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GSP 출신 “나는 여전히 삼성맨”
퇴사한 GSP
외국인 신분으로 평사원으로 입사해 1년 만에 대리를 달고 2년 만에 과장이 됐다. 3년 차에는 해외법인으로 파견돼 팀장급 업무를 수행했다.
드라마 얘기가 아니다. 연매출 130조원을 눈앞에 둔 한국 최고, 세계 일류라는 삼성전자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국내외 15만6000여 명 임직원 중 180여 명만이 이런 초고속 승진의 혜택을 본다.
삼성전자가 직접 ‘천재급 우수인력’으로 소개한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삼성전자의 글로벌 장학 프로그램(Global Scholarship Pro gram:GSP)은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GSP를 문자 그대로 ‘장학 프로그램’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내부에서는 ‘G’를 글로벌이 아닌 지니어스(genius:천재)로 부른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2000년 시작된 GSP는 마케팅 대상 전략국가의 천재급 우수인력을 선발해 국내 유수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과정(MBA)을 마치게 하고 향후 해외 지사·법인의 핵심 리더로 육성하는 제도”라며 “2004년 이공계 인력으로 확대됐고 지금까지 180여 명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인문계 참가자는 성균관대에서 MBA, 이공계는 서울대에서 석사학위(MS)를 받은 후 삼성전자 본사에서 2년, 모국에 있는 해외법인에서 2년간 의무적으로(전공과 입사 시기에 따라 차이 있음) 근무한다.
삼성전자 전·현직 사원 중 180여 명뿐인 GSP 출신 A씨와 처음 연락이 닿은 것은 지난 10월 중순. A씨는 현재 4년간의 삼성전자 의무 재직기간을 마치고 자국의 한 대형 패션업체에서 전략담당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A씨는 “삼성전자를 개인적인 이유로 관뒀고 지금의 일에 만족한다”며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삼성맨”이라고 유창한 한국어로 답했다.
A씨 요청에 따라 그를 ‘아시아계 GSP 참가자’로 소개한다. 인터뷰는 지난 10월 28일부터 11월 12일까지 전화와 e-메일을 통해 진행됐다.
>> GSP 응모에서 삼성전자 퇴사까지의 일을 소개해 달라.“모국에 있는 삼성 지사에서 삼성전자 인사부 담당자, 교수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GSP에 뽑혔다. 삼성전자가 한국에서 MBA 과정을 마치는 동안 학비, 주거비 외에 800달러씩 월급을 지급했다. 인사부 내부에 우리를 위한 별도의 팀이 있는데 이들과도 정기적으로 만났다. 방학 때는 한국과 모국에서 한 번씩 인턴을 했다. 대부분의 GSP 참가자는 한국어를 전혀 모른다.”
>> 그러면 공용어가 영어인 셈인가?“물론이다. 강의도 100% 영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인사부 전담팀에서 한국어 강좌를 잡아줬다. 졸업하면 간이 인터뷰를 하고 사전에 약속된 부서로 배치된다. 대개 세일즈, 마케팅 부서 특히 해외마케팅이 많다. 나는 한국에서 근무할 때 모국 시장의 세일즈와 마케팅 책임자였다. 입사 1년이 지나 대리가 됐고 2년 후엔 과장이 됐다. 모국의 삼성전자 R&D센터로 가 전략기획담당 매니저로 2년간 더 일했다.”
삼성 “천재급 글로벌 인재 확보전략”삼성전자 관계자는 이에 대해 “글로벌 리더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이지 일반 직원보다 특혜를 주려는 것은 아니지만 우수 인력으로서 그만큼의 역할을 하고 있어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 2년 만에 과장이 된 건 초고속 승진이다. 이런 일들 때문에 한국인 직원과 GSP 출신 직원들 간 긴장관계가 있지는 않았나?“GSP 출신은 전원이 글로벌 엘리트다. 하지만 우리가 ‘삼성맨’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인 직원들과 문제가 있었다면 문화적 차이 때문이겠지만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한국인 동료들이 있을 만큼 좋은 추억이었다.”
>> 그럼 왜 삼성전자를 퇴사했나?“삼성전자가 싫어서 떠난 게 아니다. 좀 더 소비자와 밀착된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다. 지금 내가 맡은 일은 개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다. 동기들은 대부분 삼성에 남았다.”
GSP는 프로그램 지원자들의 수준도 남다르다. 중국의 경우 이공계는 상위 5개 대학 출신자 중 학업성적이 뛰어난 학생들만이 GSP에 지원할 수 있다. 인도는 한국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대학입학 시험에서 15만 명 중 3000등 이내에 들어야 지원 자격이 주어진다. 대부분은 총장이 교육부 장관인 인도 최고 명문 인도공대(Indian Institute of Thechnology:IIT) 출신이다.
2004년 인도의 수능시험에서 전국 97등을 한 수재가 들어와 현재 삼성전자에서 일하고 있다. 다만 이공계 출신 천재급 인력들은 합격해도 과정에 참가하지 않는 비율이 높다. 올해 GSP에 합격한 이공계 참가자 11명 중 6명만이 참가했고, 지난해에도 14명 중 7명이 최종 참가했다.
미국 등의 유명 IT기업들도 신흥시장 우수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수한 인재들이다 보니 삼성전자는 GSP 참가자 면접을 해당국가로 면접관이 출장을 가서 실시해 왔다. 이공계 과정은 서울대에서 3명, 삼성전자에서 2명이 한 조를 이뤄 직접 학생들을 찾아다녔다. 올해부터는 한국에서 화상면접을 본다. MBA 과정을 맡고 있는 성균관대는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 한국에서 4년 동안 생활하고 모국으로 배치됐을 때는 기분이 어땠나?“더 편해야 할 모국 직장생활에 문제가 더 많았다. 특히 해외법인·지사에서는 경력관리(Career Path)가 무척 불투명했다. 모국에서의 내 위치도 경쟁력을 점점 잃어가는 느낌이었다. GSP 출신으로 의무기한이 지나 퇴사하는 사람들이 대개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 당신에게 GSP는 어떤 의미인가?“글로벌 우수 인재를 확보하고 이들을 한국적 환경에서 양성하려는 의도는 무척 독창적이다. 개별 시장마다 해당 국가의 간부 후보생을 배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다. 물론 개선돼야 할 점도 있다. 회사가 좀 더 경험을 쌓으며 하나하나 해결돼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 어떤 부분을 개선해야 하나?“결국 문화적 차이다. GSP 출신 대부분은 학교생활에는 잘 적응하지만 회사생활에는 적응하기 힘들어 한다. 삼성전자는 이 문제를 잘 알고 해법 찾기에 골몰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세계적으로 드문 야심 찬 기획”
>> 삼성전자가 외국인 인재(미국 등 선진국 출신 포함)를 경영에 잘 활용하고 있다고 보나?“삼성전자의 세계화는 다른 선진권 글로벌 기업들과 비교하면 아직은 느린 편이다. 한국어 우선주의와 직장문화의 경직성 때문이다. 삼성전자 내에서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의사소통이 한글로 이뤄지고 있다. 세일즈 부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간관리자급 회의 자료는 모두 한글이다. 부장, 임원급이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도 외국인 직원들에게는 힘든 일이다. 이런 이유들로 삼성전자의 외국인 직원들 보직은 R&D나 일부 세일즈 부서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 GSP 제도 자체를 평가하자면?“세계적으로도 드문, 스케일이 무척 큰 야심 찬 기획이다. 신흥국 시장에서 특정 개인이 능력을 개발하고 경쟁력을 기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GSP는 잘 훈련된 젊은 인재를 해당국 시장에 공급하는 데는 성공했다.”
>> 미국의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연상시킨다는 얘기도 있는데?“운영 주체가 공적기관과 민간기업이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전략시장인 특정 국가에서 (삼성에 남든 아니든) 리더급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적에서는 공통점이 있어 보인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2000년 이후 석사과정을 마친 GSP 참가자 중 80% 이상이 재직 중”이라며 “최근 ‘비전2020’을 발표하고 외국인 비중을 2020년까지 65%로 높이기로 했는데 GSP가 글로벌 인재 양성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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