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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국인 투기천국’ 오명 벗어야”

“한국, ‘외국인 투기천국’ 오명 벗어야”

또 직격탄을 맞았다. 1997년 몰아 닥친 외환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의 처방전을 충실히 따랐음에도 글로벌 금융위기를 피하지 못했다. 한국이 OECD 국가 중 가장 빨리 금융위기를 탈출하고 있지만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무엇을 바꿔야 할까?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경제학) 교수는 “IMF식 처방전이 우리 체질에 맞지 않았다”며 “한국 경제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11월 25일 한국에 잠시 귀국한 신 교수를 일산 자택에서 만났다.

시계추를 1997년으로 돌려보자. 당시 한국 경제가 시름시름 앓았던 원인은 기업 부채였다. 위기를 직감한 외국은행이 국내 기업에 원금상환 압력을 넣자, 불똥이 여기저기로 튀었던 것이다. 자금줄이 막힌 기업들은 국내 은행의 외환을 빌려 외국은행에 상환했고, 외환이 부족해진 국내 은행은 외환보유고에서 돈을 꺼내 기업을 지원했다.

그러다 국가경제가 대외채무 상환불능 상태에 빠졌다는 얘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상황은 이와 다르다. 국내 기업의 부채비율은 97.8%. 1997년 부채비율(393.3%)보다 무려 295.5%포인트 낮은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한국 경제는 금융위기라는 악몽에 또다시 시달리고 있다. 신장섭 교수는 “한국은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위기에 휘말린 격”이라고 잘라 말했다.



>> 한국 경제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 아닙니까?“그렇지 않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한국은 어느 나라 못지않은 기초체력을 가졌습니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 덕분이었죠. 기업 부채비율이 100%가 채 안 된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그렇다고 한국 경제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기부채가 갑자기 증가해 금융위기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수출의존형 국가라는 내재적 한계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문제없는 국가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문제가 다른 나라보다 심각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져보는 게 현명한 태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경제는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외환보유액은 세계 6위에 올라섰고, 재정 건전성도 괜찮았죠.”



“너무 쉽게 들어오고 쉽게 빠진다”


>> 한국이 글로벌 금융위기에 휘말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돈이 너무 쉽게 빠지는 구조가 문제였습니다.”



>> 근거는 무엇입니까?“2007년 9월 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불거지자 외국인 투자자는 한국 주식을 대량으로 팔았습니다. 불과 1년 사이 한국 주식시장에서 60조원을 빼갔죠. 외환보유액의 25%에 이를 정도로 큰 금액입니다. 여기까진 빙산의 일각입니다. 2008년 9월 15일 리먼 파산 후 100여 일 동안 한국에선 총 462억 달러가 유출됩니다.

유출액 중 절반 이상이 외국은행 국내지점에서 빠져나갔죠. 자신들의 부채를 낮추기 위해 한국에서 돈을 빼간 것입니다. 한국으로선 리먼 파산 직전까진 주식시장 자금유출로, 이후엔 외국은행 국내지점들의 자금유출로 타격을 입은 격이죠. 외국인 투자자 사이에서 한국이 현금 인출기로 불린 이유입니다.”



>> 외국은행으로선 ‘원화가치의 추가하락이 확실하기 때문에 뺄 수밖에 없었다’고 반박할 수 있는데요.“물론 그렇죠. 결과를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과정을 보자는 거죠. 외국은행과 외국인 투자자가 한국에서 자금을 쉽게 빼갈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한국의 자본시장이 지나치게 개방돼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국 정부가 수년간 금융허브를 주창한 탓에 자금유출을 통제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작았죠. 한국이 투기꾼의 천국으로 전락한 이유입니다.”



>> 외국인 투자시스템에 구멍이 뚫렸다는 주장입니까?“선진국은 신흥국이 외환위기에 빠지면 이렇게 권고합니다. ‘자본·외환시장을 완전 개방하라! 이것이 글로벌 스탠더드다’고 말입니다. 외환위기 당시 IMF도 우리에게 그랬죠.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우리의 방어시스템이 약해진 겁니다. 자금이 쉽게 들어오고, 쉽게 빠질 수 있는 허약한 구조가 된 거죠. 중남미 국가인 칠레의 경우, 투자한 지 1년 미만의 외국계 자금은 100% 빼갈 수 없습니다. 유출 제한선이 있다는 얘기죠.”



>> 자본시장을 통제하자는 겁니까?“그렇습니다. 자본시장 자유화에 대한 맹신은 버려야 합니다. 중국도 자본통제를 합니다.”



“주식시장 자금공급 기능, 마비상태”




>> 방법은 무엇입니까?“의외로 간단합니다. 외국인 투자자가 시간을 두고 돈을 빼갈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칠레처럼 단기간에 돈을 빼가려면 일부만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대안이죠. 또 환투기를 지금보다 어렵게 만드는 긴급 자본통제 시스템을 도입해야 합니다.”

국내 자본시장은 외환위기 당시 IMF의 요구에 의해 전면 개방됐다. 하지만 대외 신인도를 제고하고, 경제를 살려야 했기 때문에 자본시장 완전개방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현재 한국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보유비율은 30%를 넘는다. 일본 상장기업 주식 가운데 외국계 비중이 18% 안팎인 것을 감안하면 높은 수준이다. 자본시장을 섣불리 통제했다간 외국인 투자자의 이탈이 가속화하고, 그러면 한국 경제가 궁지로 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울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자본시장을 통제하면 외국인 투자자의 심리를 위축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외국인 투자 덕분에 기업이 성장한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전 다르게 봅니다. 투자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직접투자와 포트폴리오 투자죠. 직접투자는 쉽게 말해 공장 짓고, 고용을 창출하는 겁니다. 외국인 투자가 과연 이런 유형이었을까요? 인수합병(M&A)에 치중한 탓에 구조조정 등으로 오히려 고용이 줄지 않았습니까. 포트폴리오 투자도 다를 게 없습니다.

주식투자를 하면 기업으로 돈이 유입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죠. 모두 배당 등에 쓰였습니다. 자기가 투자하고 자기 배만 불린 셈입니다. 외국인 투자비중이 높아진 후 주식시장의 자금 공급기능은 오히려 하락했다고 봅니다.”

주식시장이 발전하면 자금공급 기능 역시 좋아질 것이라는 전망은 빗나간 지 오래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은 도전적 투자를 삼가고, 주주를 만족시키기 위해 배당을 늘렸다. 외환위기 극복시점(2001년)을 기준으로 전후 5년간 제조업 설비투자율을 비교하면 (후 5년의 투자율이) 8% 이상 떨어졌다.

반대로 현금 유보율은 높아졌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10대 그룹의 현금 유보율은 1000%에 가깝다. 2003년(500.6%)보다 2배가량 많아졌다. 기업들이 과감한 투자보단 돈을 쟁여놓는 데 급급했다는 것이다.



>> IMF 프로그램이 결과적으로 한국 경제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지적입니까?“기초체력이 좋아졌을지는 몰라도 투자 및 외환관리 관점에선 악화됐다고 봅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국제 투자자 또는 투기꾼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스템으로 전락했죠. 생각해 보십시오. 국제 투자자에게 좋은 게 어떻게 금융위기에 빠진 국가에도 좋단 말입니까. 투기꾼과 투기대상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다는 얘긴데 어불성설이죠.”



>> 한국 경제가 또다시 금융위기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선 어떤 조치가 필요합니까? 많은 경제 전문가가 단기 외채를 규제하고 외환보유액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두 가지 대안 모두 미봉책일 뿐입니다. 단기 외채 비율이 낮다고 금융위기를 피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2008년 말 브라질과 러시아의 단기 외채 비율은 13.9%, 16.5%에 불과했지만 혹독한 외환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반면 금융 효율성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싱가포르의 비율은 73.3%에 이르죠. 외환보유액을 늘려도 결과는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 부족하지 않은 외환보유액은 금융위기의 튼튼한 방어막이지 않습니까?“꼭 그렇다고 볼 순 없죠. 금융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인 단기외채 대비 외환보유액을 봅시다. 2008년 말 한국은 75%였습니다. 단기 외채를 모두 상환해도 외환보유액이 4분의 1 정도 남는 수준이었죠. 브라질과 러시아의 비율은 각각 18.7%, 18.8%에 불과했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세 나라 모두 금융위기에 휘말렸습니다. 반면 스페인, 벨기에의 비율은 3416%, 6163%에 달했지만 금융위기에 얽히지 않았습니다. 외환보유액을 늘리는 게 상책이 아니라는 방증입니다.”



“한국 경제 패러다임 근본적으로 바꿔야”

>신 교수는 외환보유액을 제 아무리 늘리고, 단기 외채를 줄여도 금융위기에 주기적으로 휘말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한국 경제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무엇을 바꿔야 합니까?“앞서 설명했듯 자본 유출입을 통제해야 합니다. 아울러 환율시스템 역시 정비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의 환율시스템은 완전자유 변동형이다. 이는 환율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으로, 시장이 결정한다. IMF 권고에 따라 바뀐 제도다. 신 교수는 “이 시스템은 한국 경제 수준에 맞지 않다”고 했다. 환율 제도에 메스를 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독특한 논리가 숨어 있다. ‘투기 몸통론’이다.

“연구자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환율을 계산할 때 대부분 실물지표를 활용합니다. 가령 경제연구소에서 ‘원-달러 적정 환율은 얼마’라고 밝힐 때, 무역거래량·경상수지 등 실물지표를 고려하죠. 그러나 환율은 이런 지표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단기차익을 노리는 투기적 거래에 따라 환율이 결정되죠. 이를 잡지 못하면 환율은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외환거래량은 연 800조 달러에 이른다. 반면 세계 상품 교역량(서비스 교역 포함)은 외환거래량의 3% 수준인 24조 달러다. 신 교수가 ‘외환거래액의 3%만 실물과 연결되고, 나머지 97% 이상은 단기차익을 노리는 투기적 거래’라고 주장하는 근거다.

그는 “우리는 아직도 실물이 외환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며 “3%가 어떻게 97%를 통제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환율을 쥐락펴락하는 몸통은 실물이 아니라 투기적 거래라는 얘기다. 이것이 바로 투기 몸통론이다.



>> 실물경제가 투기적 외환거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런 투기를 막을 수 있는 환율 제도를 갖추자는 겁니까?“그렇습니다.”



“글로벌 경제 새 화두는 재규제”



>> 그럼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말인데, 홍콩처럼 고정환율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입니까?
“아닙니다. 제조업 중심인 우리나라에서 고정환율제는 어렵습니다. 아르헨티나도 이 제도를 실험하다가 경기침체가 극심해지자 포기했죠.”



>> 바스킷 방식(용어설명 참조)을 택하자는 거군요.“맞습니다. 싱가포르의 바스킷 방식을 검토해야 합니다. 외환시장이 아니라 정부가 환율 결정의 주도권을 쥐자는 이야기죠. 바스킷 방식을 취하고 있는 말레이시아·태국·대만·싱가포르는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의 피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공교롭게도 금융위기 여파로 극심한 경기침체에 시달리는 러시아·브라질·영국·동유럽 국가는 모두 완전자유 환율변동제입니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 우리나라처럼 수출 중심 국가에서 바스킷 방식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한국은 1980년대 바스킷 방식을 썼습니다. 무역흑자가 대단했죠.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경제에 바스킷 방식이 적절한지를 두곤 의견이 엇갈린다. 김석동 농협경제연구소 대표는 “바스킷 방식에선 우리의 통화가치를 다른 나라 환율에 맞추기 때문에 환율과 시장의 연결고리가 사라진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완전자유변동 환율제에서 원화가치가 고평가되면 수출이 줄고 수입이 늘어나 원화가 제자리를 찾지만 바스킷 방식에선 달러 수요가 계속되기 때문에 외환보유액을 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바스킷 방식은 투명성과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고 전제한 뒤 “이는 위안화 가치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실랑이에서 잘 드러난다”고 말했다.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 초 바스킷 방식이 폐지되고 시장평균환율제(변동폭 제한이 있다는 점에서 완전자유 변동환율제와 다름)가 도입된 것은 미국의 통상압력 탓이었다.



>> 정부가 환율을 통제하면 통상 압력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제도를 도입할 땐 우리 사정을 먼저 고려해야 합니다. 바스킷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은 시장에 내준 환율 주도권을 정부가 찾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죠. 명분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글로벌 경제의 요즘 화두는 재규제입니다. 은행원 급여를 정부가 통제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세상입니다. 환율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시대적 흐름을 따르는 겁니다. 환투기가 국가경제를 뒤흔들고 있는데, 이를 정부가 나서서 규제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신 교수에 따르면 한국 경제는 괜찮은 기초체력을 갖췄음에도 외풍(外風)을 견디지 못하고 금융위기에 휘말렸다. 외풍은 한국 경제를 제3, 제4의 외환위기에 번번이 빠뜨릴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외풍을 차단하는 벽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자본 유출입과 환율을 정부가 통제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벽을 세우면 더 큰 외풍이 몰아칠 수 있다. 통상압력이 가해지고, 외국인 투자자가 한국을 줄줄이 빠져나갈지 모른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신 교수가 남긴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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