스웨덴 주식시장 전체 시가총액의 절반 이상을 발렌베리 기업들이 차지한 적도 있다. 이 정도면 발렌베리 가문이 스웨덴 갑부 명단을 독차지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150년 동안 기업 경영으로 일군 부는 대부분 공익 재단에 넘겨져 있어 가문 소유의 개인 재산은 약소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 대신 발렌베리 후계자들은 세대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남겼다. 거대한 ‘발렌베리 왕국’의 실질적인 주인은 바로 이들 재단이다. 발렌베리는 어린 자녀들에게 특권보다는 의무를 가르쳤다. 검소한 가풍 때문에 플레이보이는 용납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형이나 언니 옷을 물려받아 입었고, 여름에는 정원 잡초를 뽑고 갈퀴질을 해야 했다. 매주 최소한의 용돈만 주어졌고, 그중 일부도 저축해야 했다. 크누트의 동생 마쿠스 시니어 발렌베리의 검소함은 전설적이다. 그의 딸 안드레아는 아버지의 정장이 해지면 안과 밖을 뒤집어 재단사가 다시 꿰맬 수 있도록 뜯어내는 일을 했다. 신문 가십난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Esse non videri)’는 가문의 원칙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발렌베리 창업주.

발렌베리의 전통은 개인주의와 사회적 책임, 스웨덴 애국주의와 국제화의 절묘한 결합을 보여준다. 그들의 기업은 인구 900만 명의 좁은 내수시장에서 벗어나 세계로 뻗어나갔지만 스웨덴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소득세가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이 때문에 많은 부자가 무거운 세금을 피해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 기업들도 본사를 해외로 옮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발렌베리 가문과 그 기업들은 스웨덴을 지키며 그들이 창출한 부를 재단을 통해 스웨덴 사회에 돌려주고 있다. 1856년 가문을 처음 일으켜 세운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는 퇴역 해군 출신이다. 15세 때 갑판 선원이 돼 혼자 배를 타고 미국 여행에 나설 만큼 바다에 대한 그의 애착은 유별났다. 그는 “선원으로서 얻은 경험은 집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한곳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은 마음이 좁아지기 쉽다”는 말을 남겼다. 그 후 앙드레는 해군에서 복무하다 은행을 세워 큰돈을 벌었다. 생전에 ‘스웨덴 제2의 군주’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아들들도 모두 해군사관학교에 보냈다. 거친 항해 경험이 강인한 정신과 넓은 시야를 길러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후 해군사관학교는 발렌베리 후계자들의 필수코스가 됐다. 앙드레가 세심하게 완성해 놓은 ‘발렌베리 프로그램’에는 해외 은행에서의 도제식 교육도 포함돼 있다. 발렌베리의 미래 주역들은 해군사관학교를 마친 뒤에는 수년간 세계 금융 중심지를 돌며 경력을 쌓았다. 이는 발렌베리가 은행을 모태로 성장한 탓도 있지만 산업의 큰 흐름을 읽고 기업 가치를 정확하게 보는 능력을 기르는 데 그 경험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교육 프로그램은 1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발렌베리의 가계도는 처음 보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 ‘마쿠스’와 ‘야콥’이라는 똑같은 이름이 반복해 나오기 때문이다. 발렌베리 정신을 후대에 물려주는 그들만의 방식이다. 어린 세대는 선조들과 같은 이름을 씀으로써 일찍부터 자신이 가문의 전통과 연결돼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멍에지만, 잘 지키고 더 발전시켜 후대에 물려줘야 하는 ‘선물’이기도 했다. 발렌베리는 집에서 손님을 맞을 때는 항상 아이들을 문 옆에 앉게 해 대화를 듣게 했다. 손님이 돌아간 후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앉아 자신이 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으며, 상대방이 그런 식의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휴일 아침이면 아버지는 아들과 정기적으로 산책에 나섰다. 아버지는 길을 걸으며 선조들의 위대한 업적을 들려줬다. 그러나 전통이 항상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유럽 속담에 “창업자는 기업을 설립하고, 2세대는 기업을 물려받고, 3세대는 기업을 파괴한다”는 말이 있다. 기업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다. 발렌베리가 이런 속담의 예외가 될 수 있었던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발렌베리는 가족들의 경영 참여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미래의 경영자로 선택된 소수는 발렌베리 프로그램에 따라 오랜 기간 철저한 교육을 받았지만, 나머지는 기업 경영과 거리를 두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혼자가 아니라 두 명이 가문을 이끌도록 했다. 거대한 기업을 독단적으로 경영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황태자의 지위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능력을 증명해야만 하는 조건부였다. 3세대를 이끈 마쿠스는 아들 피터를 끊임없이 궁지로 몰아넣으며 능력을 시험했다. 발렌베리는 이건희 삼성 회장 가문의 벤치마킹 모델로 주목 받기도 했다.


장준영 자유기고가·hercastl@hotmail.com



타타그룹(인도) 자연처럼 인도와 하나가 되다 기업이 한 나라의 지리와 풍경처럼 여겨지는 건 놀라운 일이다. 히말라야산맥과 갠지스강처럼 인도의 일부가 된 타타그룹이 그렇다. 인도 거리를 달리는 소형자동차와 버스, 트럭과 트랙터 등 모든 ‘탈 것’은 타타의 이름을 달고 있다.


타타그룹은… 1877년 창업, 섬유·농기구·시멘트·철강·전력·화학·기관차·트럭·항공·나노 등 25개 분야, 82개의 기업을 거느린 인도 최대 그룹. 현재 26만 명을 고용하며 90억 달러의 연매출을 올린다.
우리나라 영토의 17배인 넓은 땅을 질주하는 철도와 군사대국 인도의 위용을 뒷받침하는 모든 군 장비도 타타의 제품이다. 타타는 철강과 자동차뿐 아니라 호텔과 정보기술(IT), 시멘트와 홍차 등 90개 기업과 20여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인도 최대 그룹이다. 타타가 인도의 일부로 인정받는 건 많은 기업과 직원을 거느린 재벌그룹이라는 외연 때문이 아니다. 식민지에서 독립해 경제성장을 이룬 굴곡 많은 인도 현대사를 동반한 타타는 부의 창조와 사업 확대에 그치지 않고 이를 국가와 사회에 환원하는 경영이념과 기업문화를 창조해 국민기업이 됐다. 곧 노동자와 지역사회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좋은 평판을 받는 것이다.

▶JRD 타타 타타그룹 2대 회장.

이러한 경영이념은 애국심에서 시작된 타타의 탄생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타타의 창업자 잠세트지 타타는 영국 제국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한 20세기 초 방직공장에서 모은 돈으로 제철산업에 뛰어들었다. 식민지의 불리한 조건에서 위험부담이 높고 큰 비용이 드는 타타스틸을 시작한 건 철강이 장차 중공업의 기반이 될 것이라는 애국적 판단 없인 불가능했다. 잠세트지의 애향심은 1903년 고향 뭄바이에 문을 연 호텔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영국 식민지에서 피지배자 인도인이 묵을 수 있는 호텔은 없었다.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호텔에서 숙박을 거부당한 잠세트지는 인도인도 들어갈 수 있는 멋진 호텔을 직접 세웠다. 아라비아해(海)가 바라다보이는 해안가에 자리한 전망 좋은 타지마할 호텔은 오늘날 인도에서 가장 비싸고 훌륭한 호텔로 자리를 매겼다. 이러한 정신을 가진 잠세트지와 그를 이은 타타의 경영자들은 기존 영역에 안주하지 않고 축적한 부를 새로운 영역에 투자해 최고로 키웠다. 방적공업에서 제철과 수력발전에 진출한 타타는 화학과 항공 등 국가 기간산업으로 확장했다. 인도가 독립하기 전 타타의 기업들은 대부분 개발도상국 정부가 맡아야 할 기간산업이었다. 1957년 타타스틸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네루 총리가 잠세트지 타타를 ‘1인 경제기획원’이라고 부른 건 그런 의미에서였다.

▶라탄 타타 현 타타그룹 회장.

1931년 발표된 인도 대기업 명단에서 1위를 차지한 타타스틸의 진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드러났다. 유럽 전쟁터에서 움직인 모든 장갑차와 탱크에 부착된 강판과 리벳이 타타스틸의 제품이었던 것이다. 1939년 서해안 미타푸르에 세워진 타타화학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일관된 생산 공정을 갖춘 무기화학단지로 산하에 시멘트, 비료, 비누 등을 생산하는 다양한 기업을 두고 중화학공업의 기반이 됐다. 1932년 10월 인도 최초의 민간항공산업으로 이륙한 타타항공은 1946년에 터번을 쓴 왕의 모습이 상징인 ‘에어 인디아’로 발전했다. 1953년 타타항공을 만든 JRD 타타는 국유화한 국제 항공사의 책임을 맡아 항공산업의 발전에 기여했다. 1945년 타타스틸의 자회사로 문을 연 텔코는 증기기관차와 관련 제품을 생산했다. 한때 연간 100대의 기관차를 생산한 텔코는 철도산업이 사양화하자 1954년 독일 벤츠와 합작해 자동차를 생산했다. 1990년 자동차 생산 100만 대를 기록한 텔코는 2000년 경승용차의 63%, 중대형승용차 66%의 내수시장을 점유하며 인도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로 부상했다. 현재 세계 5위의 중대형트럭 메이커이자 세계 2위의 대형버스 제조사인 텔코의 후신 타타모터스는 최근 2500달러의 초저가차 나노를 출시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기간사업의 성공이 타타가 이룬 모든 건 아니었다. 타타스틸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노동자의 복지에 신경을 쓴 기업이다. 1912년 선구적으로 ‘1일 8시간 노동제’를 도입한 타타스틸은 1920년 유급휴가제와 후생연금제도, 산재보장제와 노동자를 위한 연수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이익배분형 보너스’를 지급하고 1940년대에 노무관리부서를 설치한 타타스틸은 1953년 노사가 참여하는 합동자문회의를 도입했다. 타타그룹의 모든 기업은 1970년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포함했다. 회사정관에는 소비자, 종업원, 주주는 물론 지역사회에 대한 회사의 사회적 의무에 관한 조항이 신설됐다. 타타는 신탁재단을 설립해 부의 사회 환원을 실천해 주목 받았다. 1932년 설립된 도랍지재단은 선구적 인재양성기관인 인도 이과대학과 타타 사회과학대학을 세웠고, 42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암 연구센터를, 45년에는 핵개발 프로그램의 요람인 타타 기초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인도의 미래를 만들었다. 그 밖에도 타타는 라탄 타타, 메헤르바이 타타, JRD 타타, 잠세트지 타타 등 타타 일가의 이름을 딴 여러 신탁재단을 설립해 인재 양성과 사회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타타 일가는 자손이 귀했다. 다른 곳의 족벌경영과 달리 ‘타타’라는 이름의 상징성 때문에 타타 일가의 능력 있는 인물이 경영을 맡았으나 타타 일가가 보유한 주식이나 결정권은 예나 지금이나 많지 않다. 인도가 경제자유화를 시작한 1991년 타타 기업들의 주식을 가진 모기업(Tata Sons)의 주식은 공적자선재단이 78.7%였고 타타 일가의 지분은 3.75%에 불과했다. 1993년 그룹을 이끌었던 JRD 타타가 사망하자 타타의 고향 마하라슈트라 주 정부는 3일간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식민통치와 민족해방의 희망과 절망이 점철된 20세기 인도와 운명을 함께한 타타는 이제 더 큰 야망을 가진 인도의 21세기를 공유하려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옥순 연세대 연구교수(인도근대사)·indo21@naver.com



골드먼삭스(미국) 중세 기사처럼 자신을 던져라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먼삭스의 시작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1869년 독일 출신 유대인 마르쿠스 골드먼과 사위 샘 삭스가 뉴욕 맨해튼의 한 낡은 건물 지하에 차린, 차용증을 거래하는 조그만 가게가 효시다. 두 가문의 파트너십은 13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1999년 기업을 공개하기 전까지 두 가문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어떻게 분배했는지는 몰라도 지분 문제로 싸웠다는 얘기는 없다. 골드먼삭스는 긴 역사만큼이나 적잖은 위기에 부닥쳤다. 1929년 대공황으로 주가가 폭락해 치명타를 입기도 했다. 그 결과 증권업무를 청산하면서 주간사의 명성을 잃게 됐고, 한번 시장에서 밀려나자 자산운용업에 20년이나 진출하지 못했다. 재기에 성공한 후, 1980년대 들면서 월가 최고의 투자은행으로 자리를 굳혔다.


골드먼삭스는… 1869년 창업, 국제 금융시장을 주도하는 대표적 투자은행 겸 증권사.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24개국에 지사를 두고 기업 M&A와 채권발행 등의 사업을 하고 있다.
골드먼삭스는 위기를 역전의 기회로 삼아 돌파했다. 그 비결은 창업 이후 뿌리를 내린 문화적 전통이다. 골드먼삭스는 기업공개 때까지 철저히 보수적 가족주의를 고수했다. 가족 중심의 결속력은 파트너십으로 발전했고, 이후 골드먼삭스가 상장 주간업무와 기업 인수합병(M&A)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토대가 됐다. 가족적 끈끈함은 ‘파트너’라는 제도를 만들어냈다. 전 세계 2만6000여 직원 중 300여 명뿐인 파트너는 이른바 로열패밀리다. 이들은 기업공개 전까지 장장 120년 동안 지금의 이사회처럼 회사의 주요 결정을 했다. 파트너 제도는 골드먼삭스의 세 가지 성장동력인 리더십·문화·인재를 강화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파트너들은 로열패밀리답게 헌신적이다. 마치 중세의 기사처럼 회사 일이라면 자신을 아끼지 않고 뛰쳐나간다.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은 직원들마저 헌신적으로 만드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로열패밀리는 충성도가 높은 경영진을 창출해냈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시드니 와인버그다. 사환부터 시작해 30년간 헌신적으로 일하며 최고경영자에 올라 대공황 당시 침몰하던 회사를 맡아 오늘의 영광을 만들어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골드먼삭스의 아버지로 불린다. ‘파트너’의 전통은 한 명이 아닌 두 명의 최고경영자가 공동으로 회사를 책임지는 체제를 굳히는 데도 기여했다. 1976년엔 존 와인버그와 존 화이트헤드가 공동대표로 선임돼 8년간 회사를 이끌었다. 미국 재무장관을 지낸 헨리 폴슨은 존 코자인 뉴저지 주지사와 공동으로 상호보완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런 공동의 리더십은 투자은행 지도부가 빠지기 쉬운 독선과 아집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다. 골드먼삭스의 위대한 가풍인 ‘헌신’은 인재관리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나보다는 회사를, 회사보다는 고객을 먼저 생각하는 겸손을 잃지 않도록 교육한다. 사내 어디에도 개인주의는 발 붙일 곳이 없다. 심지어 여성 지원자에게 “직장을 위해 낙태할 준비가 돼 있느냐”는 반인륜적 질문도 이곳에선 놀랄 만한 게 못 된다. 만약 어느 신입사원이 ‘내가 이런 거래를 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가는 바로 ‘아웃’이다. 모든 업무는 동료와 함께 거둔 성과란 얘기다. 팀워크는 생명이다.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비칠 수도 있는 기업문화가 있는 것도 그래서다. 자기 일이 끝나도 상사가 퇴근하지 않으면 자리를 지켜야 한다. 1초에도 수백만 달러가 오가는 트레이딩 룸에는 아직도 고참의 혹독한 군기잡기가 있다. 사무실에는 말단사원에서 고위 임원까지 모든 책상이 똑같다. 저마다 최고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들이지만 조직은 개인의 능력에는 아랑곳 않는다. 팀워크를 중시할 뿐이다. 획일적이란 비난에도 개의치 않는다. 팀이 싫으면 나가면 그만이다. 골드먼삭스는 명문 경영대학원(MBA) 출신들에게는 가장 입사하고 싶은 회사다. 높은 경쟁률도 장벽이지만, 한번 입사원서를 내면 줄잡아 30명이 넘는 임원과 면접해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 상당수가 지원자와 함께 일할 선배들이다. 단 한 명의 면접관으로부터 부정적인 의견이 나와도 입사는 힘들어진다. 그만큼 인간관계를 중시한다. 입사 후 연수도 만만치 않다. 주어진 과제를 풀기 위해 팀을 짜 밤낮없이 해답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정작 과제 제출 30분 전, 주제가 바뀐다. “고객의 요구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훈련이다. 가히 ‘월가의 사관학교’라 불릴 만하다.

HSBC(영국) 동양적 의리로 세계 지배하다
나를 위한 세계적인 은행(The world’s local bank)’. 세계 83개국에 영업망을 갖고 있는 세계 최대 금융그룹 HSBC의 슬로건이다. 국내 금융사들이 너도나도 ‘글로벌’을 외치는 것과 반대로 왜 HSBC는 글로벌 은행임에도 스스로를 로컬은행이라 부르고 있을까. 『HSBC 금융제국』의 저자 류스핑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HSBC가 아시아에서 유독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은 그 뿌리가 아시아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HSBC가 동양적 사고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현지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외국계 은행은 합리적 태도를 중시하지만 HSBC는 동양의 의리와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한다. 1990년대 아시아 금융시장이 위기를 겪자 많은 외국계 은행이 영업을 포기하고 떠났지만 HSBC만은 의리를 내세우며 자리를 지켰다.”


HSBC는… 런던에 본사를 둔 HSBC은행은 유럽, 아시아·태평양 지역, 미주, 중동, 아프리카 등 82개국에서 1만여 개의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HSBC홀딩스의 주식은 100여 개국 20만 주주가 소유하고 있는데 뉴욕 증시에서는 미국 공탁 증서로 거래되고 있다.
중국에서 말하는 ‘관시(관계)’의 중요성은 비단 중국, 그리고 아시아에서만 통하는 얘기는 아니다. 인간관계나 인맥은 물론 비즈니스와 관련된 것 사이의 중요성까지 함축하는 이 표현은 HSBC의 글로벌 전략이다. 1865년 HSBC는 건물은커녕 사무실도 없는 초라한 모양새로 출발했다. 은행 창업자인 토머스 서덜랜드가 우연히 금융가 인터뷰가 실린 책을 읽고는 중국에 은행을 세워야겠다는 결심이 결실을 이룬 곳은 홍콩. HSBC는 중국과 무역을 하는 회사들의 베이스캠프에서 터를 닦는다. 이들 중 HSBC 초기 주주로 참여한 13개 회사를 살펴보면 영국계가 7개사, 미국계 1개사, 독일계 2개사, 인도계 2개사, 덴마크계 1개사 등으로 다채롭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중국과 거래를 트고 있었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HSBC에 처음부터 중국식 경영 원칙인 관시가 배어있는 이유다. 관시의 힘은 HSBC가 유독 개인금융 서비스에 강한 것과도 관련 있다. HSBC는 다수의 M&A를 통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한편, 세계 금융을 주도하고 있다. 개인 금융 영업이 뛰어난 금융기관들을 인수해 왔는데 1997년 브라질 바머린더스은행, 1999년 미국의 리퍼블릭 뉴욕 코퍼레이션, 사프라 홀딩스, 2000년 프랑스 신용산업은행 등을 인수한 것이 그 예다. 인수협의가 마무리되면 ‘국제사무관’이 파견되는데, 이들은 흔히 M&A 주도자가 그렇듯 점령군처럼 굴지 않는다. 그들은 전면적인 은행 업무의 지식이나 시스템의 운용에 정통하지만 겸손하다. 그 나라의 문화나 풍속도 기꺼이 수용한다.

코닥(미국) 보험 심부름꾼의 즐거운 발견
1854년 뉴욕에서 태어난 조지 이스트먼은 어린 나이에 홀어머니와 중증 장애를 지닌 여동생을 부양해야 했다. 열네 살에 주급 3달러를 받으며 보험사 심부름꾼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20대에 사진에 심취한 그는 복잡한 촬영을 단순화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실험을 계속한 끝에 방법을 발견해 냈다. 1880년 판매용 건판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코닥이 탄생했다. 코닥이 120년의 역사를 이어온 것은 직원, 고객 그리고 지역사회를 배려하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가풍이기도 했다. 이스트먼의 최대 관심사는 사진촬영을 쉽고 즐겁게 만드는 것이었다. 1888년 처음 카메라를 세상에 내놓으며 내건 슬로건도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진 우리가 해결해 드립니다”였다. 카메라를 복잡한 기기가 아닌 연필처럼 언제 어디서든 간편하게 사용하도록 한 이스트먼의 철학은 지금까지 이어져 코닥은 항상 가까운 곳에서 편리함과 즐거움을 주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코닥은… 1880년 창업. 세계 이미지 시장의 선두주자로서 영상 및 그래픽 커뮤니케이션 사업부문에서 최첨단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60여 개국에 진출해 있으며, 연매출은 133억 달러 규모다.
2001년부터 버튼 하나로 사진을 e-메일로 전송하고 출력할 수 있는 ‘이지셰어 시스템’도 그런 창업 철학에서 탄생한 것이다. “다양성과 포용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 원칙이다.” 안토니오 페레스 코닥 회장의 얘기다. 코닥은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데 다양한 구성원들에게서 비롯된 통찰력을 십분 활용한다. 구성원의 다양성이 혁신과 팀워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다양한 고객과 직원의 다양한 통찰력에서 얻는 다양성은 코닥이 변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돼 왔다. 이스트먼은 젊은 시절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기부를 했다. 그는 이가 아픈 아이들이 치료를 받는다면 인생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치과 진료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음악학교, 극장, 오케스트라도 설립하고 지원했다. 흑인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로체스터에 있는 대학에 3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코닥은 지금도 학교·지역단체를 후원하며 지역사회로부터 친근하고 신뢰받는 기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친환경 제품 개발과 재활용 정책도 활발하게 추진 중이다.  

도시바(일본) 전철로 출근하는 사장의 집념
1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위기가 없을 리 없다. 일본 도시바도 몇 번의 위기를 지혜롭게 넘겼다. 그 지혜는 다름 아닌 CEO 그리고 직원 모두의 집념이었다. “일이 되고 안 되고는 능력이 아니라 집념에 달렸다.” ‘재계의 신’으로 불렸던 도코 도시오 전 도시바 회장의 말이다. 도시바의 창업자는 1875년 회사 설립 후 백열전구 등을 만들어 초석을 쌓은 발명가 다나카 히사시게였지만 위기에서 도시바를 구한 것은 도코 도시오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은 그를 ‘중흥의 할아버지’로 부른다.


도시바는… 1875년 창업. 전 세계에 300개 현지법인 및 사무소를 두고 있다. TI100 노트북 컴퓨터를 선보인 이후 전 세계에서 약 5000만 대 이상의 노트북 컴퓨터를 판매하고, 휴대용 컴퓨팅 솔루션을 공급하고 있다.
“회사가 망하면 사원도 없다. 회사가 망하기 전에 사원들은 지금보다 머리를 세 배 더 사용하라. 돈을 많이 받는 중역들은 지금보다 열 배 더 일하라. 나는 그 이상으로 일하겠다.” 생전의 도코 전 도시바 회장은 이렇게 말하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는 대기업 사장이었지만 매일 아침 전철 손잡이에 매달려 출근했다. 당시 그의 연봉은 5000만 엔이 넘었으나 세금을 뺀 소득의 대부분인 3500만 엔을 자신의 어머니가 설립한 여학교에 기부했으며 자신의 생활비로는 한 달에 단돈 8만 엔만을 쓸 정도로 검소했다. 누가 이런 사장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이 도시바가 1964년 도쿄올림픽이 끝난 후 몰아친 경기 침체를 극복한 비결이다. 융자를 거절하는 은행이 있다면 도코 회장은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이른 새벽 행원들의 숫자만큼 도시락을 들고 가서는 영업부 차장 앞에 주저앉아 사정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은행이었다. 그가 떠난 오늘날의 도시바는 어떤가. 삼성에 이어 플래시 메모리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바는 3년간 10조원을 쏟아 부으며 1위 탈환에 집념을 불태우고 있다.  

밀레(독일) 108년간 다툼 없는 동업 정신

▶밀레의 공동 앛업자 칼 밀레(왼쪽)와 라인하트 진칸.

독일어를 몰라도 밀레 본사를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단 택시에 타서 “밀레”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된다. 독일 북부의 한적한 도시 귀테슬로에 있는 밀레는 성공한 기업일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가장 사랑 받는 기업이다. 독일인은 밀레를 ‘가전업계의 벤츠’라고 부른다. 밀레가 자국에서 사랑 받는 이유는 경영진 간, 경영진-직원 간, 그리고 고객과의 관계를 100년 넘게 끈끈히 관리해 왔기 때문이다. 밀레는 4대째 동업경영을 하고 있다. 본사 건물 1층 로비에 있는 두 남자의 흉상이 바로 1899년 창업한 칼 밀레와 라인하트 진칸이다. 밀레가 크림 분리기에서 착안해 세탁기를 만들고, 진칸은 재정을 맡았다.


밀레는… 1899년 창업. 최고급 가전, 상업용 기기·주방가구 전문 브랜드. 전 세계 1만5000여 명을 고용하며 연매출 23억 유로(3조 5000억원)를 올리고 있다. 최고급 가전 메이커 임페리얼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지금은 4세대인 마르쿠스 밀레와 라인하트 진칸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밀레 가문이 51%, 진칸 가문이 49%의 지분을 소유하는 비공개 기업이다. 밀레는 108년간 한 번도 경영권 다툼이 없었다. 한 집안의 독주를 막기 위해 한 세대가 지날 때마다 기술과 경영 부문을 번갈아 맡아 역할 분담을 철저히 한다. 후계자는 두 가문에서 후보를 추천한 뒤 이사회가 선발한다. 후보는 다른 회사에서 일해 독자 업무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같은 세대의 방계 가족도 맡을 수 있다. 가족경영체제라고 비난 받는 일은 없다. 밀레 본사 지하 1층 오래된 사무실에 그 비밀이 있다. 그곳은 현 밀레 사장의 할아버지인 카를 밀레가 사용했다. 사무실에는 100년의 역사가 담긴 갖가지 집기들이 놓여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창립자 사진 옆에 걸린 낯선 인물 사진. 그는 회사를 처음 설립했을 때 최초로 고용된 사람이며 밀레에서는 존경의 대상이다. 밀레 사장은 “종업원이야말로 우리 회사와 제품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고임금에도 독일 생산을 고집하고 있는 밀레에 직원은 비용이 아니라 식구다. 직원을 제 식구처럼 아꼈던 할아버지의 마음을 그 손자도 이어오고 있다.  

JP모건(미국) 어떤 법보다 신용이 우선한다
JP모건과 모건스탠리만큼이나 ‘모건’이라는 가문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다. 뉴욕의 JP모건과 모건스탠리 런던의 모건 그렌펠, 마리의 모건 에 콤파니 등 모건 집안은 1989년까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금융을 관장했다. 세월이 지나 지금은 일인자는 사라지고 여러 경쟁자가 각축을 벌이고 있지만 여전히 모건의 이름은 남아 있다. 모건의 이름이 100년이 지나도록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1993년 페코라 청문회에서 잭 모건이 한 기조연설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JP모건은… 1838년 창업. 뉴욕 월가에 본사를 두고 있는 세계 각국 정부와 기업에 가장 영향력 있는 금융사다. 시장조성이 가장 큰 사업인데, 세계 12여 곳에서 시장을 조성해 유가증권, 외국환 등 다양한 파생상품을 관리한다.
“프라이빗 뱅커는 중세 이후 존재한 전문직 가운데 하나다. 장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은행가의 윤리가 자리 잡았다. 그 윤리는 공동체 내에서 은행가 자신의 명성과 역량, 유용성에 의지한다. 은행가가 금융업을 하는 과정에서 법적으로 명문화된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법보다 큰 힘을 지닌 그 윤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신용을 잃게 된다. 신용은 은행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신용은 오랜 세월 동안 정직하게 거래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어떤 법적인 강제도 없지만 무너질 때는 한순간이다. 한 번 잃은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나는 시니어 파트너로서의 명예를 걸고 우리는 언제나 오직 일류 비즈니스만을 생각했고, 항상 일류 은행으로 존재해 왔음을 밝히고 싶다.” 초기 JP모건의 수장이었던 주니어스 모건, 피어폰트 모건, 그리고 잭 모건에 이르기까지 모건 가문은 신뢰를 가장 중시해 왔다. 물론 고객에게 신뢰를 주어야 거래가 성사되는 것은 금융권에서 당연한 일이다. 모건이 말하는 신뢰란 가족 간에도 이어진다. 아버지는 아들을 믿고 아들은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다. 주니어스 모건과 피어폰트 모건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다. 주니어스는 아들에게 원칙과 규율을 제시하고 이를 어길 경우 심하게 꾸짖는 아버지였다. 그러나 주니어스는 속으로는 아들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는 아들에게 게인스버러의 초상화 ‘데번셔 공작부인’을 사 선물하려고 했는데 그만 그림을 도둑맞았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뒤 세상에 그 그림이 다시 등장했을 때 그 그림을 산 것은 아들인 피어폰트였다.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자신이 이룬 것이다.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뜻에 따르는 것은 모건가의 가풍이다. 그 그림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런던 프린시스 게이트 저택의 선반 위에 걸렸다.

미셸린(프랑스) 누가 대물림 경영을 욕하는가

▶미셸린 타이어를 단 초기 자동차.

미셸린은 1889년 가업을 물려받은 앙드레 미셸린과 에두아르 미셸린 형제가 타이어 회사의 기틀을 다졌다. 119년의 역사다. 현재 전 세계 자동차 5대 중 한 대가 미셸린 타이어를 장착한다. 프랑스인들은 창업주 에두아르 미셸린을 두고 “프랑스의 자존심, 아버지 같은 기업 미셸린을 일으킨 분”이라며 존경심을 표한다. 미셸린은 1889년 설립 이후 4대째 미셸린 가문이 경영을 맡고 있다. 오너가의 경영 대(代)물림과 경영진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는 중앙집권식 경영이 그것이다. 2006년 창업 4세인 에두아르 미셸린 회장이 돌연 타계했을 때 클레몽 페랑시(市)에는 일제히 조기가 걸렸고 프랑스 전역이 비탄에 잠겼다.


미셸린은… 1831년 창업. 1946년 세계 최초로 래디알 타이어를 개발하면서 시장을 선도했다. 13만 명의 직원이 일하며, 전 세계 19개국 70여개의 공장을 가동해 연평균 2억개의 타이어를 생산하고 있다.
당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프랑스 경제가 애도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에두아르 미셸린 회장을 이어 이종 6촌 미셸 롤리어가 회장에 올랐다. 오너 가족의 경영 승계에 대한 비난은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보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 달라는 요구가 있을 뿐이다. 미셸린의 최고경영진은 오너와 2, 3명의 경영 파트너로 이뤄지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경영 분란은 없다. 경영 파트너는 위기 때 회사 부채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는 제너럴 파트너이기도 하다. 퇴직 정년은 72세. 경영 파트너의 의지와 목표에 따라 강력한 리더십으로 경영하는 합자회사 방식의 시스템을 미셸린은 창립 이후 줄곧 유지하고 있다. 경영 파트너는 막강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 받는 대신 다른 임원들처럼 이사 보수나 스톡옵션, 퇴직금 등 부가 혜택을 일절 받지 않는다. 회사가 흑자를 낼 때만 이익을 일부 나눠갖는 까닭에 헌신할 수밖에 없다. 경영 파트너는 특별 주총의 주주 승인 없이 제너럴 파트너의 지위에서 물러날 수 없다. 막강한 권한과 책임을 갖는 경영진이 감독이사회의 감시와 견제도 받도록 하고 있다. 감독이사 7명 중 6명은 경영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외이사다. 5년 임기의 감독이사들은 주주총회에서 선임된다. 미셸린은 전 사원의 69%가 회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지배구조 덕분에 미셸린은 장기 성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적대적 M&A에 쉽게 휘말리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주주 정책도 독특하다. 4년 이상 장기 투자자들에게 두 배의 의결권을 부여하고 있다.  

브리지스톤(일본) 전쟁도 뛰어넘는 기업가 정신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인도네시아 자바 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미국계 타이어 기업인 굿이어의 자바 공장도 접수했다. 일본 군부는 이 공장의 경영을 당시 일본 토종 타이어 업체인 브리지스톤에 맡겼다. 브리지스톤의 창업자인 이시바시 쇼지로는 직원을 파견하면서 “이 전쟁은 승리를 예측하기 어렵다. 만약 전쟁에서 일본이 진다면 군부가 분노해 어떤 명령을 내릴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공장을 원래 주인에게 온전한 상태로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3년 후 일본이 패전했을 때, 관리직원은 굿이어가 경영할 때보다도 잘 정비된 상태로 공장을 넘겨줬다. 이것은 굿이어의 CEO 리치필드를 감동시켰고 굿이어가 브리지스톤에 선진 타이어 기술을 전수해 주는 계기가 됐다. 후발주자로 굴지의 미국·유럽 타이어 기업을 제치고 세계 최대 타이어 기업이 된 브리지스톤의 성장사에는 이처럼 전선도 뛰어넘는 기업가 정신이 있었다. 1931년 자본금 100만 엔, 직원 144명으로 시작한 브리지스톤은 매출 3조 엔을 올리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도요타가 일본 자동차의 신화라면, 브리지스톤은 일본 타이어의 전설이다.


브리지스톤은… 1907년 창업. 연매출 200억 달러를 올리는 세계 1위의 타이어 기업. 전 세계 12만6000명 넘는 직원이 근무하며 150여 개국에 타이어를 공급하고 있다. F1 공식 타이어 업체로 2010년까지 3년간 단독으로 타이어를 공급한다.
102년 전인 1906년, 브리지스톤의 창업자 쇼지로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조그만 바느질 가게를 물려받았다. 당시 고작 열일곱이던 그는 ‘일생을 바쳐 사업을 할 거라면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 세상에 도움이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쇼지로는 사업 초기에 매출의 10%를 이윤으로 남긴다는 원칙을 정했다. 이를 기준으로 비용을 줄여 가격을 낮췄다. 1914년 그는 또 하나의 파격으로 버선 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모든 버선을 치수에 관계없이 균일가로 판매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당시 버선 값은 문수에 따라 달랐다. 업계를 더 경악하게 한 것은 20전이란 싼 가격이었다. 그는 생산성을 높이고 원가를 최소한으로 낮춰 싼 균일가를 실현할 수 있었다. 조그만 바느질 가게를 세계적인 신발기업으로 키운 쇼지로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타이어를 국산화하겠다는 꿈을 꿨다. 당시 타이어는 영국이나 미국의 기술과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는 생산이 불가능했다. 창립 초기엔 기술적 한계로 불량품이 늘어 반품도 증가했다. 반품된 타이어는 산처럼 쌓였다. 쇼지로는 제품에 하자가 있으면 두말없이 새 것으로 무상 교환해 주는 ‘품질책임보증제’를 도입했다. 후발업체인 브리지스톤이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하려면 신용은 필수였다. 처음엔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고의로 파손해 교환해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품질보증책임제를 철회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직후 불어닥친 고무 파동으로 브리지스톤은 부도 위기까지 몰렸다. 경리부장이 은행의 태도가 돌변한 것에 대해 야속해 하자 쇼지로는 “쉽게 돈을 대주는 은행과 거래하면 회사가 나약해진다”며 타일렀다. 쇼지로는 1968년 ‘최고의 품질로 사회에 공헌한다’는 사시를 공표했다. 그의 아들 간이치로가 경영권을 이어받은 후 브리지스톤은 기술력과 품질로 세계 최대 타이어 회사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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