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엘도라도?
아시아의 엘도라도?
7107개의 섬으로 이뤄진 필리핀은 동남아의 흥미로운 나라이긴 하지만 그다지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스페인에 이어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도 아시아의 이웃나라보다는 라틴 아메리카와 공통점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이전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문서 기록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데다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나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같은 사원도 없다. 그래서 필리핀이 서양에 정복되기 이전에 이곳에 어떤 문명이 존재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마닐라에 있는 필리핀 국립박물관과 중앙은행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이 원주민 생활의 단상을 보여주긴 하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로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너무나 많다. 필리핀이 독립 공화국이 된 지 한 세기가 지났지만 필리핀인들의 정체성에 관한 논란은 계속된다. 필리핀의 경제중심지 마카티 시티에 있는 사립 아얄라 박물관에서 상설 전시회가 막을 올렸지만 이런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킬 뿐이다. ‘조상의 황금(Gold of Ancestors)’이란 제목의 이번 전시회에는 연대가 10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는 귀중한 유물 1059점이 전시됐다. 대다수가 개인 수집가 소유로 대중에 공개된 적이 없던 유물들이다. 금판을 오려 만든 왕관과 장례용 가면, 장신구, 종교의식에 쓰이는 용기 등이 포함됐다. 유물의 품질이나 종류로 보면 고대 필리핀 사람들은 동남아의 이웃 국가들과 훨씬 더 가까운 관계였던 듯하다. 전시작 중엔 힌두 신화에 나오는 신 킴나리(절반은 새, 절반은 여인) 형태를 한 황금 용기도 있다. 또 한 장식판엔 생명의 나무를 본뜬 정교한 머리장식을 쓴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인의 두 손은 경배하듯 위로 추켜올려져 있다. 전시회의 대표작은 복잡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황금 상의로 무게가 4㎏ 가까이 나간다. 전통 힌두교 사회의 상류계층인 브라만족이 계급의 상징으로 상체에 둘렀던 우파비타, 또는 성유(聖紐)로 짐작된다. 힌두교의 영향은 동남아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전시회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물건들을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현재 필리핀으로 불리는 수많은 섬에서 살았던 이들일까? 아니면 외국 무역상들이 가져온 것일까? 전시회 큐레이터인 플로리나 H 카피스트라노-베이커는 “그 대답은 우리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 소장품들은 베트남 옥-에오에서 발견된 유물이나 인도네시아 워노보요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 등 다른 동남아 국가들의 유사한 유물들과 비교 연구를 할 수 있는 소재를 여럿 제공해 중요한 의미를 띤다. 우리는 이 유물들이 외국에서 왔다는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필리핀에서 제작된 것으로 가정한다.” 필리핀에는 황금이 풍부하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필리핀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금 장신구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식민지 기록에 따르면 필리핀 사람들은 황금에 관한 지식이 해박해 어린아이들까지 금합금의 순도를 정확히 알아맞힐 정도였다. 또 페드로 데 산 부에나벤투라가 교정한 16세기 타갈로그어 사전에 기록된 것처럼 황금에 관한 어휘도 발달돼 있었고, 고유의 금세공 기술이 있었다. 이 유물들이 필리핀에서 제작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작품은 한 쌍의 황금 ‘링링-오’(오메가 모양의 장신구)다. 이 장신구들은 동남아의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되며, 오랫동안 베트남에서 제작됐다고 믿어져 왔다. 하지만 고고학자 피터 벨우드가 최근 필리핀 북부의 바타네스 지방에서 연장과 장신구 조각이 있는 링링-오 공장터를 발견했다. 2500여 년 전 그곳에서 그런 장신구들이 제작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하지만 전시 유물들에서는 다른 영향도 많이 드러난다. 카피스트라노-베이커는 이 물건들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건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측한다. 그녀는 또 “풍족한 식량과 엄청난 재산을 지닌 사회계층이 존재했으며, 그들이 공예 작업을 지원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후원자들은 막강한 권력과 재산을 지닌 듯하다.” 그런데 이 유물들은 오랜기간 동안 대체 어디에 숨겨져 있었을까? 필리핀 국민 예술가이자 건축가였던 고(故) 레안드로 록신의 가족이 이 유물들을 수집했다. 록신 일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필리핀의 과거사 연구를 위한 고고학적 탐험과 조사에 자금을 댔다. 그들은 국민 대다수가 가난하게 살아가는 필리핀에서 황금 유물을 과시하는 일이 꺼려져 25년 동안 소장품을 공개하지 않고 적당한 시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2004년 조벨 데 아얄라 가족이 아얄라 박물관을 열었을 때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록신 일가의 대표는 “이 전시회는 한 개인의 재산을 과시하려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필리핀 사람들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조상 전래의 국가적 재산을 보여주는 전시회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유물의 올바른 관리다. 우리에게 이런 유물이 있다는 사실을 국민의 의식 속에 확실히 심어 진실이 왜곡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학자들은 오랫동안 필리핀 문화가 푸난·앙코르·스리비자야·마드자파히트 등 좀 더 잘 알려진 동남아 문화보다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이 전시회는 필리핀이 지역 관계에서 이전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는 점을 시사한다. 동남아 선사 문화 권위자인 싱가포르 국립대의 존 믹식은 이 유물들이 필리핀의 가장 가치 있는 유형 문화재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 유물들은 필리핀의 문화적 정체성에 관한 논란에 실마리가 될지 모른다. 소설과 영화에 나오는 가공의 고고학자 인디애나 존스의 말마따나 “박물관에 있어야 마땅한 물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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