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아내가 취직을 했어요

아내가 취직을 했어요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의미가 바뀌고 있다. 살림 잘하고 아이 잘 키우는 것으로는 각박한 생활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젊은 아내들은 진작부터 가정과 직장 일을 병행했지만 요즘에는 결혼 후 집안일만 하던 전업주부들도 취업전선으로 나오고 있다. 이제 남편의 짐을 덜어 줄 수 있어야 현명한 어머니,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다. 그 신(新)풍속도-.

경기도 과천에 사는 주부 박모(39)씨는 요즘 밤늦게 집에 들어가는 일이 잦다. 가을로 들어서면서 각종 야외 행사가 늘어나 일감이 늘었기 때문이다.

결혼 12년 차인 박씨가 바빠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대학에서 미술(서양화)을 전공한 그녀는 지난해까지 전업주부로 3명의 자녀를 키우면서 바쁘게 지냈지만 올봄부터는 각종 이벤트나 행사에서 캐릭터용 그림이나 초상화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3명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는 밤늦게 귀가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 휴대전화를 통해 아이들과 통화하고, 학원과 공부방에 가 있는지 확인도 하지만 예전처럼 애들을 손수 챙기지 못하는 것이 계속 마음 쓰일 수밖에 없다.

박씨가 전업주부 10년 생활을 중단하고 직업전선에 뛰어든 것은 지난해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의 영향이 크다. 잘나가던 남편 회사에서도 보너스 지급이 축소되면서 수입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연초에 1000만~2000만원 사이에서 나오던 보너스가 일시에 삭감되면서 생활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침 대학 친구가 하던 이벤트 회사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의가 왔고 박씨는 올 4월부터 여러 행사장을 다니고 있다. 박씨는 “행사가 많은 주말에 집을 비우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면서도 “이렇게라도 해서 가정 경제가 제대로 유지되는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서울 은평구에 사는 주부 남궁양희(35)씨는 요즘 웅진씽크빅에서 잘나가는 ‘다책교사’로 활약하고 있다. 어린이용 전집이나 동화책 등을 판매하는 다책교사는 그가 결혼 6년 만에 처음 가진 직업이다. 아들 둘을 두고 있는 남궁양희씨는 올 4월 우연한 기회에 애들 책을 상담하러 웅진씽크빅 사무실에 들렀다가 아예 다책교사가 됐다.

때마침 세무사 사무실에서 양도소득세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남편의 수입도 줄어든 상태였다. 부동산 거래 건수가 줄면서 업무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쑥쑥 커가는 애들의 교육비는 물론이고 생활비도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지부장 설득에 넘어갔다. 남궁양희씨는 “처음엔 출근하는 것부터 사람 상대하는 것까지 많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잘 적응해 즐겁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집안일에 소홀해질 텐데 남편 불만이 없느냐”는 물음엔 “경기가 안 좋아 남편이 많이 힘들어 했는데 내가 일에 재능을 보이니 ‘자기가 자리 잡으니까 참 좋다’고 하더라”고 웃었다. 남궁양희씨는 “일을 하고 나서 가족과의 관계도 더 좋아졌다”고 말했다. 위의 두 사례 외에도 요즘 전업주부로 집에서 살림만 하던 사람 중 일터로 나가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불황이 구조화, 장기화하면서 전업주부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특히 경기 회복 조짐에도 불구하고 실질임금은 늘지 않고, 남편들의 직장생활이 불안해지면서 주부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폭이 늘고 있다.



‘올해는 상여금 지급할 수 없을 것 같다’에 불안감전업주부들이 얼마나 많이 직장으로 진출하는지를 알 수 있는 정확한 통계는 없다. 하지만 통계청의 40~49세 여성 취업자 수 통계를 보면 경제위기 이전인 2007년 여름보다 올해 여름에 취업자 수가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이 자료를 통해 전업주부들의 경제활동 참여가 늘고 있음을 유추할 만하다.

맞벌이가 많은 20~30대에 비해 이 연령층에서는 전업주부들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또 방문판매 기업들은 고학력 주부들의 취업으로 불황에 실적이 개선된다는 속설이 있다. 불황으로 가계수입이 감소하면 그동안 집에 있던 주부들이 취업이 쉬운 방문 판매업체로 유입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웅진코웨이, 태평양, 한국야쿠르트, 웅진씽크빅 등 방문판매를 하는 업체들이 1997년 외환위기 때는 물론 올해에도 선전하고 있다. 웅진씽크빅의 최봉수 사장은 올 초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올해가 불황이라고 하지만 틀림없이 웅진씽크빅은 매출이 늘어날 것”이라고 장담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상반기 기준으로 웅진씽크빅 매출은 전년 대비 5.4% 늘었다).

방문판매 업체의 한 영업담당자는 “방문판매 영업은 기존에 직장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신규 실적이 좋다”고 설명했다.

여전히 개인적 친분이 중요한 방문판매업의 특성상 전업주부들은 직장생활을 한 경험이 없어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하기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주부들이 밖으로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가계 소득의 감소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는 1997년 IMF 외환위기보다 규모나 강도가 약했지만 가계 소득에는 적지 않은 감소가 있었다. 대부분의 기업이 비상경영을 이유로 임금동결 및 삭감, 상여금 축소, 임금 자진 반납 등을 실시했다.

특히 올봄까지 일자리 나누기 대책으로 거의 모든 공기업과 대기업에서 기존 직원의 임금을 동결하거나 삭감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는 강모(41)씨는 “매년 연초와 연중에 두 차례 월급의 300%씩 나오던 상여금이 올 초에는 100%밖에 안 나왔다”고 푸념했다.

강씨는 “하반기에는 그마저도 안 나올 것 같은 분위기라 직원들이 뒤숭숭하다”고 말했다. 강씨의 경우 상여금이 100%밖에 안 나오면 연봉 기준으로 1000만원 이상 깎이는 셈이 된다. 대기업 부장으로 있는 권모(45)씨도 “회사에서 연초에 ‘올해는 상여금을 지급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했다”면서 “그렇게 되면 허울만 대기업이지 실제 급여는 중소기업 정도밖에 안 된다”고 열을 올렸다.

이처럼 교육비를 비롯해 지출액이 많은 40대 가장들은 지난해 하반기 불어닥친 금융위기와 이에 따른 비상경영으로 직접적인 타격을 입고 있다. 앞서 말한 권씨는 “올 초부터 집사람이 근처 마트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씁쓸해 했다.

실제 도시근로자가구 실질소득을 보면 2008년 3분기에는 맞벌이 가구가 438만원, 비맞벌이 가구가 319만원이던 것이 올해 2분기에는 각각 393만원과 290만원으로 큰 폭으로 감소했다.



남편이 강요하는 주부 취업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 8월 500대 상장사의 비상경영 조치를 조사한 결과(중복응답)에 따르면 경비절감(79.8%)이 가장 컸고, 임금동결·삭감(57.7%), 복리후생 축소(27.5%), 설비투자 동결·축소(27.3%), 신규채용 동결·축소(25.7%) 등이 그 뒤를 이었다. 1~3위가 사실상 가계 소득 감소로 이어지는 조치들이다.

물론 더 극적인 경우는 남편들의 실직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 6월 전국 100인 이상 사업장 1000개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대상 기업의 20.1%가 ‘정규직 구조조정을 했다’고 답했다. 사업장 규모별로는 500∼999인 기업이 27.3%, 1000인 이상 기업이 23.2%에 달했다.

외환위기 때처럼 광범위하지는 않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까지 모든 기업이 구조조정이나 신규채용 중단 등 군살빼기에 들어갔다. 이는 실업률의 증가와 실업급여 수급자의 증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2006년 23만 명 수준, 2007년에는 26만 명 수준, 2008년 29만 명 수준이던 실업급여 수급자는 2009년에는 40만 명을 넘어섰다.

경기도 분당에 사는 주부 김모(38)씨도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휴대전화 부품회사에 이사로 다니던 남편이 지난해 말 갑자기 실직하게 됐다. 결혼 초 미혼일 때 다니던 직장을 잠깐 다닌 것을 제외하곤 12년간 가정주부로 지내던 김씨는 올해 3월부터 인근에 있는 초등학생 대상 보습학원 교사로 다니고 있다.

“그나마도 친구가 그 학원 원장이라 취직이 가능했다”는 김씨는 “박봉에 자존심도 상하지만 당장 애들 교육비나 아파트 대출이자 등 해결해야 할 게 많아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남편이 다시 취직자리를 알아보고 있지 않느냐?”는 말에 “아는 선후배도 만나고 이곳저곳 알아보는데 통 뽑는 데가 없는지 별로 성과가 없다”고 한숨지었다.

이처럼 40대 남편들의 직장생활이 점점 각박해지고, 임금도 더 이상 과거처럼 일률적으로 오르는 구조에서 벗어나면서 자녀교육과 살림에 전념했던 주부들이 밖으로 나오는 추세다.

이런 경향은 비단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경기침체로 가계 소득이 감소하면서 일을 그만둔 지 꽤 오래된 고학력 주부들 중 직장을 구하는 사례가 계속 늘고 있다고 지난 9월 19일 보도했다.

한국보다 더 심각한 타격을 입은 미국에서는 자녀를 키우기 위해 직장을 떠났던 고학력 가정주부들도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서고 있다. 남편의 해고와 자산가치 하락으로 전업주부들이 적극적으로 취업전선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배우자와 함께 사는 대졸 학력 25~44세 여성 중 일을 하고 있거나 일자리를 찾는 사람의 비중은 올 상반기 78.4%로 2007년 동기의 76%에 비해 높아졌다.

이는 경기침체기에 실직자가 늘어나면서 구직을 단념하는 사람도 증가하기 때문에 취업자나 취업을 하려는 사람의 비중이 하락하는 것에 비해 대조적인 현상이다. 이 기간에 같은 연령대의 남성 중 일을 하고 있거나 일자리를 찾고 있는 사람의 비중은 97.4%에서 97.1%로 떨어졌다.

신문은 캘리포니아 헤이스팅스대의 조앤 윌리엄스 워크라이프센터 소장의 말을 인용, “경기침체 이후 해고된 사람들의 78%가 남성이기 때문에 남편 혼자 벌이를 하던 가정은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다”며 “이로 인해 그동안 일을 하지 않던 주부들도 일을 찾도록 내몰리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많은 주부가 남편들에 의해 직장생활을 권유 받고 있다. 대기업 광고회사에 다니는 김모씨는 몇 해 전부터 전업주부로 전환하려는 아내를 적극 말리고 있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어섰고, 내 집도 있지만 김씨는 “아내가 이따금 ‘회사생활이 힘들다’며 ‘그만두고 싶다’고 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말했다.

그는 “수입이 절반으로 준다는 생각을 하면 어떻게 생활할지 막막하다”며 “주변에서 혼자 버는 가정들이 신기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김씨의 아내는 수년 전부터 누적된 피로감과 회사생활에서의 스트레스, 자녀 교육 문제 등으로 직장을 그만둘 것을 고려하고 있지만 그때마다 김씨는 교육비, 대출금과 이자, 아내의 능력 등을 이유로 직장생활을 권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안 오르는 것은 남편 봉급과 아이들 성적뿐남자들이 이처럼 맞벌이를 원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혼자 버는 ‘외벌이’ 가장들은 이런 경제적 위기에 특히 심리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지난해 11월 기혼 직장인 94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외벌이 직장인 371명의 경기불황 체감도(5점 척도)는 4.4점인 반면 맞벌이 직장인 572명의 경기불황 체감도는 3.8점으로 나타났다.

외벌이 직장인의 95.4%는 경기불황이 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영향 정도에 대해서는 ‘소비지출을 상당부분 줄여야 하는 정도’라는 대답이 59.4%로 많았고, ‘가계를 꾸려 나가기 매우 힘든 정도’(24.4%), ‘과소비만 억제하면 괜찮은 정도’(16.2%)가 뒤를 이었다.

적자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절반이 넘는 50.3%가 ‘매번 적자’라고 응답했다. ‘가끔씩 적자’는 29.8%, ‘적자도 흑자도 아니다’ 10.2%, ‘아직까지는 흑자’는 9.7%였다. 이런 세태를 아는지 한 구직사이트에서 미혼남녀 91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결혼 후 맞벌이’에 대해서는 남학생의 95.8%가 찬성해 여학생 87.3%의 찬성률을 넘어섰다.

젊은이들과 달리 뒤늦게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안 전업주부들이 경제위기를 기화로 직업전선에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집값은 오르고, 살 것과 갈 곳도 많아지고 있다. 애들 교육비도 오르고, 노후 준비금도 많아지고 있다.

오르지 않는 것은 남편의 월급과 아이의 성적뿐이라는 농담을 시원하게 웃고만 넘길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 경제위기가 닥쳐왔고 주부들은 불황으로부터 가정을 지키기 위해 밖으로 나오고 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현대차, ‘2025년 미래모빌리티학교’ 참가 모집

2에드워드 리, 두부 이어 두유도…매일유업 앰서버더 꿰찼다

3전세사기 피해자 938명 추가 인정…누적 2만 4668명

4맘스터치 ‘리로케이션’ 지원 뭐길래…“평균 매출 265% 증가”

5“최대 80% 할인”…무신사, ‘무진장 24 겨울 블랙프라이데이’ 시작

6‘2024 친환경건설산업대상’ 국토부 장관상에 GS건설…총 9개 사 수상 영예

7“韓 제조업, AI로 변한다”...AI 국가 경쟁력까지 향상 효과

8나쵸와 만난 뿌링클...bhc, 새로운 사이드 메뉴 출시

9대상, ‘GWP AWARDS 2024’…동반성장 ‘같이의 가치’ 실현

실시간 뉴스

1현대차, ‘2025년 미래모빌리티학교’ 참가 모집

2에드워드 리, 두부 이어 두유도…매일유업 앰서버더 꿰찼다

3전세사기 피해자 938명 추가 인정…누적 2만 4668명

4맘스터치 ‘리로케이션’ 지원 뭐길래…“평균 매출 265% 증가”

5“최대 80% 할인”…무신사, ‘무진장 24 겨울 블랙프라이데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