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고시촌 5만대군 칼을 간다
노량진 고시촌 5만대군 칼을 간다
해마다 고시 응시 인구가 늘고 있다. 이에 따라 고시촌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많아진다. 경쟁이 점차 치열해지면서 수험생활을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고시촌이 합격을 위한 정석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시촌에선 걸어서 5분 거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학원가를 중심으로 대형 마트의 기업형 수퍼마켓(SSM)이나 대형 생활용품점 등이 있다. 사무실 밀집지역과 달리 3000원으로도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3000원이 넘는 커피 메뉴도 찾아보기 힘들다. 객단가가 5000원이 넘는 곳이 드물다. 고시촌에선 밥 먹으면서 스터디를 할 수 있는 소위 ‘밥터디’도 등장했다.
깔끔한 인테리어에 가격이 비싸지 않은 곳이 인기다. 이 밖에 고시생이 스트레스를 풀기 좋은 PC방, 노래방 등 위락시설도 곳곳에 있다. 고시생이 늘면 자연히 이러한 점포 또한 매출이 오르기 마련이다. 대학동 일대의 신림동 고시촌과 노량진1동의 노량진 고시촌이 대표적인 곳이다.
그러나 신림동 고시촌에서 당구장을 운영해온 김모 사장은 고시 열풍이 매출로 이어지지 않아 답답할 노릇이다. “매출을 유지하기 영 쉽지 않아요. 예전엔 신림동 고시촌 중심 거리는 밤 12시가 넘어도 사람이 바글거렸지만 2~3년 전부터 슬슬 인파가 줄었어요. 요즘은 12시가 넘으면 고요하다니까요. 더 이상 호황을 누리던 신림동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법시험 인기 예전 같지 않아
신규 설립은 2008년 12곳, 2009년 11곳에 불과하다. 원룸은 최근 리모델링이 진행되고 있어 크기는 커지고 있으나 가격은 이전과 비슷하다. 전세는 500만원, 월세는 5만원 정도 떨어진 곳도 있다.
신림동 고시촌 주민은 로스쿨 제도가 발표되던 5년 전부터 꾸준히 학생이 감소했다고 생각한다.실제 사법시험 응시자 수를 보면 2007년 1만8114명에서 2009년 1만7972명으로 미세하지만 감소하는 추세가 나타난다. 관악구청 측은 “전국고시원협회에 따르면 5년 전 로스쿨 제도를 발표한 이후 신림동 고시촌 인구가 5만 명에서 2만5000명으로 감소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법시험 준비생은 모두 로스쿨을 준비하기 위해 이를 위한 학원이 많은 강남으로 떠나기라도 한 것일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사법시험의 인기는 다른 고시로 넘어가고 있는 추세다. 2년 전 사법시험을 준비했던 최모(29)씨는 사법시험 대신 노무사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는 “사법시험 대신 시험과목이 비슷한 노무사 시험을 준비한다”며 “합격해 사법연수원에서 경쟁을 통해 판·검사 임용이 안 될 바에야 사법시험보다 전문적인 노무사의 길을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물론 사법시험보다 경쟁률이 낮다는 생각도 했단다.
당구장을 운영하는 김 사장은 “당장 매출이 감소한 것보다 앞으로 신림동 고시촌에서 장기간 거주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장수생’이 점차 사라진다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신림동에는 사법시험 준비생뿐 아니라 행정고시, 외무고시 등 다양한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 있으나 가장 핵심이었던 사법시험 준비생이 줄어드는 것이 신림동 고시촌의 명맥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매출이 30% 줄었다는 백반가게 아주머니는 “구청 차원에서 상권 부활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제안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의 한 공인중개소 관계자는 “신림동 고시촌은 고시생 증가에 따른 유동인구 확대를 기대하는 것보다 신림뉴타운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신림뉴타운에 아파트촌이 들어서면 위락시설이 없으므로 고시촌으로 몰려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고시 열풍은 신림동 고시촌이 아닌 노량진에서 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노량진 고시촌(노량진1동) 인구는 2007년 6월 2만1970명에서 2009년 6월 3만4102명으로 2년간 약 1만2000명 증가했다.
반면 신림동 고시촌(대학동)은 2007년 6월 2만2957명에서 2009년 6월 2만3246명으로 약 300명 증가하는 데 그쳤다. 노량진 고시촌의 수강생 수는 약 5만 명으로 신림동의 2만5000~3만 명에 비하면 훨씬 많다.
어른을 위한 대치동, 노량진
10대에서 3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시험군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수강생이 많거니와 최근 공무원·경찰 시험 선호 현상으로 수강생이 늘고 있다. 이를 가장 반기는 사람은 역시 노량진의 독서실·고시원 관계자들이다.
모 고시원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긴 계속 호황이다. 주변에 재건축 리모델링도 활발하다. 30대 후반도 많이 온다. 특히 시험 전후 4개월 정도는 남는 방이 거의 없다. 고시원 방값은 매년 2만~3만원씩 올랐다. 현재 보통 30만~35만원이다.”
원룸 구하기도 예전보다 힘들어졌다. 한 중개업소 사장의 말이다. “전·월세 가격은 거의 변화가 없다. 원룸을 찾는 손님이 12월엔 하루 50명씩 온다. 입주 시기가 과거보다 2개월 정도 빨라졌다.” 그만큼 시험을 빨리 준비하고 공실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중개업소 사장은 또 “공무원 연령 제한이 폐지되면서 30대 초반도 늘었다”고 말했다.
연말 시즌이 끝난 뒤 찾아가면 방 찾기도 쉽지 않다. 노량진 일대에 포진한 학원 수는 40여 개. 노량진도 이를 중심으로 상권이 활기를 띠고 있다. 이 중 대부분은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 등이 아니라 7·9급 공무원과 경찰, 임용고시, 각종 자격증을 준비하는 곳이다. 7·9급 공무원과 경찰 수험생 늘어 인근 지역 학원에서 노량진에 상담소만 차리는 경우도 있다.
“중·고등학생 대상 학원들이 대치동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큰물을 찾아 노량진에 왔다”는 것이다. 9급 공무원의 경우 지난해 10만1144명이 응시했는데 올해는 14만1347명이 응시원서를 제출했다. 1979년 유명 대형 학원이 이주하면서 형성된 노량진 고시촌은 대입 준비생인 10대부터, 현재는 20대 중반~40대에 이르는 공시족으로 넘쳐난다.
상가뉴스레이다 선종필 대표는 “지금은 입시학원보다 각종 고시와 자격증을 준비하는 대규모 학원가로 변모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이후 남영동 등지에 있던 입시학원들이 이전해 오면서 역세 상권으로서 면모를 갖췄으나 이곳의 유명 강사들이 강남이나 종로로 유출되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다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각종 고시, 자격증, 공무원, 경찰학원 등이 기존 입시학원들과 어우러져 지금에 이른 것이다. 한때는 노량진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곳이라 해 ‘공시촌’이라 불렸지만 시험 합격이 점차 어려워지자 자연스레 ‘고시촌’으로 불리게 됐다. 게다가 노량진은 최근 지하철 9호선이 개통되면서 접근이 원활해졌고 노량진뉴타운 등 호재로 지속적으로 현대화될 수 있었다.
한번 들어가면 합격할 때까지 외부와는 잠시 단절하는 고시촌이지만 역시 교통의 영향력은 크다. 관악구청의 한 관계자는 “신림동 고시촌 또한 보다 다양한 고시생을 끌어들이기 위해 대형 학원을 유치하고자 했으나 대학동이나 서림동 근처에 전철역이 없어서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점포라인 정대홍 과장은 “신림동과 노량진 고시촌을 비교하면 지하철 9호선 개통, 신림동 고시촌의 노후화, 노량진 민자역사 개발 등 노량진 쪽에 우호적인 이슈가 많다”며 “고시원 등에 투자하거나 창업할 때도 노량진에 몰리는 편”이라고 말했다.
취업 도구로서의 고시 열풍
이에 대해 인근에서 노량진 고시촌으로 이전한 대형 경찰공무원 입시학원 관계자는 “안정된 직장을 추구하는 분위기로 각종 고시와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해 공무원 시험의 메카인 노량진으로 이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경기침체로 잠시 주춤할 수는 있어도 노량진이 외환위기 이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촌으로 정비된 만큼 경기침체를 겪으며 취업난이 더 심해지면 노량진 고시촌으로 오는 학생 수는 다시 늘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처럼 노량진의 인기가 오르자 한때 5000만원가량 앞섰던 신림동 고시촌의 점포 평균 시세 및 고시원 매물 시세가 최근엔 역전되는 분위기다.
고시촌 노른자위에 위치한 건물 1층에 60~90㎡ 규모의 카페를 차린다고 가정해 보자. 노량진 고시촌에서는 권리금 3억~6억원, 보증금 1억~3억원, 월 임대료 500만~700만원이 필요하다. 한편 신림동 고시촌의 녹두거리(화랑길)에서는 권리금 1억~2억원, 보증금 5000만~1억원, 월 임대료 200만~300만원이 든다.
신림동과 노량진의 상반된 분위기는 고시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도 관련이 깊다. 한때 고시는 신분 상승의 도구였다. 특히 사법시험 합격은 본인의 영광뿐 아니라 온 마을의 경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엔 ‘사법시험에 합격한들 판·검사 임용에 실패하거나 대형 로펌에 가지 못한다면 불안하긴 마찬가지’라는 의식도 생겨났다. 요즘 불고 있는 고시 열풍에서 고시란 신분 상승의 도구가 아닌 취업의 도구다.
13년간 고시반을 지도해온 이희선 한양대 행정학 교수의 말은 고시가 취업 수단이 된 오늘날의 현상을 잘 반영한다. “옛날엔 학생들이 7급 시험 보라는 얘기가 나오면 기분 나빠했다.
하지만 요즘은 7·9급도 대학생이 부담감 느끼는 시험으로 인식한다. 7·9급도 현실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지만 예전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취업이 어려워 목표가 하향 조정된 측면도 있다.”
그만큼 취업문이 바늘 구멍만큼 좁다는 것이다. 고시 열풍이 부는 이유는 또 있다. 평생직장 문화가 사라졌다. 그래서 많은 학생은 고시 또는 각종 시험에 오랜 시간을 할애해도 괜찮다고 여긴다. 예전엔 ‘모 아니면 도’ 식으로 하다 떨어지면 그만두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계속 매달리는 사례가 많은 까닭이다.
이희선 교수는 “국가 전체적으론 몰라도 개인적으론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이 씁쓸한 현실이 지속되는 동안 노량진의 활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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