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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에 빛나는 기업 상생 경영

불황에 빛나는 기업 상생 경영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 정상 정복 인원이 획기적으로 증가하게 된 이유가 뭘까? 그건 바로 베이스캠프가 6000m 고지를 넘어 정상 턱밑에까지 치고 올라갔기 때문이다.”

지난 12월 10일 지식경제부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서울 메리어트 호텔에서 개최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국제컨퍼런스’ 주제발표에 나선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대학원장은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등산에 빗대어 표현했다.

베이스캠프가 정상에 가까울수록 산악인들의 정상 정복이 쉬워졌듯이 일류 기술로 무장한 중소 협력업체를 많이 거느린 대기업도 글로벌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당면한 세계 경제위기를 극복하자면 글로벌 시장에 도전하는 중소기업을 많이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석학들과 기업인, 정부 관료, 학계 전문가들이 다수 참석한 이날 행사장엔 다소 결연한 기운이 감돌았다. 전날 글로벌 기업들의 대규모 감원과 폐업 소식이 잇따라 전해진 탓이다. 일본 소니가 8000명의 인력을 감원하고, LA 타임스·시카고 트리뷴을 소유한 트리뷴 컴퍼니의 파산보호 신청 소식 등이 줄을 이었다.

이날 주제인 대기업-중소기업 간 ‘상생협력’ 문제도 당위론을 뛰어넘어 불황시대 생존전략 차원에서 심도있게 다뤄졌다. 지향점이 다르게 마련인 학자와 기업인들이 유사한 처방전을 내놓은 것도 이례적이었다. 혁신관리와 기업 생태계 이론에서 선도적 위치에 서 있는 마르코 이안시티 하버드대 교수는 이날 기조강연에서 “기업 간 경쟁은 기업이 소속돼 있는 생태계 간 경쟁”이라며 대기업의 적극적인 투자를 강조했다.

이기태 삼성전자 부회장도 글로벌 경쟁 환경의 변화를 언급하면서 “개별 기업 간 경쟁이 기업 네트워크 간 경쟁으로 확대됐다”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또 “동일 네크워크 구성원 간 상호 협력이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고 강조했다. 두 사람 모두 대기업이 상생 차원에서 협력사의 종합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대기업-중소기업 간 상생경영이 글로벌 경제위기를 맞아 산업계의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대기업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상생경영에 발벗고 나섰다. 삼성전자는 이날 기조발제를 통해 향후 상생경영 전략과 방향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즉 경쟁사와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호협력을 통해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키우겠다(이기태 부회장)고 공언했다.

“미래기술을 공동 개발하고 신사업 발굴까지 함께하는 핵심 기술역량을 발굴하겠다”는 게 삼성전자의 구상이다. 중소기업에 요구사항도 분명히 밝혔다. 대기업과 상호 협력할 수 있는 경쟁력 확보에 주력하고, 기업 네트워크 참여 주체로서 고유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생의 네트워크에 참여하자면 그만한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주문이다. 포스코는 공격적인 투자로 불황을 극복하기로 하고, 내년에 6조원을 국내에 투자한다. 이는 올해 투자액보다 76% 늘어난 규모로 역대 최대 액수다. 대대적인 투자로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일자리 창출, 중소기업 동반 성장 등 내수 진작에도 일조한다는 것이다.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12월 11일 열린 ‘범포스코 상생경영 선포 및 공정거래 협약식’에서 “개별 기업 간 경쟁보다는 기업이 속한 네트워크 간 경쟁이 심화된다”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밖에 LG전자를 비롯한 LG그룹 6개 계열사도 11월 1700여 개 하도급 협력회사에 100% 현금성 결제를 약속했다.


현대자동차는 회사가 200억원, 기업은행이 800억원을 보태 1000억원 규모의 상생펀드를 조성하는 한편, 친환경그린카 연구개발비 100억원을 협력업체에 무상 지원한다. 각종 통계에 잡히는 상생협력의 실적은 양호한 편이다.

전경련이 8월부터 10월까지 국내 30대 그룹을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올해 중소기업에 대한 상생협력 지원 실적이 전년보다 24.2% 증가할 것으로 추정됐다(38쪽 도표 참조).

상생협력 전담조직을 운영하는 그룹도 2005년 8개에서 2006년 15개, 지난해와 올해 각각 19개로 늘어났다. 대기업들이 중소기업 협력사들과 상생협력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고 전경련은 분석했다. 대기업들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 중소기업들의 사정은 딱하기 그지없다. 10월 들어 중소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68.9%로 7개월째 내려앉았다.

올 12월 중소제조업 업황 전망 건강도지수(SHBI: 100 이상은 호전, 미만은 악화)도 11월(79.6)보다 14.6포인트 떨어진 65를 기록했다. 중소 제조업체의 판매대금 중 현금결제 비중도 1분기 63.7%에서 2분기 61.9%, 3분기 60.5%로 두 분기 연속 낮아졌다. 이는 올 하반기 경제사정이 급속도로 악화된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올 상반기 1조1417억원에 달했던 시설 및 운전자금 지원 규모가 하반기에는 6598억원(추정치)으로 급감하는 추세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올 하반기에 본격화된 점을 감안하면 새해에도 상생협력이 더욱 위축될 여지가 적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소기업청이 최근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서도 이 같은 우려가 짙게 배어 나온다.

중소기업청 관계자는 상생협력 동향과 관련해 “지원 실적으로 파악한 대·중소기업 간 상생협력은 원활히 진행되는 것으로 보이나 불황기의 상생협력 동향도 관심을 갖고 예의주시하겠다”고 밝혔다.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대·중소기업 협력사업을 담당하는 이상규 과장은 실제로 최근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다고 말했다.

“대기업들 가운데 여력이 없어 지원을 꺼리는 곳도 있다. 우리공단의 지역본부에서 대기업을 설득해 협력사업을 추진하려 해도 난색을 표하는 경우도 나온다.” 삼성전자조차도 내년도 경영계획을 연말 혹은 내년 초에나 세울 수 있다(이기태 삼성전자 부회장)고 토로할 만큼 경제 심리가 꽁꽁 얼어붙은 탓이다.

이런 마당에 중소기업들에 상생경영 구호는 다소 멀게만 느껴질 수 있다. 산업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4년 상생체감도를 100이라 했을 때 지난해 대기업이 느낀 상생체감도는 125.4에 달했다. 하지만 같은 조사에서 중소기업이 느낀 상생체감도는 114에 그쳤다. 국내 대기업들이 비용 절감을 이유로 협력업체들에 부담을 전가하는 불공정 거래 관행과도 무관치 않다고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말한다.

나아가 아예 대기업 협력업체군에 들지 못한 중소기업은 설 자리가 점점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경영컨설팅 전문업체 다산E&E 안영신 이사는 “많은 중소기업이 대기업과의 상생경영의 틀 속에 참여하지도 못하는 점을 감안해 중소기업 간 네트워크에 정책과 재정 지원을 하는 게 진정한 상생경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제 현실은 냉엄하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서로 도움이 되지 않는 상생경영엔 매력을 못 느낀다는 반론이 나온다. 김기찬 교수는 “공정거래를 통한 상생경영도 중요하지만 경쟁력을 제고하는 상생경영이 국제 경쟁에서 지속적인 성공을 보장한다”고 말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협력은 중소기업이 제공하는 기술이나 부품의 경쟁력에 의해 결정된다(조석래 전경련 회장)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불황에서는 누구나 다 어렵다. 단지 그 끄트머리에서 누가 미래로 열린 문을 향해 나갈 준비를 하느냐가 승패의 관건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예컨대 부동산 거품이 꺼진 뒤 일본 기업들이 10년 불황에 허덕일 때 일본 교토에 근거지를 둔 기업들은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교토식 경영에 나선 일본 전자부품, 계측장비 업체 10개사는 소니, 히타치 등 일본의 대표적 전자메이커 7개사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압도했다.

1991년 매출액을 100이라 했을 때 2000년 일본 전자메이커 7개사 매출액이 150을 밑돌았는데 교토식 경영에 나선 10개사 매출액은 200을 훌쩍 뛰어넘었다. 영업이익도 1991년을 100으로 잡을 때 전자 메이커 7개사 2000년 영업이익은 100을 간신히 넘겼다. 하지만 교토식 경영을 한 10개사는 300을 웃돌았다.

이런 흐름을 가장 먼저 간파한 스에마쓰 지히로 교토대 교수는 이를 비판정신, 과학적·합리적 경영, 외부와의 소통과 더불어 상생협력이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지난 10일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국제컨퍼런스’에 주제발표자로 나선 그는 “교토 기업들은 기업 생태계에 참여하는 기업들이 열심히 할 수록 이익이 되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방법으로 위기를 이겨냈다”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박세정 책임연구원은 지난 4월 ‘글로벌 비즈니스의 기반, 파트너 생태계’ 보고서에서 “생태계가 강할수록 위험에 쉽게 노출되지 않고 위험을 미리 감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단, 기업 스스로가 나가고자 하는 정확한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고 파트너와 상생한다는 생각으로 글로벌 기업 수준에 걸맞은 생태계를 만든다는 전제조건이다.

이에 뉴스위크 한국판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첨단기술 개발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사례를 추적해 봤다. 전자저울식 재고관리(DSL) 시스템을 개발해 대기업에 원가 절감을 안겨준 한국화스너㈜, 기술개발 22년 만에 포스코 원자로 풍구를 독점 공급하게 된 서울엔지니어링㈜, 삼성전자와 비전을 공유하는 운명공동체로 발전한 토판포토마스크㈜ 등이 그들이다.

조달·재고관리 ‘사각지대’ 확 바꿨다
Q&A 김덕한 한국화스너 대표 “자체 실험실 갖추고 품질 관리”
김덕한 한국화스너 대표는 볼트·너트 등 기계체결 부품의 선진형 유통에 ‘올인’한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다. 미국 메릴랜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잠시 독일계 무역회사를 거쳐 1990년대 미국계 기계체결 부품 제조사인 운브라코 한국지사장, 스위스의 세계적인 기계체결 부품 유통사인 보싸드와 합작한 한국보싸드㈜의 대표를 거쳤다.

국내 최대 공작기계 제조사인 두산인프라코어에 전자저울식 재고관리(DSL) 시스템을 납품해 큰 호응을 얻은 그를 강태욱 기자가 만났다.



한국형 DSL 시스템을 개발한 이유는?
볼트·너트류는 소모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기술품목’이다. 선진국에선 이 분야에서도 전문적인 유통회사가 있다. 역사가 200년이 된 스위스 보싸드사는 자사가 납품하는 대기업의 재고량까지 파악해 알아서 공급해 주는 시스템(VMI, Vendor Managed Inventory)을 가동한다. 삼성·현대 등은 특히 자동차업계를 중심으로 선진적인 재고관리 시스템을 가동하지만 자동차 분야를 제외하면 기계체결 부품의 유통·재고관리는 아직 사각지대다.



국내의 기계체결 부품 제조와 유통엔 어떤 문제가 있나?
200~300개에 이르는 국내 업체는 규모가 영세해 신기술을 개발하려는 모티브가 부족하다. 아직도 30년 전과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 보니 국내 체결부품의 60%는 저가 중국산이 차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소규모 유통업체지만 체결 부품의 자체 실험실까지 갖추고 품질관리를 하며 제조사와 공동으로 신제품도 개발한다. 현재 두산에 2000종이 넘는 제품을 납품한다.



선진국의 기계체결 부품 유통 실태는 어떤가?
일본만 해도 기계체결 부품을 전문적으로 유통하는 대형 회사가 100여 군데나 있지만 한국은 거의 전무하다. 제조 분야도 마찬가지다. 영국·미국·독일·프랑스 등 선진국은 모두 볼트와 와셔를 하나로 묶은 합체형 제품으로 옮겨가 원가절감에 성공했지만 우리는 크게 뒤처져 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상생에는 어떤 장애물이 있나?
외국 기업들은 중소기업에 발주할 때 대개 최소한 6개월 정도의 여유를 두고 장기발주를 한다. 그러나 한국은 보름이나 한 달 발주가 대부분이다. 그렇다 보니 중소기업 입장에선 생산 코스트도 올라가고 원자재 확보도 어렵다. 상호간의 신뢰와 공생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기계체결 부품 분야가 발전하려면 뭐가 필요한가?
사실 VMI는 기계체결 부품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의 부품에 해당된다. 우리가 개발한 전자저울 시스템을 통해 유통과 조달 과정을 합리화시키면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 유통업체에도 도움이 되며 일선 중소제조업체들에도 도움이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기계체결 부품을 제조하는 중소업체와 우리 같은 전문 유통업체, 대형 유통업체, 그리고 대기업 간의 ‘원-윈-윈 상황’이 된다.



두산인프라코어에서 DSL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장애물은 없었나?
두산인프라코어 창원공장의 물류창고에 들어 있던 기존 설비를 들어내고 재배치하는 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DSL 시스템에 기초한 새로운 조달관리 체계가 자리 잡는 데도 한 달이 소요됐다. 새로운 시스템을 적용하는 데 불평도 더러 있었지만 두산 측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기계체결 부품의 유통 합리화가 갖는 의미는?
어떤 기계와 장비도 체결 부품이 없이는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다. 그 효율적인 생산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조달관리에 대한 정책입안자들의 큰 관심이 요구된다. 조달과 재고 합리화가 전 산업으로 확산된다면 정부가 추구하는 지식경제형 산업 구조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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