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거품 우려 낮아 아직 괜찮다
물가·거품 우려 낮아 아직 괜찮다
임기가 한 달여 남은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오는 3월 마지막으로 금융통화위원회(이하 금통위)를 주재한다. 금통위는 정책금리(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곳이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금통위는 최근까지 12개월 연속 기준금리를 2%로 동결했다. 이 총재는 고민이 많을 것이다.
‘금리를 올려야 하나?’ 압박은 상당하다. 여기저기서 금리 인상 주장이 불을 뿜는다. 이 총재 역시 최근 국회에 출석해 “금리인상이 멀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금리는 내리는 것보다 올리기가 더 어렵다. 빚이 많은 가계와 기업에 이자 부담을 늘리기 때문이다. 지금은 더 그렇다. 임박한 지방선거는 차치하고라도 금리 인상은 곧 출구전략의 시행이다. 지금이 출구로 나갈 때인가?
한은 목표 내에서 움직이는 물가출구전략은 경제위기 때 정부가 취한 비상 조치를 거둬들이는 것이다. 시중 유동성을 회수하고, 가계와 기업에 각종 혜택을 줄이면서 재정은 긴축해 나가는 방법을 쓴다. 금리를 올려 시중에 풀린 돈의 양을 줄이는 것은 출구전략의 핵심이다. 출구전략은 ‘시점’이 중요하다.
문제는 이 시점을 잡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 늦으면 풀린 돈이 빠르게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거품을 일으킨다. 거품은 꺼지게 마련이다. 반대로 성급하면 경기회복의 불씨를 꺼뜨려 경제를 다시 침체에 빠뜨릴 수 있다. 일본은 출구전략 시행 시점을 성급히 또는 뒤늦게 판단해 경제를 망친 경험을 모두 갖고 있다.
일본은 1987년 2월부터 2년 넘게 사상 최저 금리(2.5%)를 유지했다. 경제는 1987년 말부터 고성장을 달렸다. 하지만 경기가 다시 침체에 빠질 것을 우려한 일본 중앙은행은 금리 인상을 주저했다. 이 사이 증시와 부동산에 거품이 잔뜩 끼였다. 일본은행은 1989년 4월 한 번 금리를 올렸지만 뒤늦은 대응이었다.
버블은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됐다. 우리 고민도 다르지 않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회복을 보인 한국경제에 출구전략은 향후 경기회복 지속과 경제성장을 좌우하는 중요 변수다. 문제는 검증되지 않고 타당하지도 않은 주장이 일찌감치 제기돼 왔다는 것이다.
지난여름부터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7월 하순 금리 인상을 앞당길 필요가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이때를 전후로 출구전략 논의가 달아올랐다. 총재를 비롯한 한은 관계자들도 ‘저금리 기조’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재정기획부는 ‘시기상조’라고 맞섰다. 금리를 올려 출구로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주장의 배경에는 인플레이션과 자산 버블 우려가 깔려 있다.
일반적으로 재정·통화 확대 정책이 오래가면 물가가 꿈틀대고 자산시장이 들썩이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론상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 현실을 보자. 먼저 물가 문제. 통화당국이 화폐를 풀었지만 물가는 지난해 내내 안정세를 유지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유가가 오르고는 있지만 환율 하락 추세로 어느 정도 상쇄된다. 통화량이 늘었다지만 물가와 연관관계가 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고용사정과 실업률, 가계소득 증가율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근본적인 문제에서도 인플레이션은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지난 수년간 중국을 필두로 한 신흥경제국에서 공급되는 값싼 물건은 세계 각국 중앙은행 총재의 물가 걱정을 덜어줬다.
대출 규제로 자산 버블 우려 작아
또한 세계 각국이 출구전략에 미온적인 마당에 세계경제가 완연한 회복세로 간다고 해서 수요 급증이 물가를 끌어올릴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일각에서는 지난 1월 생활물가지수가 전년 동월 대비 3.8% 오른 것을 금리를 올려야 할 신호라고 주장한다.
사과상자에서 꺼낸 사과 하나가 상처 났다고 사과가 다 썩었다고 말하는 격이다. 지난해 1월 물가는 유가 급락으로 워낙 낮았다. 올 1월 물가가 높아 보이는 이유(기저효과)다. 1월 소비자물가지수는 3.1%. 유가와 농산물을 제외한 근원물가지수는 2.1% 올랐다. 한국은행의 물가안정 목표는 2~4%다.
금리를 서둘러 올려야 한다는 주장의 또 다른 근거는 자산 거품 걱정이다. 뼈아픈 기억이 있다. 2003년으로 가 보자. 당시 카드 사태가 터지면서 경기가 침체하자 한국은행은 7월 금리를 3%대로 내렸다. 3.25~3.75%의 저금리 기조는 2005년 말까지 유지됐다. 결과는 부동산 열풍과 펀드 광풍이었다.
싼 이자로 대출받은 빚이 시중에 넘쳐 버블로 이어졌다(이때에도 물가는 2%대를 유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우선 정부의 대출 규제 효과를 들 수 있다. 참여정부가 집권 말에 도입한 주택담보인정비율(LVT)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이 자산 버블을 적절히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자산에 거품이 일고 결국 터질 때는 부채가 많이 끼여 있을수록 위험하다. 두 가지 규제를 동시에 시행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상대적으로 버블 붕괴 후유증이 약할 수 있는 이유다. 민간이 ‘흥분 상태’가 아니라는 점도 예전과는 다르다. 금리가 사상 최저치인 2%를 1년간이나 유지했지만 자산 시장에 위험 신호는 크지 않다.
가계신용대출과 주택담보대출은 지난해 3분기로 넘어가면서 하락 추세로 돌아섰다. 한은의 ‘1월 중 금융시장 동향’ 자료를 보면 가계대출과 주택담보대출이 모두 감소했다. 완전한 경기회복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가계가 여전히 미래소득과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중반 경기회복 기대감에 가파르게 올랐던 소비자심리지수는 지난해 11월 이후 제자리를 맴돈다.
부동산 시장은 안정세를 유지하고 수도권의 경우 오히려 아파트값이 하락하고 있다. 더욱이 지난해 발생한 주택담보대출 중 절반 가까이는 주택 구입 목적이 아닌 생계형 빚인 것으로 금융당국은 분석하고 있다. 자산시장 거품을 걱정해 금리를 선제로 올려야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설령 올 하반기로 가면서 자산시장 급등 기미가 보인다면 더욱 강력한 대출 규제로 버블 크기를 줄여 가는 정책을 펴면 된다. 물가 안정을 중시해 ‘인플레 파이터’로 불렸던 이성태 총재는 지난 2월 11일 금통위에서 “최소한 현시점은 저금리 통화정책 기조에 따른 부작용이 확대되거나 향후 몇 달 사이에 커질 위험은 크지 않다고 본다”고 밝혔다.
금리 동결의 이유였다. 며칠 후 국회에서 “금리 인상이 그리 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지만 “민간 부문의 자생력으로 어느 정도 굴러간다고 판단이 되면”이라는 전제가 붙었다.
가능성은 열어둬야 한다. 그러나 당장 금리를 올려 두 문제를 선제 대응하기에는 한국경제에 임박한 문제가 너무 많다. 한국경제는 중환자실에서 나와 회복실에 있는 상태다. 정부 재정 집행이 줄면서 경기회복 속도는 둔화되고 있는데 민간은 여전히 힘이 부친다. 퇴원은 아직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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