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사정 한파 어디까지 가나?
대기업 사정 한파 어디까지 가나?
검찰, 경찰,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의 대기업 압박이 예상보다 길고, 넓고, 깊게 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9월부터 본격화한 국내 대기업에 대한 사정당국과 경쟁당국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소강상태로 들어간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지만 “더 큰 건이 터질 것” “몇몇 오너는 법정에 설 것”이라는 얘기가 여전히 돌고 있다. 이미 국내 30대 대표기업 상당수가 어떤 혐의로든 당국의 레이더망에 들어와 있는 상태다.
이쯤 되면, 전경련이나 경총 등 재계 단체에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기업 수사를 자제해달라’는 식의 성명서가 나올 법한데 침묵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사정의 출발점으로 본다. 당시 이 대통령이 기업 토착 비리 척결 의지를 천명했다.
이후 9월 대한통운 횡령 사건을 시작으로 SK건설, 두산인프라코어, 태광그룹, 삼성테크윈 등이 검찰 수사선상에 이름을 올렸다. 최근에는 H그룹 비자금 수사가 시작됐다는 얘기도 들린다. 여기에 경찰과 공정위, 국세청이 따로 때론 공조하며 대기업에 대한 파상적인 공세를 펴고 있다. 9월 이후 언론에 오르내린 대기업과 그 계열사만 대략 30곳이 넘는다. 숫자는 더 늘어날 조짐이다.
검찰 “묵혀놨던 재고를 터는 것”검찰은 “범죄가 있으면 다 수사하는 것 아니냐”며 “기업 수사에 집중한다기보다 비리·부패 범죄 척결로 봐 달라(김준규 검찰총장)”는 입장이다. 국세청은 “정기적인 세무조사(채경수 서울지방국세청장)”라고 하고, 공정위는 “하던 일을 할 뿐(공정위 고위 관계자)”이라는 입장이다.
재계가 침묵하는 이유는 또 있다. 조석래 전경련 회장의 효성, 이수영 경총 회장의 OCI(옛 동양제철화학)가 검찰 수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1년 넘게 검찰 수사를 받아온 효성은 최근 오너의 해외 부동산 불법취득설, 하이닉스 인수 특혜 의혹 등이 연이어 터져 나오면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조석래 회장은 지난 4월 검찰에 소환됐던 것으로 최근 확인됐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올해 120명이 넘는 효성 임직원이 소환 조사를 받고 45명에 대한 계좌추적이 있었다고 한다. OCI는 지난 6일 주식 부당거래 혐의와 관련,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 1부로부터 본사 압수수색을 받았다.
이와 관련, 전경련은 9월 말 내부적으로 검찰 수사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한 회의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공식적인 입장은 발표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할 말이 없는 상태다. 그렇다 해도, 일거에 대형 대기업 사건이 줄줄이 터져 나오는 것에 대해 재계는 불안하고 불만스러워한다. 재계의 해석은 대략 이렇다.
‘정부의 투자 요구에 기업이 응대하지 않은 결과다’ ‘출구전략을 준비하는 정부 입장에서 기업을 옥죌 필요가 있었다’ ‘정부가 대기업 구조조정을 강하게 요구했는데, 대기업들이 방만히 대응했다’ ‘검찰·국세청·공정위장이 다 물갈이됐는데 새로운 성과물을 내놓을 시기와 맞아떨어진 것 뿐이다’ ‘서민 정책 표방의 일환일 것이다’ ‘세수확보 위해 움직인 것 아니냐’….
하지만 검찰은 “묵혀놨던 재고를 터는 것”이라는 반응이다. 박연차 게이트를 전후로 오랜 수사 공백 때문에 미뤄놨던 개별 사건을 한 번에 처리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정황상 일리는 있다. 최근 CEO가 구속된 대한통운 사건이나 두산인프라코어 납품 비리 혐의에 대한 수사는 검찰이 오래전에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열사인 티브로드가 종합유선방송사업자인 큐릭스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이면 계약과 각종 로비 의혹이 있었다는 혐의로 수사 선상에 올라 있는 태광그룹의 경우는 지난해 말부터 검찰이 만지작거리던 사건이다.
하지만 다른 정황도 있다. 지난해 검찰이 수사관을 총동원해 공기업 비리 정보를 수집했던 것처럼, 올 상반기에는 특수부 관련 수사관들이 대기업 비리 관련 제보를 모으는 데 주력했었기 때문이다.
경찰의 움직임도 분주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 2부가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진 SK건설의 비자금 조성 의혹이나 MBC 일산드라마센터 공사 과정에 불거진 비리 의혹은 경찰이 올봄부터 첩보를 바탕으로 내사를 벌여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경기지방경찰청은 지난 7월 모 대학 교수의 폭로로 불거진 금호건설의 파주 교하신도시 복합커뮤니티센터 수주 로비 의혹과 관련, 8월 본격 수사에 착수해 현재 수사 마무리 과정을 밟고 있다. 부산지방경찰청은 롯데건설의 진해 화전산업단지 입찰 로비 의혹을 캐고 있다.
세정당국인 국세청, 경쟁당국인 공정위의 칼바람도 매섭다. 국세청이 경제 위기를 이유로 1년간 미뤄왔던 정기 세무조사를 지난 8월 착수한 이후 세무조사가 검찰 수사와 공조하는 현상이 이어지면서 재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실례로 국세청이 정기 세무조사를 벌이던 SK건설에 비자금 의혹이 터지면서 9월 말 종료 예정이던 세무조사를 한 달 연장했다.
대우건설 역시 기간이 연장되는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고, 롯데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롯데제과와 롯데쇼핑에 대한 정기 세무조사와 관련, 신격호 회장 일가의 지분이동 조사도 함께 벌인다는 보도가 이어지면서 ‘정기 세무조사’가 마치 ‘특별 세무조사’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더욱이 국세청의 방침에 따라 올해 매출 5000억원 이상 기업 100여 곳이 세무조사 대상으로 정해지면서, 행여 검·경의 수사망과 겹칠 경우를 우려하는 분위기다. 올해 선정된 100여 곳 대기업은 내년 초부터 정기 세무조사에 들어간다. 공정위발 소식도 흉흉하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공정위가 액화석유가스(LPG) 공급 업체들의 가격 담합 혐의를 잡고 1조원 이상의 과징금을 부과하는 내용의 의견서를 전원회의에 제출한 것으로 밝혀지면서다. 과징금 1조원은 공정위 출범 이후 사상 최대 규모다. SK에너지, GS칼텍스, 에스오일, 현대오일뱅크, SK가스, E1 등 6개 업체에 대한 최종 제재는 다음달 4일 전원회의를 통해 결정된다.
떨고 있는 대기업 30여 곳특히 이번 담합 혐의는 관련 업체 중 한 곳이 자진신고할 경우 공정위가 처벌이나 과징금을 감면해주는 ‘리니언시 제도’ 신청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 공정위는 현재 국산 완성차 업체 5개사가 옵션 끼워팔기 방식으로 가격을 올린 혐의와 대형 항공사들이 마일리지 부당 운영, 유류할증료 부당 징수, 저가항공사 배제 등 불공정 행위를 한 혐의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4대강 사업 관련’ 건설사들에 대한 조사도 불가피해졌다. 지난 8일 국정감사에서 이석현 민주당 의원이 4대강 사업에 관한 담합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공정위 조사가 시작되면 현대건설·GS건설·SK건설·삼성물산·포스코건설·대우건설 등 입찰에 낙찰된 기업 대부분이 조사 선상에 오르게 된다.
그렇다면, 칼바람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일각에선 부실 수사 의혹을 받고 있는 효성 사건처럼 최근 잇따라 불거진 대기업 사건이 흐지부지 끝날 경우 기업은 물론 정부에도 역풍이 불 것이라는 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오래갈 것이라는 관측이다.
다른 편에서는 경제 상황을 감안할 때 정부가 기업을 무작정 압박하기는 어렵고, 만약 투자와 협조를 끌어낼 목적이라면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본다.
그만하면 됐다는 것이다. 일부에선 지난 9일 이명박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 방문 때 탑승한 대한항공 특별기에 재계 총수들이 퍼스트클래스석에 대거 동승했고 귀국길엔 맥주파티로 뒤풀이를 해 화제가 된 것을 두고, 한파의 끝을 점치기도 한다. 그래서 재계나 사정당국 관계자, 언론이 공통으로 주목하는 곳이 있다. 바로 MB의 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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