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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에서도 돈을 풀지 않는다”

“명동에서도 돈을 풀지 않는다”

돈줄이 막힌 기업들이 불법 사채시장으로 몰리고 있다. 이곳이 아니면 단기자금을 확보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불법 사채시장이 ‘양날의 칼’이라는 점이다. 사채를 빌리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지만 엄청난 금융비용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주식을 담보로 잡혔을 경우, 자칫 경영권마저 빼앗길 수 있다. 당국에서는 이 같은 상황을 알지만 섣불리 규제하기도 어렵다. 자칫 메스를 댔다간 기업들의 마지막 자금줄마저 끊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들에 따르면 요즘 자금난을 겪고 있는 곳들에 사채시장은 ‘우산’이다. 이코노미스트는 A금융기관이 금융감독원에 보고한 ‘사채시장 동향보고서’를 입수했다. 여기에는 요즘 사채시장의 실상이 잘 나타나 있다.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는 기업이 불법 사채시장의 문턱을 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은 명동 사채시장.

돈 가뭄이 심각하다. 금융위기의 불씨가 실물로 옮겨 붙음에 따라 기업의 금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를 채울 만한 방법이 여의치 않다. 기업어음·회사채 발행이 끊긴 것은 오래전 일. 은행에서 대출받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그나마 대출금을 회수해 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저축은행 역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해 있다. 자신들의 앞가림에도 급급해 기업의 금고를 걱정해줄 겨를이 없다. 10월 23일 현재 저축은행의 평균 금리는 9%에 육박하고 있다. 유동성 확보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고객 자금을 유치하겠다는 계산이다. 카드·캐피털 업계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이들이 10월(23일 현재)에 발행한 채권 총액은 6000억원. 올 상반기 월 평균 발행액 1조6230억원의 절반에 훨씬 못 미친다. 이에 따라 여신금융사들조차 현금 마련에 애를 먹고 있다. 돈 가뭄에 시달리는 기업들이 기댈 만한 언덕은 현재로선 무등록 대부업계, 이를테면 불법 사채업체뿐이다.

외감법인 대상 등록 대부업체들의 돈줄도 바짝 말랐기 때문이다. 등록 대부업체의 자금조달 저수지는 제2금융권, 그 가운데서도 저축은행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저축은행의 유동성이 떨어짐에 따라 등록 대부업계의 돈줄도 함께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대부소비자금융협회에 따르면 중대형 대부업체(45개)의 월간 신규대출은 7월 1886억원, 8월 1627억원, 9월 1105억원으로 줄었다.

10월에는 1000억원 미만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게 협회 관계자의 말이다. “그나마 단기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곳은 불법 사채업계밖에 없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최악의 경기위기 속에서 불법 사채업자들이 기업들의 ‘우산’이 되고 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불법 사채업체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들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불법 사채업체의 전주(錢主)는 누구인지, 얼마나 높은 금리를 받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얘기다.



불법시장 규모만 10조원 달해


A금융기관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사채시장 동향보고서.’ 이 보고서에는 불법 사채시장의 실상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최근 금융감독원은 시중은행과 증권사로부터 사채시장 관련 동향 보고를 받았다. 불법 사채시장에 대한 정보를 확보할 목적으로 보인다. 이코노미스트는 금감원에 보고된 A금융기관의 ‘사채시장 동향보고서’를 입수했다. 여기에는 최근 불법 사채시장의 상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사채시장 동향보고서에 따르면 불법 사채시장의 규모는 10조원에 달한다. 전체 사채시장 규모는 18조원가량. 55.5% 정도를 불법 사채업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 가운데 연 240~360%(월 20~30%) 금리로 대출되는 규모는 2조8000억원. 360% 이상도 3조3000억원에 이른다. 불법 사채업자들이 받는 연 이자만 해도 최소 18조원을 넘는다. 배보다 배꼽이 큰 셈이다.

여기엔 일본 자금도 상당수 포함돼 있을 것이라고 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보고서는 “불법 사채시장 규모 10조원 중 40%는 일본계 자금이 유입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불법 사채시장을 찾는 기업들은 대부분 최악의 자금난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에 따르면 증권시장에서 유상증자·전환사채(CB)·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에 실패한 기업들이 불법 사채시장을 찾는다.

제도권 금융기관에선 자금조달 수단이 막혔기 때문이다. 환차손이 자기자본 대비 20% 이상 난 기업 100여 개사도 마찬가지로 불법 사채시장을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분양 물량 급증으로 최악의 자금난을 겪고 있는 건설사들은 아예 ‘통 매각’을 무기로 불법 사채를 쓰고 있다.

보고서는 “시공사가 보유하고 있는 미분양 사업장과 기존 시행업자의 사업권을 묶는 방식, 이른바 ‘통 매각’을 사채조달 조건으로 내세우는 사례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건설업의 기본인 ‘사업권+사업장’ 거래가 이제 사채시장에서 나돌고 있다는 이야기다. 건설업계의 유동성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보고서는 “명동시장 분위기는 외환위기와 유사한 동향을 보이고 있으며, (사채업자들이) IMF 때와 같은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생각에 자금을 풀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보고서는 불법 사채업자들의 행태도 적시했다.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돈을 풀거나 아니면 움켜쥐고 있거나’다. 행동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돈을 푸는 쪽은 ‘이참에 고금리로 사채를 놓아 원없이 돈 벌겠다’고 계산하고 있다. 불법 사채시장에선 이들을 ‘개미형’ 전주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고리대금업자의 전형이다. 개미형 전주들은 적게는 수 천만원, 많게는 수 억원의 자금을 돌린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들 대부분은 ‘얼굴이 없다’는 점이다.

사무실엔 1~2명의 직원이 상근하는데, 이들은 일정한 수수료를 먹는 직원이다. 개미형 전주들은 뒷방에 앉아 통장 관리만 하면서 돈을 굴린다. 개미형 전주들의 금리 수준은 한국은행 기준금리와 무관하다. 한국은행은 최근 10월 기준금리를 연 5.00%에서 0.25포인트 인하했지만 이들은 아랑곳 않고 고금리를 베팅한다.

아쉬울 게 없기 때문이다. 초단기자금의 금리는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보고서는 “한국은행 기준금리 인하와 관련, 불법 사채시장에선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며 “기준금리를 인하했음에도 사채시장의 어음할인율은 계속 상승하고 있고, 특히 환율 급등으로 자금시장이 불안해지자 시장 관행까지 무시하고 기준조차 없는 금리로 거래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개미형 전주들이 ‘높은 금리를 주면 무조건 돈을 빌려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이들 역시 리스크 관리를 한다. 급전을 요구한 기업의 재무 상황을 꼼꼼히 살핀다. 확실한 담보가 없으면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은 다른 금융기관과 같다.
명동 사채업자는 “1000만원 빌려주면 어떤 금리를 제시하든 수용하겠다고 말하면 십중팔구 거절”이라며 “이들은 돈 냄새를 맡고 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에 돈 떼이는 것을 죽는 것보다 싫어한다”고 말했다.



명동 분위기 IMF 때와 비슷


불법 사채업자들로 인한 기업들의 피해가 예상되고 있지만 강력한 규제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금융감독원이 저축은행의 대출실태를 조사하는 모습.
개미형과 달리 돈을 움켜쥐고 있는 불법 사채업자는 ‘기업형’ 전주들이다. 이들의 목표는 ‘고금리 먹기’에 그치지 않는다. 기업 하나를 통째 먹거나 경영권을 인수하려 한다. 돈을 풀지 않고 움켜쥐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소기업이 헐값에 매물로 나올 경우에 대비해 실탄을 모으고 있다는 얘기다.

기업형 전주들의 목표는 기업 경영일까? 물론 아니다. 싼값에 인수해 비싼 값에 되팔면 그만이다. 명동 사채시장의 또 다른 업자는 “명동과 강남의 몇몇 큰손들은 벌써 중소기업 M&A를 위해 필요한 자금을 확보해 놓고 있다”고 했다.

정부와 금융 당국이 지원 대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지만 기업의 신음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상대적으로 현금 유동성이 취약한 중소기업은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제도권 금융기관들의 대출금리가 날로 오르고 있다. 2006년 말 6.4%였던 중소기업 대출금리는 지난 8월 7.5%까지 올라, 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전체 중소기업 대출 이자는 2006년 18조8000억원에서 올해는 30조원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그렇다고 신규대출·만기연장이 쉬운 것도 아니다.

폭우는 쏟아지는데 제도권 금융기관들은 우산 뺏기에 바쁜 모양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돈이 절박한 중소기업이 불법 사채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불법 사채시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편으론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무시무시한 위험 지대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금융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도산한 기업이 적지 않다.

혹 떼려다 더 큰 것을 붙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들을 규제하면 가뜩이나 어려운 중소기업의 마지막 돈줄까지 사라질 수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이 가장 신속하게 단기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대상은 어쩌면 불법 사채업자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지금 불법 사채시장을 과도하게 단속하거나 규제했다간 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며 “자금줄의 숨통을 아예 틀어막으면 기업의 줄도산이 잇따를 가능성도 있다”고 강조했다. 불법 사채시장을 규제하자니 돈줄이 끊기고, 그대로 두자니 피해가 예상되고…. 당국의 딜레마다.
동향 보고서에 나타난 사채시장


□ 등록 대부업체 전국 1만7539개, 규모 8조원



□ 무등록 대부업체(불법 사채업체) 규모 10조원
- 전체 대부업계의 55.5% 차지
- 연 240~360% 금리 대출 규모 2조8000억원
- 연 360% 이상 금리 대출 규모 3조3000억원
- 이자 규모만 연 18조6000억원



□ 불법 사채시장 자금의 40% 일본계



□ 불법 사채시장 금리
- 한국은행 기준금리 인하와 무관
- 환율 급등하자 기준 없는 금리 급증
- 어음할인율 급등, 대기업 어음 월 2.5~3.5부 거래



□ 불법 사채시장 찾는 기업들
- 환차손 자기자본 대비 20% 이상 손실 기업 100여 개
- 유상증자·전환사채 불발 기업들
- 건설사들, 사업권+사업장 묶은 ‘통 매각’ 거래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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