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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찍는 박용성 회장

야생화 찍는 박용성 회장

3월 18일 오전 11시. 서울 동대문 두산타워 33층 응접실에 들어선 박용성(71) 두산중공업 회장은 새카만 배낭을 의자 위로 툭 던졌다. 2018년 동계올림픽 평창 유치를 위해 박 회장은 남미를 다녀왔다. 16박17일의 꽤 긴 여정으로 3월 14일 귀국했다. 남미에서 그는 여러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을 만나 평창을 홍보했다. 그때 메고 갔던 그 가방이다.

그 안에는 캐논 7D, 5D 카메라를 비롯해 세 종류의 렌즈, 컨버터, 플래시가 들어 있었다. 박 회장은 가방 무게가 3.5㎏쯤 나간다고 했다. 지난주 이 가방을 메고 페루에 위치한 잉카 제국의 도시 마추픽추를 다녀왔다고 자랑했다. 남미에서는 IOC 위원들과 만나는 3~4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자유로웠다. 그 틈을 타 사진기를 들고 야외를 돌아다녔다.

그는 기업 총수이기도 하지만 야생화 찍기로 유명하다. 2005년부터 올해까지 네 차례 직접 촬영한 야생화 사진으로 달력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그가 야생화만 전문적으로 찍는 건 아니다. 풍경, 사람, 사물을 가리지 않는 ‘스냅 사진가’다. 어디서든 마음에 드는 게 보이면 망설임 없이 셔터를 누른다. “사진은 호기심 강하고, 세상 풍물에 관심 많은 나에게 딱 맞는 취미”라고 그는 말했다.

인터뷰 중에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캐논 G-12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다. 박 회장은 캐논 매니어다. 얼리어답터인 그는 원래 다른 브랜드를 썼는데, 신모델이 잘 안 나와 갈아탔다고 했다. 카메라 때문에 주머니가 늘 불룩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홍보실 직원과 기자를 연신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2011년 제작된 박 회장 달력 속 야생화.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월 금방망이, 5월 산수국, 8월 모데미풀, 9월 처녀치마.
“촌스럽게 브이(V)질이 뭐냐?”

포즈가 마음에 안 들면 다그치기도 했다.



IOC 위원 설득하는 건 천하의 비밀2011년 달력엔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 후보지인 평창 지역에 서식하는 야생화 모데미풀, 산수국을 담았다. 이전까지는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려고 달력을 제작했지만 올해는 IOC 위원들을 염두에 뒀다. 올 7월 남아공 더반에서 올림픽 개최지 선정 때 ‘표심’을 잡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다.

“달력은 우편으로 (IOC 위원들에게) 보내기도 했는데 잘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겠어. ‘내가 평창 유치를 위해 해외의 누구를 만났다’는 게 언론에서 이슈가 되더라고….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들을 설득해 나가고 있는지는 천하의 비밀이야. 묻지마!”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수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해온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외교관이다. 현재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뛰고 있다. 박 회장은 국제유도연맹 회장, 두산베어스 구단주,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2009년 제37대 대한체육회장을 맡은 이래 요즘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박 회장은 “사실 운동에는 취미가 없고, 잘 못한다”고 말했다. 골프도 안 친다. 걷는 게 운동이라면 유일한 운동이란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체육계에 입문했다. 1981년 ‘88서울올림픽 유치’가 결정되면서 올림픽조직위원회가 생겼다. 당시 정부는 대한체육회를 올림픽 지원 체제로 완전히 바꿨다. 기존 경기단체장은 모두 물러났고, 기업인들이 대신 맡도록 한 것이다. 이때 박 회장은 대한유도협회 부회장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맡았다. 체육계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진 한 장이 글보다 낫다“2013년 내 임기까지 목표가 평창 유치만은 아니야. 체육계의 고질적인 병폐인 폭력, 비리를 100% 없애진 못해도 확실한 선례를 남겨놓을 생각이야.”

그는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 체육인은 절대 사면해주지 않고 있다. 취임 후 대한체육회의 비효율도 정리했다. 40년 이상 따로였던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를 통합하고 45명이던 이사를 21명으로 줄였다.

“요즘 일본 쓰나미에 관련된 기사가 쏟아져 나와. 그런데 직접 보지도 않은 사람이 외신 보고 기사를 쓴다는 게 말이 되나?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보여주는 게 훨씬 와 닿아.”

박 회장에게 사진은 ‘내가 본 것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제대로 찍은 사진 한 장이 글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고 했다. 그는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2008년 3월 친구들과 이른 새벽 인천에서 형흥도로 향하는 똑딱선 배에 몸을 실었다. 1시간 넘게 차가운 바닷바람과 물보라를 맞으며 힘들게 섬에 들어갔다. ‘변산바람꽃’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도착하니 산비탈 양지바른 곳에 키 5㎝에 불과한 꽃이 그를 맞이했다. 체면 불구하고 바닥에 바짝 엎드려 촬영했다. 보이는 것을 정확히 찍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은 해외출장이 잦아 모임이 다소 소홀해졌지만 작년 초반까진 자주 뭉쳤던 친구들이다. 모두 은퇴한 CEO인데 그중 6명은 그의 애제자를 자처했다. 주말이면 국내 곳곳을 누비며 박 회장에게 ‘진정한 스냅 사진가’가 되는 법을 전수받는 까닭이다. 보이는 것은 뭐든지 빠르고 정확하게 담는다는 것이 스냅 사진가의 원칙. 사진을 찍을 때 박 회장은 언제나 여기에 충실하다.

그는 이제까지 촬영한 사진에 대해 그 누구의 품평도 요청해본 적이 없다. 다큐 사진을 즐겨 촬영하는 동생 박용만 회장에게도 사진에 대한 조언을 구해본 적이 없다.

“내가 잘 찍었나, 못 찍었나 물어봐서 시비 붙을 필요 뭐 있어? 경영은 손실이 나오니깐 따지는데, 사진은 나 혼자 즐기고 말면 되는 거 아니겠어. 참, 난 예술성 같은 건 안 따져.”

그가 촬영한 야생화 사진 중 일부는 ‘두산백과사전 두피디아’에서 볼 수 있다. 방방곡곡에서 촬영한 꽃들이 어떤 건지 조사해 캡션을 다는 일은 두산백과사전팀의 야생화 전문가 몫이다. 그가 제대로 이름을 아는 야생화는 100개도 안 된다고 했다.

1986년 동아출판사를 인수하면서 세계백과사전에 담을 사진들을 찍기 시작했다. 그는 야생화뿐만 아니라 도처의 사물, 운동경기 장면, 풍경 등도 촬영해 두피디아에 올려놨다. 그동안 약 150만 장의 백과사전용 사진을 촬영했다.

직접 사진사로 나선 데는 이유가 있다. 출판사 인수 후 백과사전 사진의 대부분이 외국 잡지, 서적을 무단 복제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직접 나섰다. 원래 기록을 목적으로 하는 사진 작업을 해 왔기 때문에 백과사전용 사진 찍기는 취향에 맞았다.

“취미는 돈을 쓰는 것이고, 경영은 돈을 버는 거야. 서로 반대야. 두 가지를 혼돈해 망한 사람이 많아. ‘누가 망했다’고 얘기하면 내 욕을 사발로 할 테니까 누군지는 말 안 할게.”

‘카메라를 애인처럼 끌어안고 다닌다’고 아내의 핀잔을 듣는 박 회장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1989년 두산상사와 합작해 설립한 한국코닥을 매각하는 것이었다. 코닥만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는 당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고 회상했다. 95년 그룹의 간판이던 오비맥주가 경쟁사 하이트맥주에 선두 자리를 내주며 고전하기 시작했다. 96년 두산은 9400억원의 적자를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박 회장은 ‘나에게 걸레는 남에게도 걸레’라는 ‘걸레론’을 내세우며 알짜 계열사를 시장에 내놔 주위를 놀라게 했다. 코카콜라, 네슬러, 3M 등 합작회사를 먼저 매각했다. 그룹의 간판이던 오비맥주까지 벨기에 인터브루에 팔았다.

두산은 남보다 한 발 빠른 구조조정으로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재무 구조가 튼튼해지자 이번엔 알짜 기업들을 순차적으로 인수했다. 2000년 발전·담수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2003년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등이다.

대대적인 인수합병(M&A)과 사업 재편으로 두산은 소비재 중심에서 중공업 중심 기업으로 변신했다. 96년 3조8000억원이던 매출은 2010년 24조4000억원으로 6배 이상 커졌다. 위기가 왔다 싶으면 빠르게 움직여 상황을 반전시키는 박 회장 특유의 경영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의 사진 촬영법도 경영 스타일과 닮았다.

“난 사진을 기관총 쏘듯이 막 찍어. 속도가 엄청 빨라. 맘에 들면 막 들이대서 찍기 시작해. 원하는 게 나올 때까지….”

그가 찍은 사진의 양은 프로 사진작가에 뒤지지 않는다. 평소 갖고 다니는 카메라의 셔터박스 수명은 15만 장 정도다. 워낙 사진을 많이 찍는 탓에 셔터 박스도 금방 닳아버리는데, 교체 비용이 비싸 차라리 새 카메라를 구입한다고 했다. 사진기를 들면 경영철학이기도 한 근자성공(勤者成功)이 떠올라 빨리 셔터를 눌러 한 장이라도 더 찍는다.

당시 두산의 M&A를 도왔던 컨설팅 업체 맥킨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사람들은 맥킨지가 우리(두산)한테 전투하는 법을 알려준 것으로 오해해. 맥킨지는 대포를 쏘는 게 좋은지 총 쏘는 게 좋은지를 조언해준 것뿐이야. 전쟁은 우리가 직접 했어.”



쓴소리라니, 나도 부드러운 남자…칠순이 넘은 나이에 그는 대한체육회장, 중앙대 이사장, 두산중공업 회장을 겸하고 있다. 맡은 자리가 많은 만큼 쉴 틈이 없다. 동계올림픽 평창 유치를 위해 해외에 가지 않을 때는 주중 4일은 대한체육회에, 하루는 중앙대학교에 출근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두산, 두산중공업 이사회에 참석해 중요한 안건을 논의한다.

그는 “빨리 걷고, 빨리 먹고, 빨리 말하는 편”이라고 했다. 수행 비서는 박 회장의 빠른 걸음걸이 때문에 함께 걷다 보면 숨이 가쁠 때가 있다고 했다.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중앙대 업무는 아이패드를 통해 수시로 보고 받는다.

“중앙대 졸업 평균학점이 전국 181개 대학 중 174위래. 앞으로도 학점 후하게 주는 학교 만들 생각 없어. A가 56%씩 되는 학교도 있다는데 그게 말이 돼?”

그는 2년 전 국내 대학들이 자동차 시대에 ‘마차’를 가르친다고 질타했다. 입학생이 모자라 중국 학생을 데려다 정원을 채우는 비현실적인 대학 교육을 ‘1000원짜리 졸업장’이라고도 했다. 중앙대 이사장 취임 후 18개 단과대학의 77개 학과를 10대 단과대학 49개 학부로 통합했다. 그는 등록금 400만원어치를 확실히 가르쳐 ‘중앙대 나온 사람이 쓸 만하구나’라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개혁해 나갈 생각이라고 했다. ‘기업식 경영’이라는 교수들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나한테 ‘미스터 쓴소리’라고 하는데, 나는 쓴소리를 한 적이 없어. 바른 소리를 했을 뿐이지. 나처럼 부드러운 남자가 어딨어.”(웃음)

할 말을 했을 뿐인데 언젠가부터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을 갖게 돼 아쉽다고 했다. 한때 박 회장은 거침없는 발언과 비판으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노조의 부당한 요구를 비판하는 ‘떼법론’, 한국 기업들의 철학 부재를 질타하는 ‘들쥐론’이 대표적이다. 지금도 그는 남이 뭐라 하든 그게 옳은 거라면 할 말은 하겠다는 생각이다.

조금 있으면 꽃피는 5월이다. 그때는 야생화가 산 도처에 넘쳐날 것이다. 그는 100㎜ 마이크로 렌즈와 삼각 다리를 배낭에 넣고 야생화를 찍으러 갈 생각에 들떠 있다. ‘꽃의 예쁜 모습보다는 어떻게 피고 지는지를 포착한다’는 그는 산야를 누비며 빠르게 셔터를 눌러댈 것이다.

그가 최초로 접한 카메라는 중학교 시절 아버지(고 박두병 회장)가 사주신 이안 리플렉스. 어린 시절에는 필름 값이 아까워 한 달에 한 번 필름을 현상하는 정도였다. 60년대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에는 집에 있던 카메라에 일회용 플래시를 달아 여러 친구의 결혼사진을 찍어줬다. 공식 사진은 사진사가 마그네슘을 ‘펑’ 하고 터트려서 찍고, 박 회장은 스냅 사진을 주로 촬영했다.

그는 1990년대 후반 필름 값 걱정 없이 맘껏 찍을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가 나와 무척 기뻤다고 했다. 그러면서 디지털 카메라를 예찬하기 시작했다. 필름 카메라로 작업을 한다는 사진기자에게 큰 소리로 조언도 했다.

“뭐 필름 카메라를 찍겠다고? 주책 떨지 말고 디지털 카메라 써. 내가 외국 사진잡지 4개를 보면서 분석한 거야. 같은 렌즈를 필름 카메라와 캐논 EOS 1 디지털 카메라에 끼워 물건을 찍었는데 디지털 카메라 해상도가 훨씬 좋았대. 디카가 저장하기도 훨씬 편리하잖아. 참, 사진은 제대로 저장해 놓지?”

그는 혹시나 집에 불이 날 것을 대비해 사진을 복사한 ‘외장 메모리’를 10년 넘게 한 직원에게 맡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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