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윤' 송추 희망가
'ART 윤' 송추 희망가
제과 전문그룹인 크라운해태의 윤영달(65) 회장은 월·수·금요일마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으로 출근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울 남영동 본사 사무실보다 이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다. 선친이 지내던 이곳의 별장에 낙천재라는 이름으로 사무실까지 만들었다. 8월 말 현판식을 했다. 일요일에는 손자를 데리고 들를 때도 많다. 서울에서 오가는 시간이 아까워 아예 이곳으로 이사할 생각도 한다. 산과 계곡을 낀 천혜의 자연 속에 예술 작품과 공연 관람, 문화 체험 등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공간인 ‘아트밸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아트밸리는 윤 회장이 여생 동안 매달릴 역작이다. 송추 유원지 부근 500만㎡의 땅 가운데 330만㎡(옛 100만 평)를 가꾸고 꾸미는 대역사다. 큰 산 사이로 계곡이 흐르는 지세인 이곳은 장흥 아트파크의 70배,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의 7배에 이르는 광활한 땅이다. “아트밸리에 오면 할 일이 많아 가슴이 설렌다”는 그는 ㈜아트밸리라는 회사를 만들어 자신의 꿈과 희망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가파른 산길을 다니려고 차도 지난해 말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로 바꿨다. 9월 6일 올 들어 30번째 열린 조각가의 날 행사가 끝난 오후에도 아트밸리 여기저기를 둘러보느라 분주했다. 국악 명인들의 쉼터인 팔각정을 지을 자리에서는 굴착기 기사와 직접 이야기를 나눈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계곡 따라 이어진 오솔길은 휠체어 산림욕장으로 만들겠다며 앞장서서 걸으며 길을 안내했다. 야외 공연장 부지도 건너편에 지을 계획이라고 설명하는 그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욕심껏 채우려면 적어도 30년은 걸리겠지…”라고 안타까워하면서도 들뜬 모습이었다.
"골프장 짓자"는 회유와 압력 이겨내“제법 모양새를 갖췄다”는 말에 그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며 진척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혀를 찼다. 지난해부터 팔각정을 만들 계획을 세웠지만 허가 받는데 오래 걸려 전기 공사만 1년 넘게 걸렸다고 한다. 뭔가 고칠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바꾸는 불 같은 성격을 고려하면 답답할 만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느 단계에 이르면 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5년 정도 지나면 빨라지리라고 봤다.
그는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는 원칙을 세웠다. 신진 조각가 10여 명이 입주한 작업실과 크라운해태의 국악오케스트라 락음국악단의 연습실은 유원지 초입부터 쭉 늘어선 모텔 가운데 5곳을 사들여 개조해 꾸몄다. 고객 체험장을 겸한 회사 연수원도 이미 개발돼 있는 공간을 활용해 만들었다. 크라운해태 직원들이 직접 만든 조형물을 곳곳에 배치한 예술 산책로이자 산림욕장 격인 낙락도(樂樂道)와 동락도(同樂道) 역시 산자락을 따라 이어진 기존 도로나 오솔길을 가꿔 조성했다. 이 땅은 윤 회장의 선친이 30여 년 전 매입했다. 윤 회장은 이곳에 골프장을 짓자는 제안을 숱하게 받았다. 그는 1998년 크라운제과가 부도나기 전까지만 해도 골프를 즐겼다. 핸디캡 싱글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는 제안을 한사코 거절했다.
2007년 봄 무렵 산길을 다듬고 조형물을 설치하기 시작한 그는 갤러리처럼 꾸민 이곳의 아트 숍&레스토랑 건물에서 월요일마다 조각가를 만나 점심을 먹고 토론을 벌인다. 현대미술에 조예가 깊은 그가 왜 유독 조각에 꽂혔을까? 그는 “과자나 조각이나 모두 3차원이라 통하는 구석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방송이나 영화에서는 이제야 3차원이 유행이지만 조각은 애초 3차원이었다”고 조각 예찬론을 폈다. 특히 회화만큼 알아주지도 않고 만들기도 쉽지 않아 미술계에서 찬밥 신세라 더욱 애착을 느낀다(※그가 민간기업으론 유일하게 국악단을 만들고 시인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계획을 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각 영역에서 중요하지만 소외된 부문을 집중적으로 지원한다는 취지다. 어느 예술 장르를 선택하고 특정 부문에 집중하는 선택 후 집중 효과도 노렸다).
올 들어 30번째 열린 9월 6일 조각가의 날 행사 때는 멕시코의 유명 조각가인 세바스찬 에스컬터를 초청했다. 철재와 콘크리트로 60m가 넘는 대형 작품을 많이 만드는 작가로 유명하다. 윤 회장이 중학교 동창에게 세바스찬을 소개 받았을 때 “이 사람이다” 싶었던 건 지난여름 크라운해태가 주관했던 해운대와 경포대의 조각전이 떠올라서다. 대다수 작품의 크기가 너무 작아 멀리서 보면 눈에 띄지도 않았다. 크게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들고 운반도 어려우니 아예 작게 만든 사람이 많았다.
윤 회장은 “세바스찬처럼 대형 조각품을 만드는 작가도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내년에는 크라운해태 영업 조직에서 작품을 운송하고 설치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세바스찬과 토론 자리에서는 아트밸리 입주 작가와 국내 초청 작가들에게 질문하도록 독려했다. 윤 회장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버냐, 마케팅 전략이 뭐냐고 물어보라”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직원 손으로 아트밸리 가꿔그는 이미 150회를 넘긴 조각가의 날 행사를 올 초부터 크라운해태 임원이 주관하도록 했다. 10여 명의 임원이 매주 조각가를 직접 섭외하고 프로그램도 마련해야 한다. 윤 회장은 점심 식사와 토론 때만 참석한다. 조덕원 Art-CRM 실장은 “회장이 진행 방식을 바꿔 임원이 조각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이 회사 임원은 아트밸리를 꾸미고 가꾸는 일에도 앞장서야 한다. 축대를 만드는 돌을 나를 때는 잡역부나 다름없다. 윤 회장은 “여기 와서 막노동 좀 하면 (회사를 다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깨나 할 겁니다”라며 껄껄 웃었다.
크라운해태 직원도 예외가 아니다. 공병을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병 아트’와 목재를 조각해 목마(木馬)를 만드는 ‘목마 체험’ 등을 진행하는 간이공간을 직원들이 직접 만들었다. 돌을 나르고 길을 다지는 건 다반사다. 그뿐만 아니다. 주말마다 부서별로 돌아가며 각종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사이비 종교단체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교주’ 격인 윤 회장은 단호했다. 지식은 기본적인 내용을 빼고는 굳이 많이 알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된다고 말했다. 지금은 감성의 시대라는 지론이다. 특히 감성에서 비롯되는 창의성은 머리가 아니라 손끝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그런 확신에서 직원들을 사정없이 내몰았다. 윤 회장은 “간혹 엉터리로 시간 때우는 사람이 있기에 강제로 시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굴착기 한 대면 직원 수백 명이 하는 일을 잠깐이면 할 텐데 굳이 왜 힘들게 직원들을 시키겠느냐고 되물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듯 요즘은 열심히 하는 사람이 많아 흐뭇하다고 전했다. 뮤지컬, 연극, 시 낭송 등으로 구성된 모닝아카데미와 목조공예, 병 아트, 박스 아트 등과 같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듣고 보면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직접 제작하고 체험해 봐야 감성과 창의력이 달라진다고 확신했다.
아트밸리는 윤 회장이 주창하는 이런 아트경영의 본산이자 집약판이다. 크라운해태 임직원의 감성과 소통의 장이자 조각·국악인이 대중이 만나는 특별한 공간이다. 게다가 크라운해태 과자를 사서 신청할 수 있는 아트블록을 쌓으면 누구라도 병 아트 등의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윤 회장의 아트경영은 해태제과 인수와 멜라민 파동, 아토피 사태 등에서 비롯됐다. 윤 회장은 회사의 명운을 걸고 해태제과를 인수했다. 외환위기 때 부도가 난 크라운제과가 불과 몇 년 만에 덩치가 훨씬 큰 해태제과를 인수하겠다고 했을 때 다들 터무니없다고 했다. 그런 해태제과를 마침내 2005년 1월 품에 안았지만 노조의 반발이 극심했다. 2005년 파업 사태 등으로 해태제과의 매출이 뚝 떨어졌다. 4000억원대는 너끈히 올렸지만 그해 2400억원대에 그쳤다.
당시 회사 본사 앞은 물론 윤 회장 집 앞에서도 1인시위가 이어져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 윤 회장은 그때 집에서 평소 관심이 있던 현대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다 보니 괜찮은 듯해서 직원들에게도 전파해야겠다고 여겼다. 크라운과 해태 두 회사가 공유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고객에게도 도움이 되는 게 뭘까를 고민하던 그는 2004년 12월 크라운제과의 사내 교육 프로그램으로 출발한 강연 행사인 모닝아카데미를 확대 개편했다. 한가족이 된 두 회사 임직원의 이해와 협력을 도모하고 지성과 감성의 충전소로 발전시킬 목표를 세웠다. 마케팅·리더십·인사경영 등 비즈니스 교육은 물론 미술·문학·음악 강의도 더했다.
아토피 사건과 멜라민 파동 등은 아트경영이 한층 진화하는 촉매제가 됐다. “아토피 사건이나 멜라민 파동 때 우리 말을 전혀 믿지 않아 당황했다”는 윤 회장은 고객의 마음에 어떻게 믿음을 심을까를 고민했다. 과자가 공공의 적이 됐을 때 오예스 명화 마케팅과 유럽 미술관 투어 이벤트로 고객의 신뢰를 회복한 점을 떠올린 그는 과자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감성 마케팅을 하자고 결심했다. 그는 “과자는 꿈이고 제과사업은 꿈을 파는 일이라 감성이 결핍된 제과사업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런 맥락에서 아트경영으로 고객에게 예술과 꿈을 함께 전하기로 했다.
오예스 포장 디자인은 예술적으로 꾸몄다. 포장지를 이어 붙이면 작품이 되도록 박스를 만들고 크라운해태 작가의 작품을 엽서로 넣었다. 그랬더니 멜라민 파동이 나기 전에 초코파이 판매량을 앞질렀다. 멜라민 파동이 진정국면에 접어 들었을 때 아트 마케팅을 더욱 강화했다.
윤 회장은 내부의 아트경영도 강화했다. 꿈과 감동을 심어줄 수 있는 제품을 만들려면 크라운해태 직원부터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봤다. 예술이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되 이론과 실기를 병행해 창의력과 협동심, 애사심 기르도록 했다. 특히 아트밸리를 구심점으로 삼았다. 직원들이 직접 체험관을 짓고, 다양한 조형물도 만들어 낙락로와 동락도를 꾸몄다. 크라운이냐 해태냐 출신을 가리지 않고 부서별로 구획을 정해 정원과 쉼터도 조성했다.
아트경영으로 절체절명의 위기 넘겨아트경영 후 뭐가 달라졌을까? 과자 포장지를 활용해 장난감을 만들어 놀 수 있도록 고안했더니 아이들 반응이 좋았다. 국악 공연은 영업점 주인들이 호감을 보였다. 당장 과자 진열이 달라졌다. 쿠크다스라는 과자에는 물결 무늬를 넣어 디자인을 바꿨다. 과자 박스에 명화를 인쇄하는 박스 아트도 신선한 시도였다는 평가다. 여러 개를 쌓으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도록 꾸며 대형 마트 등에서 인기를 끌었다.
직원들도 달라졌다. 윤 회장은 아직 성에 차지 않지만 적어도 뒷다리 거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다고 본다. 과자 디자인이나 포장도 달라졌다. 무엇보다 직원들이 창의적으로 변했다는 분석이다. 직원당 아트밸리 체험만 4~5번이 넘다 보니 아이디어 수가 늘었다. 단합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윤 회장은 그러나 “앞으로는 체험 평가도 하겠다”고 채찍질했다. 점수를 매겨 줄을 세우지는 않더라도 형식적인 체험이 되지 않도록 독려하겠다는 것이다.
경영 성과도 좋아졌다. 윤 회장이 아트경영에 관심을 보인 2005년부터 그 후 실적을 비교하면 확 달라졌다. 해태제과의 매출은 2005년 5350억원에서 2009년 6125억원으로 늘었다. 크라운제과의 매출은 2005년 3170억원에서 2009년 3474억원으로 크게 늘진 않았지만 업계 평균보다 5~7% 높은 영업이익률을 유지하고 있다. 함창민 크라운제과 영업담당 이사는 “아트경영의 성과를 정확하게 따지긴 어렵지만 아트 마케팅으로 진전된 후 제과업계의 평균을 넘는 성장세를 이어왔다”고 설명했다.
윤 회장은 “지금처럼 판을 크게 벌일 생각은 없었다”고 계곡 너머를 바라봤다. 그의 말처럼 치밀한 계획을 짜서 시작한 건 아니다. 하지만 아트밸리를 백지 상태에서 채워나가듯 아트경영도 끊임없이 수정하고 확장하고 있다.
혁신경영->등산경영->아트경영그의 인생경영도 시대별로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화해 왔다. 크라운제과 창업주인 고(故) 윤태현 회장의 장남인 그는 1971년 회사에 발을 디뎠다. 72년 크라운제과의 히트 상품인 조리퐁을 개발한 그는 중간 도매상 체제를 없애는 유통 혁명도 이뤘다. 우연히 동대문 방산시장에 나갔다가 중간 도매상들이 다른 회사 제품을 소매상에게 권하는 걸 보고 중간 도매체계를 없애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러곤 직원들과 리어카를 끌고 가게 유리창을 닦아주는 등 소매상을 공략해 전국 유통망을 소매상 중심으로 바꿨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과자 가격을 결정하는 구조까지 바꿔놨다.
새옹지마라고 시련도 있었다. 선친이 일본 유학을 다녀온 윤 회장의 동생도 경영에 합류시키겠다고 밝혔다. 윤 회장은 1980년대 초 크라운제과를 떠났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으로 기회다 싶어 인천에 제과포장 기계를 만드는 한국자동기계를 차려 독립했다. 어려서부터 기계 만지는 걸 좋아해 선택한 업종이었다. 하도 어려워 목을 맬 생각도 했지만 15여 년을 버텼다.
그러던 1995년 선친이 다시 불렀다. 사장으로 복귀해 공격적으로 경영했다. 한때 해태제과를 제치고 잠시 제과업계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운이 없었던 걸까. 그런 와중에 외환위기가 닥쳤다. 빚을 얻어 몸집을 키웠는데 갑자기 금리와 환율이 급등하고 단기 차입금 상환 요구가 빗발쳤다. 장기 자금으로 많이 돌린 탓에 단돈 2억원을 못 막아 결국 1998년 1월 화의에 들어갔다. 윤 회장은 “나를 살려서 받을지 이 자리에서 죽이고 돈을 날릴지 택하라고 오히려 윽박질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채권단은 그를 믿고 법정관리나 워크아웃보다 조건이 훨씬 나은 사적 화의를 선택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등산경영도 그때 시작됐다. 등산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선 위기 극복 프로그램이자 교육 프로그램이다. 윤 회장은 홀로 산행하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임직원들과 함께 산행하며 단합해 힘을 모았다. 2004년에는 해발 3400m가 넘는 동북아시아 최고봉인 대만의 위산(玉山)을 임직원들과 등정했다. 그 자리에서 윤 회장은 동북아시아 최고 제과기업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당시 크라운제과 매출의 두 배가 넘는 해태를 인수하겠다고 했다. 회사 안팎에서 말렸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예전에야 큰 회사가 작은 회사를 먹었지만 지금은 문화 수준이 높고 변화 속도가 빠른 회사가 느린 회사를 먹는 시대라며 설득했다. 그렇게 해태제과를 인수했고 아트경영으로 회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윤 회장은 “바닥을 경험했던 기계공장 경영과 부도 경험이 행운이 됐다”고 말했다. 뭐든 못할 게 없고 두려울 게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뱃심으로 해태도 인수했다”고 덧붙였다. 직원들에게 일단 뭐든지 된다고 보고 되는 길을 찾으라고 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는 9월 10일 임직원과 함께 일본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다테야마(立山)로 떠났다. 해발 3000m 넘기 때문에 서너 발만 빨리 걸어도 숨이 차는 곳이다. 그는 “오래 멀리 가려면 서두르지 말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아트경영과 새로운 꿈은 그렇게 무르익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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