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ab winter] MOROCCO - 해가 지는 땅에서
[arab winter] MOROCCO - 해가 지는 땅에서
LAILA LALAMI지난 2월 어느 날 오후,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해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도착했다. 몇 시간 뒤 A 숙부가 별세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그럽지만 성격이 불 같은 분이셨다. 카사블랑카 북페어에서의 공개토론회에 이미 늦어(already running late for a panel discussion) 서둘러야 했다. 한 손으로 구두를 신고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확인하던 중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멍해졌다(was stunned). 처음에는 숙부의 사망소식에 놀랐다. 어쨌든 겨우 73세인데다 당뇨가 있었지만 그밖에는 건강하셨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낭패감을 안겨줬다.
무슬림 전통에선 사망 후 가능한 한 빨리 시신을 매장한다(a body is interred as soon as possible after death). 병원으로부터 A 숙부의 사망소식을 통보 받은 때는 자정을 약간 넘긴 시각이었다. 아침에는 이미 염습과 장례기도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was already washed, shrouded, and prepared for funeral prayers). 그리고 점심 때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 있는 순교자 묘지에 매장됐다. 내 휴대전화를 진동으로 설정해 놓은데다(had silenced my phone) 시차피로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slept through my jet lag). 그 때문에 숙부가 땅에 묻힌 뒤에야(only after he had been laid to rest) 사망소식을 접하게 됐다.
이민자는 이중생활을 하게 된다(To be an immigrant is to live a divided life). 몸의 일부는 이쪽 나라에 살고 나머지는 다른 나라에 산다. 두 개의 언어로 말하고 두 종류의 신문을 읽으며 두 나라의 대화를 듣는다. 두 세계가 갑자기 합쳐지는 순간을 두려워하게 된다(learn to dread the moments when the two worlds come together abruptly). 가령 한밤중에 전화벨이 울릴 때가 그렇다.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사망을 알게 된 게 벌써 두 번이나 된다. 나는 이번에는 모로코에 있었지만 마치 미국에 남아 있었던 것처럼 부재 중인 상태가 되고 말았다(had somehow managed to be as absent as if I had remained in America).
40일의 추모기간이 뒤따르기 때문에 적어도 그때 처음 며칠간은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려 애썼다. 넋이 나간 상태로 대다수 가족이 거주하는 라바트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해안을 따라 100km 북쪽에 위치한 도시다. A 숙부는 지난 몇 년 동안 경찰청과 전국철도회사에서 지급하는 소액의 연금에 의지해 혼자 살았다(had lived alone, subsisting on small pensions). 불 같은 성격 탓에 두 직장 모두 오래 다니지 못했다(His terrible temper had kept him from lasting in either career). 자동차정비소(an automotive body shop), 맞춤 목공회사 등 여러 사업체를 차렸지만 항상 얼마 안가 따분해 했다. 그의 마지막 사업은 라바트에서 몇 시간 떨어진 곳의 농장이었다. 내 아버지를 포함해 가족 모두가 농장을 정리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부모님 댁에 그렇게 사람이 북적대는 광경은 처음 봤다. 친척, 이웃, 친구, 지인 모두 위로와 동정의 말을 전했다(all bearing words of comfort and commiseration). 그들은 A 숙부의 너그러움, 매력, 재치 있는 입담을 화제에 올렸다. 그러나 결국 대화는 고인에 관한 덕담에서 활발한 정치토론으로 넘어갔다(the conversation drifted from kind mentions of the departed to animated discussions of the political). 어쩌면 내 존재가 이런 효과를 가져온 듯했다. 이민자가 이중생활을 하듯 뒤에 남은 가족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새로운 나라를 상상하며 필연적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와 비교한다.
친척들은 미국에 관해 많은 걸 알고 싶어했다. 버락 오바마의 재선 확률, 이란과의 전쟁 가능성 같은 문제가 주요 관심사였다. 나도 궁금한 점이 많았다(had many questions of my own). 주로 모로코의 민주화에 관한 문제였다. 그 주제는 특히 시의적절했다. 그 주가 2월 20일 운동(the February 20 Movement)으로 알려진 친민주주의 연합의 창설 1주년이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봉기에서 영감을 얻은 이 젊은 운동가들은 모로코 전역의 도시에서 집회와 가두행진을 계속하며 진정한 의회 군주제(a true parliamentary monarchy)를 요구했다. 왕이 군림은 하지만 통치를 하지 않는(the king would reign but not govern) 체제를 말한다.
모하마드 국왕은 1999년 왕위에 오른 뒤(since his ascension to the throne) 그런 도전에 직면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곧바로 상황을 장악했다. 첫 시위가 벌어진 지 몇 주 안 돼 국왕은 모로코의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대단한 변화는 아니었지만(such as it was) 약속을 지켰다. 신헌법은 지역에서 처음으로 토착민 아마지그족의 언어를 인정했다. 또한 총선 승자들에게 정부구성 권한을 부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권은 여전히 왕이 확고하게 틀어쥐고 있다(the real power remains firmly in the king’s hands). 정치·군사·종교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왕이 결정하고 의회를 마음대로 해산할 수 있다(can still dissolve Parliament at will).
내가 모로코에 머무는 동안 내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weighed on my mind throughout my stay) 큰 의문이 하나 있었다. 이 지극히 평범한 개혁이 내 가족 같은 보통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는 점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민주주의에 관한 길고 치열한 토론을 듣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왕, 시위대, 정치인, 언론매체 등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였으며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의미도 제각각 달랐다(they were using it to mean different things). 대신 내가 들은 대화는 더 현실적이고 눈 앞에 닥친(were more mundane and arguably more urgent) 문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생활비, 만연한 부패, 부실한 병원의료 실태, 끔찍한 공공교육 환경, 번드르르한 사업에 낭비되는 국고 등.
조문객 중 한 명이 전기요금(utility bills)에 관해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그런 문제가 화제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치솟는 전기요금이 민영화된 수도회사와 전력 회사 탓이라고 비난했다. M 삼촌은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 문제는 사실 경영권을 넘겨받은 프랑스 회사의 잘못이 아니라고 대꾸했다. 모로코의 에너지 생산량은 부족한데 소비가 어느 때보다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삼촌은 주장했다. 그 남자는 고집스럽게 눈에 보이는 사실만 말했다(was stubbornly factual). “내 전기요금이 너무 많이 나와.”
뒤이어 아버지가 번화한 대로에서 경찰관에게 검문을 당한 일을 이야기했다(recounted how a police officer had pulled him over on a busy thoroughfare). 아버지의 위법사실이 무엇이었는지(what my father’s infraction might have been) 또는 실제로 법을 어기기라도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 이야기의 요점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경찰관은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고 아버지는 거절했다. 경찰관은 격분했다. “당신네 퇴직자들은 우리보다 수입이 더 많잖아(you make more than us)!”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한 또 다른 친척 아줌마가 아들의 취직 소식을 전하면서 한동안 토론이 낙관적으로 흘렀다(turned more upbeat). 그러나 아줌마는 이어 자기 동네에 그렇게 운이 좋은 젊은이는 많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꼽으며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거명했다. “그들은 그 문제가 누구 탓이라고 생각하죠?” 내가 물었다. 아줌마는 “알잖아. 그 사람.” 국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다음날 아침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 우체국으로 가자고 했다. 기사는 길이 너무 막혀서 시내로는 못 가겠다고 버텼다. 취업하지 못한 대학 졸업자나 2월 20일 운동 연합 조직원들의 연좌농성 때문에 교통이 항상 극심하게 막혔다(it was always hopelessly tied up because of sit-ins). 우편물은 다른 우체국에서 부쳤다. 부모님 댁 길 모퉁이에 있는 미용실에서도 예외 없이 불만의 소리가 들렸다(there was no escape from the dissatisfaction). 라디오에서 대담 프로가 진행중이었다. 청취자들이 전화를 걸어 에릭 게레츠에 관한 불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모로코가 엄청난 연봉을 주며 그 벨기에인을 감독으로 영입했지만 모로코 국가대표 축구팀이 올해 아프리카컵 준결승 진출에도 실패한 참이었다(그의 공개되지 않은 연봉이 한 달에 30만 달러 안팎이라는 소문이다).
국민의 이 모든 불만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모로코 국민 3200만 명 중 빈곤선 이하 생활자가(are living below the poverty line) 500만 명에 육박한다. 전체 9%인 실업률이 대학 졸업자는 16%이고 도시 청년층의 경우는 30%나 된다. 튀니지·이집트·바레인·리비아·예멘 같은 민중시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왕은 지난해 식량 보조금을 두 배로 올리고 경찰을 비롯한 공무원들의 연봉을 인상했다. 그런 조치로 올해의 예산적자가 GDP의 7%였던 지난해보다 훨씬 불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설상가상으로 심각한 가뭄이 농업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에 더 큰 타격을 입힐 가능성이 있다. 밀과 에너지 수입 비용 증가로 인해 무역적자는 이미 기록적인 수준으로 확대됐다.
경제위기가 왕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하다. 왕은 지난 5년간 재산이 두 배로 불어났다. 재산 추정액 25억 달러로 세계 7위의 부자 군주가 됐다. 저널리스트 아메드 레다 벤쳄시가 최근 한 말마따나 모하메드 국왕은 “모로코 제1의 사업가”다. 제1 금융가, 제1 식료품상, 제1 지주, 제1 영농가이다. 결국 모로코인들이 매일 하는 일상용품 쇼핑이 왕의 지갑을 불려주는 셈이다(the daily purchases made by Moroccans only make their king richer).
2월 20일 운동 창설 1주년 기념식에 맞춰 카사블랑카로 돌아갔다. 일단의 창설 멤버들이 수백 명의 다른 시위대원과 함께 모여 축하하고 있었다. 하늘은 청명했지만 공기는 차가웠다. 손으로 눈부신 햇빛을 가리며(to shield my eyes from the sun) 손을 따뜻하게 하려 애쓸 동안 곳곳에서 사복경찰(plainclothes police)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광장 주위에 둘러서서 시위대를 노려보며(scowling at protesters) 가끔씩 사진을 찍었다. 시위대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들은 소그룹으로 나뉘어 이런저런 연사의 강연을 듣거나 자기들끼리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1년 전의 온건한 요구는 사라졌다. 지금은 그들의 손에 들린 피켓의 문구가 더 직설적이다. “M6를 타도하자(Down with M6).” M6는 국왕인 모하메드 6세의 별명이다.
라바트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와 삼촌들은 A 숙부 사망과 관련해 산더미 같은 서류를 작성해 제출해야 했다. 그래서 나도 삼촌 두 명과 함께 지역 행정관청에 찾아가기로 했다. 우리는 차를 몰고 쓰레기 더미가 쌓인 길모퉁이를 지났다. 도시의 쓰레기 수거사업(garbage collection)도 민영화됐다. 그 사업을 넘겨받은 프랑스 회사는 아마도 거리 환경을 깨끗하게 유지할 만큼 쓰레기통이나 직원이 많지 않은 듯했다.
행정관청에 도착한 뒤에야 한 주에 월요일과 금요일 이틀만 업무를 본다는(was open only two days a week) 사실을 알았다. 다른 날은 직원들이 마치 자신들의 일과인 양 저임에 항의하는 파업을 벌였다. 파업이 1년째 계속 중이라고 했다. 행정당국이든 직원이든 모두 입장을 바꿀 생각이 없는 듯했다(Neither the administration nor the employees seemed amenable to changing their positions). 그래도 우리가 찾아간 날이 월요일이어서 운이 좋았다. 그곳에서 숙부의 사망신고를 받는지 물었다.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른 행정사무소를 찾아가야 했다.
다른 사무소에 갔더니 사망신고를 담당하는 부서 문 앞의 복도 끝까지 대기행렬이 길게 뻗어 있었다(we found a line of people stretching all the way down the corridor). 새로 온 사람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어떤 서류들이 필요한지 물어본 뒤 줄을 서야 했다. 대기실에는 의자가 정확히 4개 있었다. 내 옆에 있던 여성은 하얀 색 옷차림이었다. 최근에 미망인이 됐다는 표시다. 사망한 그녀 남편의 서류가 행정사무소의 실수로 잘못 돼서 그녀가 자기 돈을 들여 전부 다시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유산상속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이다.
두 시간 뒤 마침내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our turn in line finally came). 삼촌이 신고절차를 시작하려고 담당 공무원 책상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곳도 관할 행정관청이 아니었다.
이 행정사무소에서 저 사무소로 옮겨 다니는 동안 모로코의 보통사람들이 매일 직면하는 좌절과 불공평을 목격했다. 신헌법과 지난 해 11월의 선거에도 불구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the relationship of the ruler to the ruled has not changed). 공무원·세관원·경찰관 등 누구의 얼굴을 하든(whether it takes the face of a civil servant, a customs official, or a police officer) 정부는 계속 국민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한다. 정부가 국민을 섬겨야 한다는 원칙은 통하지 않는다(not, as it ought to be, the other way around).
며칠 뒤 목요일 모로코를 떠났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별의 아픔은 쓰라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감에 슬픔까지 뒤섞였다. 내 숙부, 동포, 조국에 대한 슬픔 말이다.
[필자는 ‘희망과 기타 위험한 추구(Hope and Other Dangerous Pursuits)’의 저자다. 현재 캘리포니아대(리버사이드) 조교수다.
번역 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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