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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군부의 ‘외줄타기’

파키스탄 군부의 ‘외줄타기’

요즘 파키스탄에서는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 레이먼드 데이비스의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반미 감정이 고조된다. 데이비스는 지난 1월 라호르에서 두 명의 파키스탄인을 총기로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사건 발생 이후 침묵을 지키던 파키스탄 군부가 2월 19일 파키스탄 정보부(ISI) 이름으로 민족주의 감정을 부채질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성명은 “(데이비스 사건 이후) CIA의 행동은 사실상 ISI와 CIA의 협력관계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고 비난을 퍼부어 두 기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손상됐을 가능성을 암시했다.

하지만 ISI가 데이비스의 파키스탄 내 비밀활동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ISI는 데이비스 같은 요원들의 비자 발급에 깊숙이 관여했으리라 생각된다. 지난해 여름 마이크 멀린 미 합참의장은 파키스탄의 전직 장성 한 명에게 “파키스탄 군부의 비자 단속 강화가 양국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 장성은 뉴스위크에 “파키스탄 민간정부가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워싱턴 주재 파키스탄 대사관에 쌓여 있는 비자 신청서의 처리를 명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데이비스가 비자를 받은 것은 그 이전 일이다.

설사 파키스탄 군부가 데이비스의 비밀활동을 몰랐다손 치더라도 파키스탄 군부와 CIA가 공개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친밀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ISI와 CIA는 CIA의 원격조종 무인항공기 프로그램을 비롯한 대테러 공작에 공조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필요에 의해 성립된 관계다. 미국은 매년 파키스탄 군부에 4억 달러를 지원한다(그런데도 파키스탄 군부는 여전히 예산 위기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ISI가 무인항공기 공격을 묵시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자금 부족 때문인 듯하다. 무인항공기 공격은 테러 용의자를 제거하기 위한 전면적인 군사작전보다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 하지만 파키스탄 군부는 미국과 계속 공조할 경우 민심을 잃을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잘 안다. 파키스탄 군부의 한 고위 장성은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렇게 말했다. “무인항공기 공격은 바람직하지 않다. 난 미국 관리들에게도 사적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여론이 무인항공기 공격을 반대한다. 무엇보다도 여론이 중요하다.”

결국 데이비스 사건에 관한 ISI의 성명은 파키스탄 군부가 미국에 강경한 자세로 대응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민심 달래기용일 가능성이 있다. 일례로 지난해 12월 CIA의 무인항공기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한 파키스탄인이 피해소송에서 CIA 지부장의 이름을 명시하며 살인혐의로 고소했는데 이 지부장의 신분 노출에 ISI가 개입됐다고 알려졌다. 이는 지난 2008년 인도 뭄바이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으로 희생된 미국인 유가족의 소송과 관련해 ISI 최고책임자가 미국 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된 데 대한 보복으로 여겨진다. 이런 제스처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현재 파키스탄 국민의 군부 지지율은 84%에 달한다. 하지만 파키스탄 군부가 미국과 자국민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필자는 뉴스위크 파키스탄판 편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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