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통법 너무 서둘러”
“한국 자통법 너무 서둘러”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국의 안방을 뒤흔든다. 환율은 춤을 추고, 은행 돈줄이 말라 기업은 흑자도산을 걱정한다. 비록 최근 글로벌 공조에 힘입어 국내 금융시장도 일시적 안정을 되찾는 듯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재연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이들도 많다. 미국과 한국의 경제 흐름을 동시에 꿰뚫고 있는 전문가는 지금의 위기를 어떻게 볼까?
미국 투자자문회사 그린하베스트어드바이저의 설립자이자 매니징 파트너인 한광호(54·미국명 Kurt K. Hahn)씨는 그런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월스트리트에서 24년간 금융상품을 개발해 온 금융전문가이자, 기획재정부 국제금융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인 그를 뉴스위크 한국판 이정명 기자가 뉴욕에서 만났다.
자본주의 역사에 금융위기가 많았다. 지금이 과거와 어떻게 다른가?
오래전부터 금융업이라는 말은 있었어도 금융산업이란 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레이건 정부 시절이다. 금융산업을 영어로 하면 ‘Financial Service Industry’다. 사실 은행은 돈을 매개하는 조직 아닌가? 산업을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인 셈이다. 그런데 15∼20년 전부터 금융 자체가 ‘Money Making Enterprise’(돈을 버는 기업)가 됐다. 바로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요즘은 자본주의 모델의 거의 끝에 다다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종말, 월스트리트의 종말이 온다는 의견에 동의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투자은행 상위 5개사 가운데 3개사가 사라졌다. 골드먼삭스와 모건스탠리는 은행지주회사로 전환했다. 2004년 증권관리위원회(SEC)가 톱5 투자은행에 레버리지(차입자본) 비율 규제를 풀어준 탓이다. 그전엔 레버리지율이 12 대 1 정도였는데 이게 30 대 1, 40 대 1까지 갔고, 장부외거래까지 치면 순레버리지율은 70 대 1, 80 대 1을 넘나들 것이다.
유럽 금융시장도 만만치 않은 듯하다.
미국보다 더 나쁘다고 한다. 특히 영국과 스페인 자산시장이 상당히 심각하다. 그동안 너무 흥청망청했지 않나. 미국은 그나마 일부지만 영국은 나라 전체가 서브프라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월가를 구하기 위해서는 7000억 달러 구제금융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많은데.
유례가 없는 상황이어서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나,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 모두 하루하루를 배우면서 대처한다. 폴슨의 해법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악성자산을 제거하려는 것인데 그 대신에 자본투여를 해 주자는 의견도 있었다. 은행한테 100이라는 자본을 주면 자산이 10배로 늘어난다. 대출능력이 그만큼 커진다. 우선증권 형식으로 증자해 주면 훨씬 효과적인데 지금처럼 나쁜 자산만 사 주면 그것만 꿀꺽하고 끝이다. 이런 아이디어가 구제금융안에 반영됐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건 디자인이 좀 잘못된 거 같다. 지금 GE, AT&T, IBM 같은 대기업들이 자금조달이 어려워 미국 정부가 돈을 대주고 있다. 그럼 작은 회사들은 어떻겠나? 조금만 더 있으면 사람들이 월급을 못 받고 소매상들은 물건을 못 사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이런 마당에 규제완화 정책을 고수하는 한국 정부의 정책기조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일단 모든 걸 연기하고 상황을 주시해야 한다. 완전히 신용시장이 얼어붙었고, 어떤 나라는 국가부도 사태까지 얘기하는 실정 아닌가? 살아날 방법은… 모르겠다. 나름대로 추측해 보건대, 모든 나라가 자기네 금융기관을 국유화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영국도 이미 국유화했고 독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한국도 정부가 나서서 지원해야 살아남을 거다. 지금 문제는 전혀 돈이 돌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국 외환보유액에는 문제가 없나?
그건 단기해결책일 뿐이다.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서로 믿지 못해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일본 은행만 해도 잉여자금이 많은 걸로 아는데 전혀 풀지 않는다. 지금은 글로벌 환경이다. 1997년 IMF 구제금융 당시만 해도 지역의 문제였지만 이번 사태는 세계적인 것이다. 돈이 얼마나 더 필요한지 계산이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중에 정부가 채권을 발행한다면 누가 사겠나?
지난번 한국 정부가 외평채기금 마련한다고 뉴욕에 왔다가 그냥 돌아간 일을 두고 말들이 많았는데.
그때 발행했어야 했다. 좀 비싸더라도 발행해 얼마간 가지고 있다가 지금쯤 은행권에 풀었다면 상당히 좋았을 거다. 어쨌건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도저히 추측하기가 힘들다. 1929년 대공황하고도 다른 점은 글로벌 금융환경에 놓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자본시장통합법 시행 시기를 놓고 여론이 둘로 갈린다. 기획재정부에 자문하기도 했는데 어떤 의견을 냈나?
지난해 12월 초 서울에 가서 여러 사람과 함께 당시 권오규 경제부총리를 만났다. 그해 7월부터 미국의 힘든 상황을 경험하던 터라 좀 걱정이 됐다. 너무 빨리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은행이 국유화되고 투자은행 모델은 사라졌고, 어쩌면 10년 전, 15년 전 상황으로 시계가 거꾸로 돌아갈 수도 있다. 은행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전개될 수도 있다. 그래서 상황을 좀 더 지켜보았으면 좋겠다. 한국 사람들이 다 쫓아가겠다던 골드먼삭스 모델도 사라진 마당이다. 왜 이런 투자은행들이 없어졌는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세계 추세에 과연 맞는 것인지 진지하게 검토해 볼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한·중·일 펀드를 제안한 것은 어떻게 보나?
상당히 좋은 아이디어다. 아주 큰 지역 파워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본다. 상품시장과 원자재시장도 만들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농산품이나 원자재, 상품 거래시장을 통합해 만들어도 좋다. 한·중·일 3국이 쓰는 원자재가 좀 많은가? 금융보다는 실물 쪽에서 시카고상품거래소와 런던금속거래소 같은 걸 합쳐 놓은 시장을 만들면 아주 좋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펀드투자를 독려하는 발언에 대해 찬반 양론이 갈리기도 했다.
나도 인터넷에서 봤는데 증시부양책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증시부양책이라는 것 자체가 구시대적 발상 아닌가? 이런 건 중국이나 후진국 같은 데서 쓰는 거다. 포커 치는데 자기 손에 있는 카드를 다 보여주고 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해외자본 좋은 일만 시킨다는 비판이 있다.
미국 헤지펀드들이 그런다. 동양에서는 돈 벌기가 쉽다고. 정부에서 정책으로 밀고 가니까 다 읽을 수 있다고 한다. 환율이니 뭐니 다 정책으로 발표하지 않나.
산업은행(KDB)의 리먼브러더스 인수 포기를 어떻게 보나?
만약 KDB가 투자해도 과연 시장이 호의적으로 반응했을까? KDB가 투자했으면 리먼브러더스가 살아남았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KDB가 25% 투자했다고 해도 시장에 자신감을 불어넣기엔 미흡하다. 투자해서 리먼이 살아남았던들 은행의 모델이 다 바뀌는 상황이니 투자효과가 날지도 의문이다. 따지고 보면 폴슨은 골드먼삭스 사람 아닌가. 베어스턴스나 리먼브러더스가 망한 건 워싱턴 커넥션이 부족해서라는 말이 나온다.
모두가 이번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신용부도스와프(CDS)를 꼽는다. 워런 버핏은 금융계의 대량살상무기라고도 했을 정도다.
CDS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리스크를 사고팔면서 그 위험성을 방지해 주는 상품이다. 사실은 매우 좋은 상품이다. 몇 년 전에 증권시장 메커니즘으로 옮겨졌어야 할 이 상품이 너무 오랫동안 장외시장에서 거래되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파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로부터 시작됐다.
미국 모기지 마켓의 역사는 상당히 길다. 모기지 마켓에서는 디폴트(채무 불이행) 발생 확률과 디폴트 발생 시 어떻게 회복하느냐, 이 두 가지가 중요하다. 여러 가지 변수를 시뮬레이팅 해 등급을 정하게 된다. 근데 서브프라임은 상품 자체의 역사가 아주 짧고 변형도 많다 보니 등급을 매기는 신용평가회사들이 잘못을 했다. 좀 더 강하게 기준을 정하고 디플레이션(불황) 시나리오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신용평가모델이 크게 잘못된 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남발을 방치한 정부나 평가등급을 부실하게 매긴 신용평가회사가 비난 받아 마땅하지 않나?
앞으로 신용평가회사에 소송을 많이 제기할 것이다. 이미 진행 중인 곳도 많다. 정부규제도 개선할 기회가 있었다. 몇 년 전 규제 차원을 주정부에서 연방정부로 높이자는 법안이 나왔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통과가 안 됐다. 어떤 주는 규제가 굉장히 약하고 또 어떤 주는 아주 강하고… 천차만별이었다.
신용평가회사들의 신뢰성에 금이 갈 가능성은?
어떻게 보면 신용평가회사들은 사실상 독점이다. 고만고만한 회사들은 거의 힘이 없고, S&P나 무디스가 시장을 지배한다. 문제를 얘기하자면 열 가지, 스무 가지를 헤아린다. 투자은행이 부채담보부증권(CDO) 같은 상품을 만들면서 신용평가회사들에 압력을 많이 가했다. 심지어 투자은행에서 상품에다 평가모델까지 만들어서 한번 해보라고 역제안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대로 하라는 건 아니지만 은근한 압력이 된다. 신용평가회사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다 젊다. 그들의 경력 행로를 보면 대부분 투자은행으로 가고, 또 가고 싶어 한다. 그러니 투자은행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겠나? 시쳇말로 투자은행한테 신용평가회사는 밥인 셈이다. 회계사들은 안 그런가? 마찬가지다.
월스트리트에서 오랫동안 일했는데 그들의 도덕적 해이는 어느 정도인가?
엄청나게 심각했다. 전부 남의 돈을 가지고 베팅하는 거니까. “Not my money. I am not playing with my money.”(남의 돈으로 장사하는데 뭐 어때서) 딱 이런 투다. 20대 대학생들이 투자은행으로 몰려가 30대에 백만장자로 은퇴하겠다고들 했다. 이게 제대로 된 사회인가? 장기투자라는 게 없어졌다. 지난 7~8년은 단기간에 터뜨리자는 식이었다.
한국 금융시장의 사정은 어떤가?
최근 한국에서 ELN(주식연계채권)이니 ELS(주식연계증권)니 하는 주식과 연계된 파생상품을 개인투자자들한테 파는 걸 보고 상당히 놀랐다. 미국만 해도 기관투자가들한테 파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들이 손해를 봤다. 키코(통화옵션상품) 같은 상품도 문제가 있다. 상품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한테 이런 식으로 팔 수 있는 건가.
한국 정책 당국자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
대공황 때는 정부가 아주 기초적인 접근만 했다. 그래서 25%의 은행이 망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부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니까 대공황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별로 좋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해결능력이 있어 보이는 게 국유화다. 어쨌든 한국 정부는 좀 시간을 가지고 사태를 주시하는 게 좋다고 본다. 지금까지 일어난 사태들을 점검하고 세계가 어떻게 변하는지 말이다. 해법을 찾는 일도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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