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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숭배한다고요? 그냥 즐기는 겁니다

와인을 숭배한다고요? 그냥 즐기는 겁니다

선릉역에 위치한 이원복 교수의 사무실엔 와인책들이 가득했다.

“본격적으로 주님을 영접하러 갈 시간이네. 어서 장미 살롱으로 옮기자고.”

이원복 교수를 처음 만난 곳은 서울 잠실 장미아파트 지하상가에 위치한 한 호프집. 인사를 나눈 후 생맥주 두어 잔과 안주 몇 개를 집어먹자마자 이 교수는 ‘주님을 보러 장미 살롱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독실한 교인인가’라는 생각은 아주 잠깐. 이 교수의 미소에 ‘주님은 酒님’이요, ‘장미 살롱은 이 교수의 자택인 장미아파트’임을 알게 됐다.

1997년 <먼나라 이웃나라> 를 발간해 지금까지 1500만 명의 독자들을 열광시킨 이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와인 애호가다. 그가 2007년 펴낸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은 국내에 출판된 와인 관련 서적 중 부동의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장미아파트 14층에 있는 이 교수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남다른 와인 사랑을 실감할 수 있었다. 거실에 일렬로 놓인 80병들이 국산 와인 셀러 4개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와인으로 빼곡하다. 셀러에 담긴 와인들은 그가 만화에 그렸던 수많은 나라만큼이나 다양한 국적을 자랑한다.

“태생이 개띠라 가리지 않아요. 전쟁까지 거친 세대라 먹는 것은 더 심해요. 없어서 못 먹을 뿐이죠. 주님도 마찬가지예요. 성경처럼 교리가 있긴 합니다. 주종불문, 교파불문, 안주불문이 원칙이지요.”

이름만 ‘주님’이지, 숭배와는 거리가 멀다.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일본 와인만화 <신의 물방울> 에 대해서도 “뻥이 너무 심하다”며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와인을 숭배하면 안 돼요. 와인은 음료의 일부분이지 경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어려운 술도 아니에요. 1만5000원짜리 와인이라고 업신여기는 것도 무척 잘못된 태도지. 그나마 최근엔 와인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와인을 바라보는 소비자의 눈도 달라지고 있어요.”

이 교수가 평소 즐기는 와인은 3만~5만원대다. 셀러를 가득 메운 와인도 대부분 백화점이나 할인점 와인 떨이 행사에서 박스로 구매한 것들이다. 주종불문이라지만 좋아하는 와인도 슬쩍 내비쳤다. “이탈리아 바롤로가 맛있더라고. 근데 너무 비싸서 자주는 못 마셔요. 부르고뉴 와인도 좋은데, 이건 10만원대 밑으로는 먹을 수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에요.”

와인에 대한 뚜렷한 주관은 실전에서 닦은 다양한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이 교수는 와인의 본고장 프랑스는 물론 미국, 칠레, 독일, 호주 등 안 가본 와인 생산지가 없다. 마셔 본 고급 와인도 부지기수다.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는 부르고뉴 와인인 로마네 콩티의 양조장에 갔을 때예요. 와이너리를 안내해주던 사람이 동행한 여자 교수에게 반해서인지 계속 와인을 주는 거예요. 그런데 후배가 와인을 안 마셔서 내가 대신 홀짝홀짝 뺏어 먹었죠. 나중에 세어 보니 7잔을 마셨더라고.”

이 교수가 와인을 주로 마시는 장소는 거실 한쪽에 자리 잡은 ‘ㄱ자’ 식탁이다. 통유리 너머엔 한강을 잇는 9개의 다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밤이 되면 한강의 조명등이 하나둘 켜지고 호텔 스카이라운지 뺨치는 분위기가 연출된다. 장미 살롱에 자리 잡고 앉은 이 교수는 이선희, 조성모의 노래를 틀어주며 별다른 안주 없이 와인을 권했다.

“폼 잡고 와인 마실 필요가 있나요? 전 와인 마실 때 안주는 먹지 않아요. 음식과 술을 함께 먹는 것은 서양식이죠.”
이원복 교수의 집

그 이유를 묻자 <먼나라 이웃나라> 의 저자로 돌아왔다. “우리는 밥 먹을 때 국을 함께 먹잖아요. 식당에서 무슨 음식을 주문하든지 국이 나와요. 서양에선 국 같은 음식이 없어요. 바로 와인이 국을 대신하는 겁니다. 그래서 서양인의 식사 자리엔 와인이 빠지지 않아요. 밥 따로, 술 따로 먹는 우리 식문화와는 거리가 있지요. 전 한국식으로 와인을 마시는 거예요.”

와인과 음식의 궁합을 일컫는 ‘마리아주’에 대한 접근도 남달랐다. “프랑스 파리에 살았던 루이 13세도 먹는 음식이 다양했을진 몰라도 와인은 부르고뉴 와인만 마셨어요. 보르도 지역은 너무 멀어 운송 도중에 와인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보르도 사람들은 보르도 와인만 마셨어요. 음식에 대해 다양한 와인을 맞춰 보며 그 궁합을 따져 본 것은 와인을 생산하지 않았던 영국인이었습니다. 마리아주라는 개념 자체가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 셈이죠.”

이야기는 최근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한식의 세계화로 이어졌다. 그는 우리 음식의 세계화가 필요한 게 아니라 해당 나라에서 우리 음식을 로컬라이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음식의 세계화 중 가장 성공한 사례가 아마 중국일 겁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중국집은 항상 있잖아요. 그런데 나라마다 중국집 맛이 달라요. 그 나라에 맞게 발전된 거죠. 한식이 필요한 것도 그 부분입니다. 우리가 한식을 세계화하겠다고 나서면 결국 한식은 세계화가 아니라 미국화될 확률이 큽니다.”

이 교수가 꼽는 와인의 매력은 다름아닌 ‘스토리’다. “와인은 그 나라의 역사·문화·인물과 밀접한 연관이 있죠. 와인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항상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제가 포브스코리아 지면을 통해 소개하려는 것도 바로 그 부분입니다.”

앞으로 이 교수가 포브스코리아에 풀어놓을 이야기 보따리도 무궁무진하다. 국내외 와인업계 유명 인사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족발, 과메기 등 토속 음식과 와인의 궁합을 솔직하게 들여다볼 참이다. 이 교수는 “전문가가 아닌 소비자의 눈에서 와인을 바라보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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