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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 비었는데 금리가 문제냐”

“금고 비었는데 금리가 문제냐”


금융시장이 돈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달러는 물론이고 원화도 공급이 달리자 은행들은 CD 발행에도 애를 먹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가 10월 14일 ‘가라앉는 느낌(Sinking Feeling)’이란 기사를 통해 한국의 경제 상황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도했다. FT가 한국의 은행에 대해 “자금조달의 12%를 해외시장에 의존하고 있으며, 조달 금리 상승으로 유동성이 축소되고 있다”고 지적한 데 대해 정부는 “국내 은행의 예금 대비 대출 비율(예대율), 원화 유동성, 외채 건전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튿날(15일) 국제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다시 불을 질렀다. S&P는 “한국의 은행들이 외화자금 조달 압력에 시달리고 있고, 자산 건전성과 수익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국민은행 등 6개 시중은행과 우리금융지주·신한카드를 ‘부정적 관찰 대상’으로 지정했다.

도대체 은행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정부까지 나서서 편을 들어주고 있는데도 갈수록 평가는 박해지는 것일까? 정부와 은행이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아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은행의 금고가 비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대출이나 투자 자금 마련을 위해 채권을 많이 발행했는데 만기가 된 채권의 기한을 연장하거나 다른 채권으로 대신 발행하는 게(차환발행) 어려워진 것이다.

급기야 10월 17일 한국은행은 경쟁입찰 방식으로 은행권에 달러를 직접 공급하기로 했다. 게다가 정부는 이날 청와대에서 거시경제정책협의회를 열고 국내 은행이 해외 은행과 거래할 경우 이에 대해선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국제 금융불안이 지속되면서 은행들의 원화·외화 유동성 부족 사태가 해결되지 않자 비상대책까지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돈 가뭄에 시달리는 한국의 은행들

10월 15일 신한은행이 2년 만기 은행채 2000억원을 연 7.81%에 발행한 것은 채권시장에선 하나의 뉴스였다. 은행이 은행채를 발행하는 건 의례적인 일인데도 채권시장이 이를 뜻밖의 사건으로 받아들인 건 이달 들어 1000억원 이상의 은행채를 발행한 게 신한은행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양동우 국민은행 자금부장은 “은행채는 물론 양도성예금증서(CD) 발행조차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은행채와 국고채 간의 금리차이인 은행채 스프레드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은행채 스프레드(AAA등급 기준)는 2.63%포인트로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0년 11월 이후 최대치로 확대됐다.

금리 스프레드는 한 달 전만 해도 1%에 불과했지만 이젠 2.5%로 확대된 것이다. 그만큼 은행 채권이 안 팔린다는 뜻이고 이는 은행이 자금을 조달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이런 현상은 CD도 마찬가지다. 7월 2조5000억원에서 8월 1000억원으로 급격하게 줄었던 은행의 CD 발행액은 급기야 9월엔 3조8000억원어치의 순상환이 이뤄졌다.

게다가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상환된 금액이 3조5000억원으로 전체 상환액의 92%에 달했다. CD 발행 여건이 은행채보다 더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김만수 산은자산운용 채권운용팀장은 “같은 기일물이라도 통상 CD 금리가 은행채 금리보다 낮은 경우가 많았다”며 “그러나 은행채 금리가 상승세를 타자 그동안 제자리에 있던 CD 금리가 은행채 금리보다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CD 발행 여건이 급속히 나빠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금리라도 좋다, 예금 끌어와라

채권 발행이 힘들다면 은행이 기댈 곳은 예금 수신액을 늘리는 것뿐이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 이후 국고채 금리는 하락하면서 예금 금리도 내리는 게 정상이다. 실제로 은행들은 한은의 기준금리 변동에 따라 예금금리 수준을 조절해 왔다.

그러나 은행은 거꾸로 가고 있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 이후에도 은행들은 예금금리를 내릴 생각조차 않고 있다. 오히려 금리를 올리면서 경쟁적으로 예금 끌어오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나은행은 하나금융그룹 소속 김인경 선수의 LPGA 생애 첫 우승을 기념해 이달 말까지 만기 6개월 금리 연 7.19%, 만기 3개월 연 6.56%인 정기예금을 1조원 한도로 판매한다. SC제일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 최고 금리는 연 7.2%이고 외환은행은 최고 연 7.1%를 제공한다.

국민·우리·신한 은행의 정기예금 금리도 7%에 육박하고 있다. 그러나 은행의 정기예금 수신은 8월 6조7000억원에서 9월엔 2조원으로 역주행했다. 그나마 ‘리먼’ 파산 이후 안전자산 선호도가 높아지며 1조8000억원이 유입돼 효자 노릇을 한 게 이 정도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채권 발행이 어려워지고, 대출 부실화 정도가 높은 비은행 금융회사들이 거액의 정기예금을 인출하면서 정기예금 증가폭이 오히려 8월보다 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주택담보대출 등 대출의 만기는 점점 길어지는 데 비해 정기예금의 경우 1년 이하가 주종을 이룬다. 최근 들어서는 금융시장 불안에 따라 장기예금을 꺼리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3개월짜리 정기예금이 크게 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8월 말 현재 은행의 정기예금 잔액 347조9920억원 가운데 6개월 미만 단기예금이 10.7%인 37조1178억원에 달했다. 6개월 미만 단기예금 비중이 10%를 넘어선 것은 2003년 11월 이후 4년11개월 만에 처음이다. 이에 비해 은행권의 주택담보대출 만기는 길어지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의 평균 약정 만기는 12.7년이다. 이처럼 대출은 길게 주고, 예금은 짧게 받으면서 은행 자금운용의 미스매치(만기 불일치)가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단기 고금리로 확보한 자금을 활용해 장기 저금리로 운용한다면 답은 뻔하다. 은행의 수익성이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은행 수익성 향상에 큰 역할을 했던 펀드판매 수수료 등 각종 수수료 수입도 올 들어서는 주식시장이 망가지면서 빠른 속도로 줄고 있다. 은행 입장에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이런 은행을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좋게 봐줄 리 만무하다. NH투자증권은 최근 5개 주요 은행과 금융지주사의 3분기 순이익 전망치를 당초 전망치보다 최대 50% 낮췄다. 키움증권은 국민은행의 3분기 순이익이 1년 전보다 31.7% 줄어든 5295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추정하는 등 각 은행의 순이익 전망치를 지난해보다 낮춰 잡았다.



#풀리지 않는 달러 유동성

미국과 유럽의 중앙은행들이 달러를 무제한 풀기로 했다. 영국에 이어 미국도 2500억 달러를 투입해 주요 은행들의 지분을 정부가 사들이기로 했다. 외환위기 이후 공적자금을 투입해 정부가 은행의 대주주가 된 한국 사례와 유사하다. 어쨌든 이는 불안에 떨고 있는 전 세계 투자자들에겐 희소식임이 분명했다. 특히 달러에 목말라 하던 국내 은행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했다.

김교성 기업은행 자금부장은 “외화 조달시장에 특기할 만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리먼’ 파산 이후 은행들은 1주일짜리 단기차입도 어려워져 하루짜리 단기 달러 차입(오버나이트)으로 연명해왔다. 그러나 오버나이트 금리도 국제 금융시장의 위기 심화에 따라 1~9%까지 널뛰기를 반복하며 은행 자금 담당자들을 괴롭혔다.

오버나이트 시장이 이러니 1년 이하 단기자금 거래가 이뤄지는 머니마켓시장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가 상당 기간 지속되고 있다. 김인주 산업은행 외자조달팀장은 “채권을 발행해 외자를 조달하고 싶어도 매수자가 실종된 상태”라며 “현 상태에선 추가로 주는 가산금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고 했다.

달러 조달을 하고 싶어도 ‘얼마나 어려우면 이런 상황에서 달러를 찾느냐’는 나쁜 인상을 줄까 봐 해외 IR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일부 은행은 그나마 달러가 넉넉한 수출 대기업들을 찾아가 외화예금을 늘려 달라고 부탁하고 있을 정도다. 달러를 빌려 주던 은행이 오히려 기업으로부터 달러를 빌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지난 10월 6일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전광우 금융위원장이 외화자산을 매각해 필요한 외화를 확보할 것을 은행에 주문하면서 은행들의 자산 매각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은행들은 이미 채권과 주식 등 유가증권을 팔아 어려운 살림살이에 보태왔다. 시중은행 자금담당자는 “팔 만한 외화자산은 이미 팔았다”며 “헐값에 마구 자산을 내놓을 수도 없고, 사 갈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결국 애간장이 끓는 건 국내 시중은행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들의 만기 도래 외화부채는 10월 64억7000만 달러, 11월 81억6000만 달러, 12월 42억 달러다. 강만수 장관은 “연말까지 은행들이 외화 부채를 갚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은행들은 “지금으로선 자금 상황이 빠듯하다”고 하소연이다. 물론 외화조달 시장이 조금씩 풀린다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정부의 특단 대책이 없으면 만기 상환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은행들, 정말 괜찮나

10월 16일 금융위원회에 대한 국회 정무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홍재형 의원(민주당)은 “은행 스스로 돈을 구하기 힘들어 난리인데 ‘비 올 때 우산 빼앗지 말라’고 해봐야 무슨 소용 있느냐”고 전광우 위원장을 다그쳤다. 이에 대해 전 위원장은 “한은과 협의해 총액대출한도를 늘리는 방안을 포함해 은행 유동성을 확충할 방안을 강구 중”이라고 답변했다.

결국 정부도 시장에 맡겨선 은행들의 자금사정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셈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영국의 은행과 달리 국내 은행들이 유동성 때문에 당장 큰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을 것이란 게 금융당국의 판단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 최근 한 은행이 자금부족에 시달리다가 지급준비율을 맞추기 위해 타 은행에 긴급 자금을 수혈 받기도 했다.

지표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안으로 곪아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은행의 자금사정이 빡빡해진 데엔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이 촉매가 됐지만 은행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 측면도 강하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지난 수년간 은행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무한대의 자산 경쟁을 벌였다”며 “그때 뿌렸던 씨앗이 지금 잉태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이 “한국의 은행들이 외환위기의 교훈을 제대로 새기지 못했다”고 비판한 것은 상당 부분 왜곡된 정보에 기초하고 있긴 하지만 큰 테두리에선 그리 잘못된 분석도 아니라는 얘기다. 문제는 은행을 둘러싼 악재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가상승과 경기침체가 가속화되면서 가계부채와 건설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의 부실 가능성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은행의 유동성 확보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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