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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소 상장보다 내실이 우선

거래소 상장보다 내실이 우선

첫 민간 출신 이사장.
34년 동안 증권업계에서 실무와 경영 내공을 쌓아온 김봉수 이사장이 한국거래소에 온 지 6개월이 지났다.
전임 이사장 사퇴부터 복수 노조까지 바람 잘 날 없었던 거래소에 김 이사장은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개혁의 바람’이다. 거래소의 개혁은 어디까지 왔을까. 6월 26일 고향인 충북 괴산에서 만난 그의 모습에 서면 인터뷰 내용을 더했다.
▎김봉수 1953년 충북 괴산 출생 청주고·고려대 법학 쌍용투자증권(현 신한금융투자) 기획실장 SK증권 자산운용담당 이사 키움증권 사장·부회장 2009년~ 한국거래소 이사장

▎김봉수 1953년 충북 괴산 출생 청주고·고려대 법학 쌍용투자증권(현 신한금융투자) 기획실장 SK증권 자산운용담당 이사 키움증권 사장·부회장 2009년~ 한국거래소 이사장

지난 6월 26일 새벽 6시50분, 비가 주룩주룩 오는 토요일임에도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주차장에 몇 명의 임직원이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평상복보다 조금 더 편안한 차림이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 앞에 트레이닝복에 색이 바랜 티셔츠를 입은 직원도 보였다.
30명이 좀 넘는 임직원이 탄 버스는 빗길을 2시간 정도 달려 충북 괴산군 부흥리에 있는 주말농장에서 시동을 껐다. 저 멀리서 누군가 손을 들어 버스를 맞았다. “왔어?” “아침 먹었어?”라며 직원 한 명 한 명의 등을 토닥거리는 이는 김봉수(57) 한국거래소 이사장이었다.


남색 작업용 바지에 줄무늬 셔츠를 입고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은 김 이사장은 벌써 몇 시간 전 농장에 도착한 듯했다. 일행은 나지막한 대문을 지나 통나무집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저울’이라는 마을 이름을 따 ‘분저울캐빈’이라고 부르는 김 이사장의 주말 쉼터다. 김 이사장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정원 울타리 옆으로 600년 된 느티나무가 늘어져 있는 곳이다. 정원 한쪽에 ‘관혜정’이라 불리는 정자가 있었다.


그는 키움증권 사장 때부터 이곳에서 기른 배추, 무 같은 채소를 지인에게 나눠주곤 했다. 직원들도 데려왔다. 최근엔 금융계 인사들도 휴양을 목적으로 꽤 들른 모양이었다. 거래소 식구를 초청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요즘은 감자철로, 몇 달 전 심은 감자를 수확하려고 날을 잡았다고 했다. 김 이사장의 부인 김영기(52)씨가 감자전, 부추전, 도토리묵 같은 요깃거리를 푸짐하게 내오자 모두 모여 막걸리 한 잔씩을 비웠다. 코스닥시장본부 황성윤 상무 등 주로 임원이었지만 대리, 과장급 사원도 있었다. ‘혹시 강제 동원이 아니냐’고 묻자 직원들은 “강제는커녕 희망자가 많아 선착순으로 받아야 한다”고 웃었다.
가벼운 입가심이 끝나자 직원들은 곧바로 3305㎡(1000평)가 넘는 감자밭에 ‘투입’됐다. 이날 수확한 감자는 모두 직원들의 손에 들려 갔다. 서너 시간 작업했을까. 일을 마친 직원들은 근처 대중목욕탕에서 흙을 닦아낸 뒤 향토 막걸리와 손두부를 늦은 점심으로 먹었다. 이 자리에서 김 이사장은 시종일관 직원들에게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었다.
공기관 경영평가 결과와 라오스 거래소 설립에 관한 이야기가 잠깐 등장했지만 직원들의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농장에서 하루 더 묵겠다는 김 이사장의 배웅을 뒤로하고 서울에 도착한 것이 오후 5시쯤. 직원들은 다음 번 배추 농사를 약속하고 헤어졌다.


취임 직후인 올해 1월 김 이사장은 파격적 인사를 단행해 눈길을 끌었다. “뭔가 다르다”는 기대도 있었지만 “내부 조직의 반발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몇 달 전 기자가 김 이사장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 이사장실 바로 앞에 시위에 쓰이는 피켓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나 함께 땀 흘리는 자리에서 그런 갈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취임한 지 6개월, 김 이사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취임 후 200여 일이 지났다. 소감을 말해 달라.


“아직 성과가 나기엔…, 뭐 한 게 있나(웃음). 취임 당시 한국거래소는 연이은 감사와 따가운 외부 시선 때문에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직원들이 자긍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외부 질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상처를 치유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아야 했다.”

한국거래소에 대해 ‘주어진 일만 하면서 연봉을 많이 받는다’는 부정적 인식이 팽배했다. 지난해 말 전 이사장이 그만두며 “정부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았다”고 밝혀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직원들의 사기가 꺾이고 회사 이미지가 실추됐다는 얘기였다.





-월 14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09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는 B등급을 받았다. 시장에선 생각보다 좋은 결과라고 평가한다. 개인적으로 등급을 매긴다면?


“외부에서 거래소를 두고 ‘신이 내린 직장’ ‘방만 경영’ 같은 안 좋은 이미지와 연관시키더라. 하지만 거래소는 매우 체계적인 경영시스템이 있다. 계획, 집행, 성과, 피드백 같은 업무 수행 과정이 비전에 맞게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점수를 매기기는 어렵고, 이번 평가에 만족하기보다 다른 금융공기업 수준인 ‘S’나 ‘A’등급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그러기 위해 개혁이 필요하다.”


그가 말한 ‘개혁의 바람’은 조직·인사에서 가장 먼저 불었다. 김 이사장은 올해 1월 전 임원 18명이 낸 사표 중 절반을 수리했다. 관료 출신은 남고 거래소 출신만 떠났다는 비판이 일자 그는 “사표 수리 기준은 두 가지였다”며 나이와 연임 여부라고 직접 밝혔다. 상대적으로 젊고 연임 경험이 없는 직원에게 기회를 줬다는 뜻이었다. 또 김 이사장은 직원 수를 10% 줄이고 급여를 5% 삭감했다. 인사에 ‘드래프트제’를 도입한 것도 그다.
본부장은 팀장을, 팀장은 팀원을 직접 고르게 했다. 능력 위주로 열린 경쟁을 하겠다는 생각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김 이사장은 선택 과정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고, 직원들은 잠긴 회의실에서 밤늦게까지 회의해 함께 일할 직원을 뽑았다. 이렇게 1월 중에 부서장, 팀장의 40%가 바뀌었다. 전체 조직에서도 5개 부서와 15개 팀이 사라졌다.




-취임 때 ‘위기다’ 느껴


취임 한 달이 되지 않아 일어난 파격적 구조조정에 김 이사장은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너무 이른 물갈이였다”는 비판을 들었다. 직원들이 기존의 복수 노조 외에 또 다른 노조를 설립하려고 하는 등 내부 부작용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5월에 명예퇴직을 시행했다. 김 이사장은 ‘인사’를 가장 힘들었던 일이라고 기억했다.
그는 “직원들을 명예퇴직으로 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다”며 “구조조정을 하는 동시에 외부의 시선에 잔뜩 움츠린 직원의 사기를 높여야 했기에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기 반성을 바탕으로 한 변화와 혁신만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소신은 굽히지 않았다.
그는 “외부에 끌려가는 변화는 조직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선제적이고 본질적인 개혁만이 근본적 원인을 없애고 실추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조직 혁신은 김 이사장에게 아픈 결정이지만 경영 효율화를 위해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조직 개혁이 효과가 있었나?


“임직원들이 위기를 극복하고 당당한 거래소가 되겠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앞으로도 선택과 집중을 통해 조직 효율화를 이룰 계획이다.”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닌 듯, 2005년 증권거래소와 선물거래소 통합 이후 갈등을 지속해 온 두 노조가 7월 14일 ‘노조 통합 추진을 위한 협약서’를 체결했다. 거래소 노조는 증권거래소·코스닥 노조로 구성된 단일노동조합과 선물거래소·코스닥위원회 노조로 구성된 통합노조 두 개로 나뉘어 화학적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었다.


김 이사장은 ‘변화와 혁신’과 함께 ‘고객 중시’를 강조했다. 지난 6월 4일 한국거래소는 고객만족 비전을 새롭게 선포했다. 내용은 ‘고객 가치를 창조하는 자본시장 파트너’다. 또 ‘KRX혁신추진단’을 구성해 고객의 뜻을 담아 개혁을 추진했다. 이 추진단은 절반 이상이 외부 사람으로 구성됐다.
그는 “조직 개혁만큼이나 고객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급했다”며 “회원사, 상장기업 등 고객과 심층 인터뷰를 거쳐 비전을 선포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딱딱한 ‘기관’의 이미지에 싸여 있는 거래소에 고객 서비스를 강화하라고 주문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낮은 몸가짐으로 섬기는 자세, 먼저 다가서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e-메일을 띄웠다. 김 이사장은 키움증권 사장 때도 고객 관리 업무는 직접 챙겼다. 매주 ‘VOC(Voice Of Customer) 회의’를 직접 주관해 서비스 질에 신경 썼다고 한다.

▎김봉수 이사장(뒷줄 왼쪽에서 셋째)이 지난 6월26일 충ㅂ구 괴산군 부흥리 고향 집에서 직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김봉수 이사장(뒷줄 왼쪽에서 셋째)이 지난 6월26일 충ㅂ구 괴산군 부흥리 고향 집에서 직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취임 후 가장 아쉬운 일은 무엇인가?.


“글로벌 성과를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김 이사장은 취임 초기부터 글로벌 진출을 강조했다. 현재 캄보디아·라오스 증권시장 설립 지원, 몽골 등에 한국형 증시 모델 보급, 중앙아시아·남미·중동 지역에 IT 시스템 수출 추진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7월 14일에는 캄보디아의 키에트 촌 부총리, 온 뽀안 모니롯 재정경제부 차관 등이 현지 증권거래소 설립과 관련해 여의도 거래소를 방문했다.
한국거래소가 지분 49%를 보유한 라오스 증권거래소는 올해 10월 10일 개장할 계획이다. 또 얼마 전 한국거래소는 다음달에 상장 외국기업 전용 인터넷 공간을 개설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한국 증시에 상장된 외국 기업은 14개다. 김 이사장은 “글로벌화를 위해 해외 우량기업을 한국에 상장하고 선진 증시와 연계망을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무엇에 중점을 두고 거래소를 경영할 계획인가?


“그동안 한국경제의 성장 원동력이 자동차, IT(정보기술)산업이었다면 앞으로는 금융투자산업이 국가 경제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 기대한다. 한국거래소는 금융투자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조직 면에서는 고객의 신뢰를 회복해 존경 받는 기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한국거래소 상장 계획에 대해서는 “우선 내부 조직을 튼튼히 하는 게 시급하다”며 말을 아꼈다.


2001년 키움증권 창립 멤버로 참여한 김 이사장은 소형 증권사를 5년 만에 온라인 1등 증권사로 만들었다. 취임 초기부터 온라인 경쟁력을 특화한다는 전략으로 파격적 수수료를 제시해 시장을 뒤흔들었다. 그의 과거 개혁 역시 초반에는 잡음을 동반했다. 실적 역시 좋지 않았다. 설립 첫해와 다음해 모두 적자였던 것. 하지만 소신껏 밀어붙인 결과 2002년 91억원 흑자로 전환한 이후 5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2006년에는 온라인 주식거래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해 자리를 굳혔다.




키움 시절부터 고객, 고객, 고객


즐겨 보는 TV프로그램으로 ‘동물의 왕국’을 꼽을 정도로 김 이사장은 생존 경쟁에 관심이 많다. 취임 전 이명박 대통령과 고려대 선후배, 윤진식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고교·대학 선후배 관계인 것이 부각되기도 했지만 증권업에 오래 몸담은 한 증권사 사장은 “김 이사장은 증권업무에 대해 잘 알고 강한 추진력으로 키움증권을 반석에 올려놓은 인물"이라며 "능력뿐 아니라 인품 면에서도 직원들의 신임을 얻기에 충분하다"고 칭찬했다.




김 이사장은 요즘도 매일 새벽 108배를 올린다. 주말에는 농장에 가 배추를 심는다. 변함없는 김 이사장이 거래소에 변화를 몰고올지, 멀찌감치 서서 직원들이 감자 캐는 모습을 응시하는 김 이사장을 돌아봤다.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는 김 이사장의 표정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직원들의 표정도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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