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백화제방시대
경제학 백화제방시대
경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감성적인 부류가 아니다. 경제에는 시적인 탐구자보다 더 엄숙한 정장 차림의 수학 영재가 더 많이 몰린다. 그러나 1월 초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국경제협회(AEA) 연례회의에선 수학적 분석보다 자기반성이 더 많았다. 최고로 저명한 경제학 사상가 수백 명이 참석해 정확히 어떻게 해서 상황인식을 그렇게 그르치게 됐는지를 따지는 패널 토론 광경을 지켜보았다.
왜 대부분의 세계 일류 경제학자가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는가? 대학의 경제학 교육을 완전히 재검토해야 하는가? 예전의 AEA에는 유진 파마 같은 보수적이고 금융지향적인 지식인이 주요 토론자로 참석했지만 올해의 회의에는 진보적 현실주의자가 주류를 이뤘다. 폴 크루그먼, 로버트 실러, 그리고 회의의 최고 스타인 노벨상 수상자 조셉 스티글리츠 등이다.
스티글리츠는 기조연설에서 시장을 신뢰해도 좋다는 경제학의 핵심 이념을 마구 난도질했다. “시장은 효율적이지 않고 자동조정 능력도 없었으며 지금은 사회의 모든 부문에 수조 달러의 막대한 비용부담을 떠안기고 있다.” 이번 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릴 세계경제포럼(WEF)에서도 그런 고민은 계속된다.
지난해 다보스에서는 세계를 벼랑 끝에서 구해낼 방법에 토론의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올해의 핵심 주제는 경제학 본연의 위기가 될 듯하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경제학의 모든 대전제가 다시 도마에 오른다. 성장을 어떻게 유발하나? 고용을 어떻게 늘리나? 부를 어떻게 골고루 확산시키나?
적어도 레이건 정부 이후로 경제의 파이를 키우기만 하면 되며 그러려면 시장과 투자자들의 족쇄를 풀어준 뒤 뒤로 물러나 지켜보는 방법이 상책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하면 부와 건강, 행복 등 모든 좋은 일이 결국에는 모든 이에게 확산된다는 사고다. 지금은 이런 견해의 오류가 드러나면서 다수의 새로운 이론이 그 자리를 대신하려고 각축을 벌인다.
모두 사람은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며 시장이 항상 효율적이지는 않다는 사고에 어느 정도는 바탕을 둔다. 그리고 많은 경우 새로운 이론들은 경제학에 완전히 다른 학문을 접목한다. 예컨대 적응시장 가설(adaptive-markets hypothesis)은 진화생물학의 프리즘을 통해서 경제 특히 금융시장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발상은 간단하다. 경제와 금융시장을 다른 ‘종(헤지 펀드, 투자은행)’들이 ‘천연자원(이익)’을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생태계로 인식하는 방법이다. 이 종들은 서로에게 적응해 가지만 갑작스런 돌연변이(위기)를 겪기도 하면서 생태계의 구성을 크게 바꿔놓는다. 이 이론에 따르면 세포생물학이 새로운 통합 경제이론의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
래리 서머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의장 같은 정책결정자가 모든 시장 참여자를 살아 있는 유기체의 일부로 간주함으로써 더 나은 정책 수립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2004년 처음 등장했지만 금융위기 이후 주목 받기 시작한 이 이론은 요즘 각국의 경제매체에 한창 소개되며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외환시장 동향을 설명하는 데 응용되기도 했다.
애덤 스미스에 다윈을 접목한다는 발상이 경제학 최고 석학 다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경제학자보다 세포생물학자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고 위기를 예측한 소수 학자 중 한 명인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가 말했다. 이목이 집중되는 또 다른 혼성 분야는 두뇌과학과 경제학을 결합한 신경경제학이다.
과학자들이 피험자의 두뇌활동 패턴을 도표로 나타내서 경제적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파악하려는 취지다. 이들의 연구는 더 친숙한 행동경제학 분야의 과학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이 이론은 실제 사람의 불완전한 경제적 의사결정을 설명하려 한다(가령 더 ‘값싼’ 휘발유를 넣으려고 더 멀리 차를 몰고 가서 돈을 낭비하는 경우).
30년 전에 나온 이론이지만 최근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낳았다(‘괴짜 경제학’ ‘상식 밖의 경제학’ ‘넛지’ 등).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 보수파까지 포함한 경제학자들이 훨씬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오바마 정부 들어서 정책에 현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런 유의 발상전환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때는 대공황 이후였다.
그전까지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를 완벽하게 자동조절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간주했지만 그 이론은 대공황으로 뒤집혔다. 그때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등장해서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경제를 구제할 수 있고 구제해야 할지를 열거했다. 하지만 케인스 경제학은 1970년대 오일쇼크와 정치불안이 고인플레와 실업을 낳자 힘을 잃었다.
케인스 이론은 이런 현상을 설명하지 못했다. 주류 경제이론의 교체가 마무리된 시기는 로널드 레이건 정권이 들어서 부자의 족쇄를 풀어주고 FRB 의장 자리가 ‘인플레이션 파이터’ 폴 볼커에게서 자유시장 옹호론자 앨런 그린스펀으로 넘어갔을 때였다. 자유방임적 ‘시카고 학파’ 경제학(밀턴 프리드먼 시카고대 교수가 원조)은 그 뒤 30년 동안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그런 흐름은 빌 클린턴의 민주당 정부 아래서도 바뀌지 않았다. “[클린턴의 선거전략가] 제임스 카빌이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채권시장으로 환생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로버트 루빈 [당시 재무장관] 일파가 로버트 라이시[당시 노동장관]가 이끄는 사회민주당 파벌을 누르기 시작했을 때 두어 차례 중요한 순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조지 소로스 아래서 펀드 매니저로 일했으며 지금은 뉴욕에 있는 루스벨트 연구소에서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로버트 존슨이 말했다.
금융 경제학자들은 주식과 관련된 정보는 이미 주가에 모두 반영됐다고 가정하는 복잡한 모델을 구축했다. 통화, 첨단기술주, 신흥시장에 거품이 끼었다가 터졌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비교적 무해하다고 간주됐다. 거품이 터졌을 때 통화정책을 완화해서 파티가 다시 계속되도록 하는 일은 중앙은행의 담당이었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시장은 효율적이라는 가정이 핵심을 이뤘기 때문에 리스크 우려는 어떻게 하면 호황을 지속하게 하느냐는 고민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간단하고 고상한 시각이었지만 노벨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의 말마따나 그 아래서는 진실이 아름다움에 가려졌다. 신경제학은 이미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1986년 시장은 실제로 그렇게 효율적이지 않다는(당시엔 이단이었다) 주장으로 노벨상을 받은 스티글리츠는 현재 세계 각국을 돌면서 금융 시스템의 구조조정 방법과 관련된 조언을 해주기에 여념이 없다. 이런 면에서 필시 가장 앞서간 나라는 영국이다. 거품이 한창일 때 런던 금융시장 시티는 월스트리트보다 아마 더 자유분방했다.
현재 잉글랜드 은행의 머빈 킹 총재는 ‘대마불사’로 불렸던 은행들을 분할하고자 하며 구제금융의 ‘도덕적 해이’ 문제와 관련해 우려를 표명한다. 어데어 터너 금융감독청장 또한 영국의 금융산업이 너무 비대하다고 말하면서 금융혁신상품을 규제하고자 한다.
그는 금융가 출신으로 지금은 런던정경대에 연구소를 설립한 뒤 수백만 달러를 쏟아 붓는 폴 울리의 열렬한 팬이다(자본시장 역기능 연구소라는 이름이 그 성격을 모두 설명해준다). 어찌 보면 런던 금융시장은 리스크 우려와 이익추구가 균형을 이뤘던 영국의 옛날 금융시대로 복귀하는 중이다.
미국의 경우 오바마 대통령이 규제 책임자로 새로 임명한 캐스 선스타인은 행동 경제학자다. 오바마 정부는 행동 이론을 바탕으로 경기부양책 같은 정책의 골격을 잡았으며 오바마가 추상적인 모델보다 실질적인 데이터에 기초해야 한다고 강조한 걸 볼 때 금융규제를 새로 마련할 때도 이를 참고할 가능성이 크다.
담배, 트랜스지방 과다 식품, 오염과다 에너지 사용을 억제하는 세금 신설 움직임에도 행동경제학이 바탕을 이룬다. “40세 이하인 사람은 행동경제학을 급진적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선스타인과 함께 넛지를 공동 저술한 리처드 테일러가 말했다. 경제학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스타 중 다수가 현재 행동과학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이론이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듯하다.
그렇다고 시카고 학파의 이론들이 유용하지 않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비합리성도 수학적 모델을 확립해서 연구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예전처럼 확고하게 주도권을 차지하지는 못할 듯하다. 앞으로 어떤 학파가 정상에 오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뉴딜 정책이 1933년에 시작됐지만 케인스가 경제학 일반론을 저술한 시기는 1936년 이후였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거창한 통합 경제이론을 찾는 사람들은 이번 불황의 최대 교훈은 어쩌면 단 하나의 간단명료한 이론에 기대어 복잡한 인간세계를 모조리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효율적 시장 가설이 100% 옳지 않다는 점은 알지만 다른 이론도 모두 마찬가지”라고 테일러가 말했다.
AEA 회의에서 유일하게 의견 일치된 견해는 경제학이 앞으로 어렵지만 잠재적으로 아주 생산적인 성찰과 이화수분(異花受粉)의 기간을 거치리라는 점이었다. 그 최종 결과물은 전보다 더 정확하면서 덜 합리적일 가능성이 크다.
With BARRETT SHERIDAN in New York and STEFAN THEIL in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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