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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먼 인수 욕심낼 일 아니었다”

“리먼 인수 욕심낼 일 아니었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시기, 꽤 실력 있는 ‘예언자’가 출현했다. 아시아 최대의 부실채권 처리 회사를 이끌고 있는 이철휘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사장이다. 이 사장은 8월 초 “리먼브러더스는 회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리먼은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파산 신청을 했다. 이런 적중이 처음은 아니다.

6월 초엔 “전 세계적인 버블 붕괴 국면에 진입했다”고 단언했다. 우울하게도, 그 말은 현실화하고 있다. 국제 금융이 지독한 신용경색을 보이면서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이 사장은 올 1월 취임하자마자 미국 부실채권 공략에 나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 여파로 10년 만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부실채권 시장이 설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가 보낸 캠코의 시장조사단은 콧대 높은 미국의 투자은행들로부터 칙사 대접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실제 투자 시기는 8월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여유를 부렸다. 부실채권은 더 쌓이고, 가격은 더 떨어질 것이란 이유에서였다. 상황은 그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되고 있다. 당시 그는 미국이 정리신탁공사(RTC) 같은 기관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RTC는 1980년대 미국의 저축대부업계 붕괴 때 부실채권을 처리한, 한국의 캠코 같은 기구다. 미국 정부는 지금 RTC 재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그는 세계 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진짜 쓰나미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AIG에 대한 긴급자금 지원으로 금융위기가 끝자락을 향해가고 있다는 시각이 많은데….
“작은 고비를 넘겼을지는 몰라도 위기의 끝은 아니다. 쓰나미의 제1파일 뿐이다.”(그는 베어스턴스가 몰락한 것이나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은 쓰나미 전에 찾아오는 작은 파도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수술실 앞엔 대기 중인 환자 많아



-그렇게 보는 근거는.

“AIG가 수술을 마쳤지만 수술실 앞엔 아직 대기 중인 환자들이 많다. 반면 미국 정부가 마르지 않는 돈의 샘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미 정부는 연간 4000억 달러의 적자를 내고 있다. 미 국채 잔고가 9조 달러인데 공적자금 투입으로 떠안게 된 양대 모기지업체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보증 사채가 5조 달러다. 이런 이유로 미 국채의 신용등급을 낮추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이 사장은 금융위기가 좀체 진정되지 않는 이유를 “시장이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외환위기 때 우리가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것과 똑같은 얘기를 미국에 해주고 싶다”면서 “모든 부실을 투명하게 공개해서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나.
“신용경색이 심각해지면 누구도 손을 댈 수 없게 된다. 거대 금융회사들이 더 무너질 수도 있다. 이럴 때일수록 시장이 의심을 품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면 금융회사가 부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습하기 어려워진다. 미루면 미룰수록 부실이 커서 드러내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생겨나게 된다. 이번 1차 쓰나미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실물 부문으로 ‘2차 쓰나미’가 덮칠 수 있다.”

이 사장의 놀라운 예언 적중은 경험의 소산이다. 그는 일본이 부동산 버블 붕괴로 ‘잃어버린 10년’을 겪는 동안 7년간 일본에 있었다. 1991~94년 일본 대장성에 파견돼 재정금융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었고, 97~2001년 주일 재경관을 지냈다.
그는 경제의 거품이 생기기는 쉬워도 고통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버블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거품이 터진 뒤 경제는 기운을 되찾는 듯하다가 다시 나빠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쇠락한다. 일본이 꼭 그랬다”고 말했다.



-미국의 부동산 버블은 왜 생겼나.
“버블 발생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온통 장밋빛 전망이 넘치고, 과잉 유동성이 계속된다. 그리고 신산업이 대두돼 모두가 열광할 때 버블이 생겨난다. 80년대 일본은 말할 것도 없이 1920년대 대공황도 그랬다. 당시 미국은 대번영의 시기였다. 돈은 넘쳐났고, 자동차 산업은 호황을 영원히 지속시킬 엔진으로 여겨졌다. 과잉 유동성은 대개 인플레이션을 불러온다. 그러나 버블 생성기엔 과잉 유동성이 인플레로 연결되지 않는다. 대신 특정 자산의 가격상승을 야기한다. 대공황 때는 주식이 치솟았고, 일본 버블 때는 땅값이 그랬다. 17세기 네덜란드에 몰아쳤던 튤립 버블 때는 튤립 한 뿌리 가격이 노동자 20년치 연봉이었다. 이번엔 미국의 주택가격이 수년간 너무 과도하게 올랐다.”



-미국 같은 일류 경제가 버블을 감지하지 못한 이유는.
“미국인들은 주택가격이 계속 오른다고 믿고 있었다. 이번 경우 리스크 관리가 빵점이었다. 금융엔 왕도가 없다. 평소 리스크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버나드 쇼는 ‘인간은 개별 행동을 할 때는 상식적이지만, 군중으로 행동할 때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했다. 버블이 왜 생기느냐는 의문에 잘 들어맞는 이야기다.”



-우리 경제도 버블인가.
“일종의 버블이 있다. 일부 지역 아파트 가격은 정상이 아니다.”

이 사장은 최근 ‘버블 전문가’의 안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산업은행 민유성 행장이 7월 하순 들고 온 리먼브러더스 공동 인수 제안을 망설이지 않고 뿌리친 것이다. 리먼이 파산을 신청한 지금이야 리먼 인수가 호랑이 입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자살 행위였다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당시만 해도 국제 금융계의 큰손인 리먼의 몰락을 점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이 사장의 거절은 동업자를 찾고 있던 민 행장의 ‘리먼 인수’ 프로젝트에 상당한 타격이 됐다.



미국 부실채권 인수 여건 좋아



-왜 리먼 인수 제안을 거절했나.

“설명을 들어보니 인수까지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인수 후의 유동성 확보였다. 유동성 자금은 인수자금에 동그라미 하나는 더 붙겠더라. 그런데 국제 금융시장의 신용 경색은 점점 심해질 게 뻔했다. 신용경색이 생기면 누구도 선뜻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리먼 스스로도 자금조달 계획이 명확하지 않아 보였다. 결국 인수자가 유동성을 다 조달해야 하는데, 산업은행 측도 뾰족한 대답을 내지 못했다. 욕심 낼 사안이 아니었다.”

캠코는 8월 말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탈 뻔한 순간을 또 한번 모면했다. 미국 3위 투자은행인 메릴린치와의 부실채권 인수 거래 협상을 깬 것이다. 캠코는 당초 메릴린치와 공동으로 미국 부실채권 인수 사업을 추진했으나 메릴린치 측의 제안으로 아예 메릴린치가 보유한 모기지 관련 부실채권을 사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딜(deal)이 깨진 것은 가격 차이 때문이었다.

이 사장은 직원들에게 “미국과 딜을 할 때는 깰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며 메릴린치에 끌려다니지 않도록 독려했다. 지금 메릴린치는 BOA에 인수돼 간판을 내리게 됐다. 이 사장은 협상 무산에 대해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무엇이 문제였나.
“가격이 문제였다. 우리 생각과 메릴린치가 제시한 가격이 너무 차이가 났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인식 차이가 컸다.”

이 사장은 “메릴린치를 인수한 BOA가 딜을 제의해 오면 응하고 싶다”고 말했다. 상당한 수준까지 진행됐던 메릴린치와의 딜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는 의미다. 물론 BOA가 현실감을 갖고 합리적인 가격을 내놓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한껏 부풀었던 버블이 터지고 절망과 공포가 세상을 휩쓸고 있는 것을 주시하면서 이 사장은 ‘때’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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