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서 '꼬리아'로 불리는 사나이
페루서 '꼬리아'로 불리는 사나이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사람은 많다. 박지성, 김연아가 펄펄 날면 코리아 브랜드는 동반 상승한다. 어디 이들뿐이랴.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음지에서 한국을 위해 발 벗고 뛰는 이도 있다. 여기 남미 페루에서 꼬리아로 통하는 사람이 있다. 그를 수식하는 말은 많다. 페루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 대통령 관저에 허락 없이 들어가는 민간인, 유명 페루 정치인 세나이다 오리베를 혼쭐 내는 유일한 사람, 페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좋은 이미지를 만든 주인공, 페루 교민의 버팀목….
박만복(74) 페루 국가대표팀 총감독, 아니 맘보 박 이야기다. 맘보 박은 박 감독의 애칭이다. 1998년 페루 여자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스스로 내놓은 맘보 박은 2009년 총감독으로 돌아왔다. 11년 만의 현장 복귀. 페루배구협회는 그를 컴백시키기 위해 ‘총감독’이라는 새 직책을 만들었다. 남녀 17세 이하·주니어·성인 국가대표팀의 감독 6명을 지휘하는 막중한 자리다. 맘보 박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10월 18일 페루 여자국가대표팀을 이끌고 한국에 왔다. 10월 29일 일본에서 열리는 여자 세계배구선수권대회의 연습캠프를 한국에 차렸다. 건국 60주년 명예위원 자격으로 2008년 한국을 찾은 지 2년여 만이다. 귀국은 이틀이 넘게 걸렸다. 비행기가 연착한 탓이다. 인천공항에서 만난 그는 피곤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젠 나이가 들었나 봐. 여간 힘들지 않네. 내일 봅시다.”
그를 수원에서 두 번 더 만났다. 인터뷰는 페루 대표팀의 연습경기가 열리는 국내 배구팀 경기장에서 가졌다. 쉽지 않았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그는 여지없이 코트로 향했다. 30분씩 쪼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맘보 박을 주목한 건 2008년 11월 페루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의 말 때문이다. “우리가 돈을 아무리 들여도 한 사람의 노력보다 못하다. 박만복 감독처럼 교민이 그 사회에서 존경을 받으면 한국이 훌륭한 나라로 보이고, 한국 제품도 다 좋아 보인다.” 한국 대통령이니까 시쳇말로 ‘띄우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민간 외교사절단을 자처하는 사람이 오죽 많은가.
하지만 맘보 박에 대한 평가는 달랐다. 알란 가르시아 페루 대통령도 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맘보 박 얘기를 수차례 꺼냈다. 맘보 박은 “페루에선 운전면허증도 없이 다닌다니까”라며 농을 던졌다. 그는 대체 누구일까.
맘보 박은 배구 변방에 머물던 페루를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세운 주인공이다. 그가 감독 시절 올린 성적은 놀랄 만하다. 1982년 세계선수권 준우승, 1986년 세계선수권 동메달, 1987년 세계선수권 우승, 1988년 서울 올림픽 은메달 등. 페루에서 배구는 국기(國技)다. 이전 국기는 축구였지만 맘보 박이 잇따라 승전보를 울리자 배구로 바뀌었다. 페루 중·고등학교에서 배구를 가르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페루의 배구사랑이 맘보 박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맘보 박은 강원도 속초 출신이다. 30세가 넘을 때까지 외국에 장기 체류한 적이 없다. 게다가 한국의 간판 배구선수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페루의 배구 영웅이 된 걸까. 여기엔 얄궂은 숙명이 숨어 있다. 격동의 역사에 휘말리면서 그의 인생은 계획에 없던 레일을 탔고, 이게 페루까지 이어졌다. 인천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선수로 활약하던 1961년 터진 5·16 사태가 첫째 분기점이었다. 졸지에 군대 기피자로 몰린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입영했다. 제대하니까 그의 나이는 30세가량. 특별한 부상은 없었지만 은퇴를 택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약대(경희대)를 졸업했다. 특기생? 아니, 실력으로 입학했다. 약사 면허도 땄다. 은퇴 직후인 1964년 서울 덕수궁 옆에 삼정당 약국을 개업할 수 있었던 건 그래서다.
2년간 약사로 일했다. 그는 “정말 답답했다”고 회상했다. “5원, 10원 때문에 목숨을 거는 것 같아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어요. 배구계를 떠난 것도 아쉬웠고.” 그는 고집이 세다. 뜻한 바를 이뤄야 직성이 풀린다. 그때도 그랬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구계로 방향을 다시 틀었다. 혼신의 힘을 쏟았고, 그 결과 승승장구했다. 1971년 여자국가대표팀 감독에 오른 그는 한국 배구의 승부사로 떠올랐다. 1973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제1회 세계배구월드컵에서 한국을 3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한국 단체종목 사상 최고 기록. 전국은 축제의 장으로 변했다.
5·16 사태로 바뀐 맘보 박의 운명당시 박정희 대통령까지 긴급 호출해 격려했다. “수고했소. 그렇게 큰 무대에서 3위를 했다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오.” 그는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우루과이에서 귀국하니까 청와대로 오라는 겁니다. 그때 단복 같은 건 없었거든. 가난한 나라에 무슨 돈이 있겠어. 그런데 박 대통령이 만나자고 하니까 하룻밤 사이에 단복이 나오더라고(웃음).”
1974년 8월15일 그는 일본을 거쳐 페루에 갔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육영수 여사가 저격 당한 날. 일본행 비행기에 맘보 박 혼자 탔다. 페루까지 동행한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페루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영어를 쓸 줄 알았는데 스페인어를 사용하더라고. 그것도 몰랐지. 괜히 왔다 싶었어요.” 페루 사람들도 한국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그의 훤칠한 키(180㎝)를 보고 “꼬리아노는 다 그렇게 큰가”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꼬리아노는 다 그렇게 큰가?”1년이 2년 되고, 2년이 3년 된다는 말이 있다. 그도 그랬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맘보 박이 페루에 온 지 1년 후인 1975년. 그의 부인과 자녀가 페루에 왔다. 막내아들 익형씨의 나이는 일곱 살에 불과했다. 1년 정도 지나니까 아이들이 스페인어를 더 잘했다. 교육문제가 겹쳤다. 부인은 한국에 돌아갈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나야 들어오고 싶었지.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정말 답답했어.” 또 솔직한 답변. 페루에 별 흥미가 없었다는 말로 들렸다. 이번에도 그의 지인은 다르게 해석했다. “2년 동안 스페인어를 얼마나 공부했는지 몰라요. ‘2년 안에 스페인어로 TV 인터뷰를 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지켰죠. 페루에서 인생을 걸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2002년 한·일 월드컵 직후 히딩크 리더십이 열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맘보 박만 했을까. 히딩크는 한국어를 못했다. 배울 생각도 없었다. 현지화를 위해 스페인어를 공부한 맘보 박이 더 훌륭한 리더 아닐까.
페루 여자국가대표팀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한국의 고등학교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맘보 박이 감독을 맡은 지 1년 후부터 좋은 성적을 냈다. 페루 배구를 어떻게 성장시켰을까. 맘보 박은 기본을 중시했다. 경기장에 들어오면 운동에만 전념하게 했다. 훈련 중엔 화장실도 못 가게 했다. “땀을 흘리는데 무슨 소변을 보느냐”는 것이었다. 경기장에선 호랑이 감독이었지만 밖에선 딴판이었다. 조직관리에 누구보다 힘썼다. 자비를 털어 가난한 선수를 도왔다. 선수 가족을 취직시켜준 일도 많다. 저녁 한 끼를 배구협회에서 제공하게 한 것도 그다.
선수들은 그를 파드르(padre·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 1993년 사소한 오해로 감독을 그만뒀을 때 선수들이 대성통곡하기도 했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 그해 새 배구협회장은 맘보 박의 연봉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며 따졌지만 협회장은 묵묵부답. 맘보 박은 ‘떠나라’는 메시지로 들었다. 그는 말을 직설적으로 하지만 돌려 듣지도 않는다. 실제로 그는 1993년 사표를 던졌다. 이 협회장은 후일 “진짜 돈이 없어서 답을 못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맘보 박은 “사정을 얘기했으면 페루를 떠나지 않았지”라고 아쉬워했다. 그의 페루 사랑은 생각보다 깊다.
페루 감독을 그만둔 뒤 일본 실업팀을 맡았다. 그 후 페루 배구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예선전을 통과하지 못할 지경에 몰렸다. 염치는 없었지만 맘보 박에게 구원 요청을 했다. 놀랍게도 그는 일본 실업팀의 거액 연봉을 뿌리치고 페루에 복귀했다. 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올림픽 티켓을 따면 미련 없이 감독직을 내놓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운명의 남미 예선전 결승. 페루는 아르헨티나를 꺾고 극적으로 올림픽 티켓을 땄다. 맘보 박은 또다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페루에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 관저에 허락 없이 들어가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여기서 가르시아 대통령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는 39세 때 대통령(1985~1990년)이 됐다. 일본계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에게 권좌를 넘겨준 뒤 2006년 대통령에 다시 올랐다. 그의 키는 194㎝. 한때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페루와 소련의 여자배구 결승전을 국무회의장에서 봤을 정도로 열혈 팬이다.
맘보 박은 가르시아 대통령의 요청으로 매달 한 번씩 아침식사를 함께했다. 대통령 관저에도 수시로 들어갔다. 맘보 박이 감독 은퇴 후 페루 지방도시를 돌면서 배구 연수 프로그램(2006~2009년)을 진행한 건 가르시아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대통령과 어떻게 친해졌는지 물었다. 맘보 박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지. 대통령이라면 누구든 만나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나라가 이상한 거지. 대통령 만난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더 호들갑 떨잖아.”
위기에 빠진 대우 위해 광고 출연맘보 박이 배구만큼 신경 쓰는 건 한국 교민이다. 페루 이민자 1호인 그는 교민을 위해서라면 만사를 젖혀 놓는다. 대표팀 감독으로 동분서주할 때도 한국 교민회장을 지냈다. 여덟 번이나 했다. 페루 교민은 현재 1000여 명이다. 대부분 커피숍·자동차 수리점 등 자영업 종사자다. 한국 교민이 완전히 안착했다고 보긴 어렵다. 맘보 박이 교민회장 시절 매달 한 번씩 교민 가게를 둘러본 까닭은 여기에 있다. 55세 이상 한인을 위한 청송회를 조직한 것도 같은 이유다. 어려운 일은 없을까라는 노파심에서다.
지금도 그렇다. 교민에게 맘보 박은 ‘어려운 일 있을 때 어김없이 나타나는’ 해결사다. “위기가 닥치면 내 이름을 팔아라”면서 말이다. 교민들은 이런 맘보 박에게 무한신뢰를 보낸다. 1990년대 맘보 박이 대형 선박 36척을 직접 관리·운영한 건 대표적 사례다. 그의 임무는 선박에 실린 오징어를 공정 입찰하는 것. 어느 교민 사업가가 한번에 최고 60만 달러가 오가는 알짜 사업을 맘보 박에게 맡겼다.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믿어주는 건 고마웠지만 시간을 내기 어렵더라고. 2년 만에 다른 사람에게 넘겼어요. 사업을 하고 싶어도 못했다니까.(웃음)”
맘보 박은 교민뿐 아니라 페루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도 신경을 쓴다. 경영위기에 빠졌던 대우일렉을 위해 2007년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회사 사정이 어렵습니다, 돈을 많이 드릴 수 없지만 광고 모델이 돼주십시오”라는 대우일렉 송희태 법인장(당시)의 요청을 외면하지 못했다. 대우일렉이 ‘박만복컵 배구대회’를 개최하고 싶다고 부탁했을 때도 선뜻 승낙했다. 돈은 물론 받지 않았다. 한국 기업이 잘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대우일렉은 ‘맘보 박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2006년 343만 달러에 그쳤던 대우일렉의 페루 매출은 2008년 2600만 달러로 7.6배가 됐다. 시장점유율은 1990년대 대우전자 전성기(6%)보다 높은 8%까지 치솟았다.
올 4월 페루법인을 설립한 삼성전자도 11월 페루 리마에서 맘보 박을 타이틀로 내건 배구대회를 연다. 삼성전자는 이 대회에 해마다 10만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우승한 학교엔 연구실을 지어주고, 각종 가전제품을 후원한다. 삼성전자로선 큰 홍보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기회. 하지만 맘보 박은 이번에도 별다른 조건을 달지 않았다. “한국 기업이 잘되면 얼마나 행복한 줄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마침내 속내를 드러냈다. 내친김에 ‘페루에서 존경 받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답은 건조했지만 메시지가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흠 잡힐 일을 안 했을 뿐이지. 그게 전부야.”
페루 교민사회엔 이런 말이 있다. ‘한국 기업의 활로는 맘보 박을 통해 열린다.’ 안중구 법인장은 과장된 말이 절대 아니라고 했다. 이 대통령의 말처럼 맘보 박 때문에 한국 제품이 다 좋아 보인다는 것이다. 페루 수도 리마에서 로또 사업을 하는 윈디플랜 김형주 대표는 “리마에서 한국 기업 CEO라고 말하면 ‘아! 맘보 박’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며 “맘보 박 효과로 한국 기업은 처음부터 큰 신뢰를 받는다”고 말했다.
맘보 박의 마지막 꿈은 얼핏 들으면 소박하다. “(내가 죽어도) 맘보 박을 내건 배구대회가 영원히 열렸으면 해.” 하지만 이어진 말에선 원대한 목표가 읽힌다. “맘보 박이 남으면 꼬리아도 남겠지. 이게 한국 사랑인가(웃음).” 백 리 길을 가는 사람은 구십 리를 반으로 친다. 페루에서 꼬리아로 불리는 맘보 박, 아니 박만복의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
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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