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ECTOR - 농악 그림 보며 아버지를 추억하다
COLLECTOR - 농악 그림 보며 아버지를 추억하다
상모를 휘휘 돌리고 장구와 북, 꽹과리를 신명나게 두드리는 농악대 공연을 담은 그림들. 이충희(57) 듀오 대표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다. 듀오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에트로(ETRO)’ 수입사다. 그림이 전시된 곳은 서울 강남 청담동 듀오 본사 내 백운갤러리.
한쪽 벽면에 농악을 소재로 그린 두 작품이 전시돼 있다. 하나는 원로대가 한봉호 화백 작품이다. “한 화백은 오랫동안 유럽과 일본 화단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올해 90세가 넘으셨는데 여전히 그림을 그리세요. 농악·플라멩고 등 주로 역동적인 작품을 많이 선보이셨어요. 이 그림은 한 화백에게 직접 부탁해서 받았습니다.”
한 화백 작품 옆에는 이성호 화백의 그림이 걸려있다. 역시 농악을 소재로 한 것이다. 5~6년 전 지인이 이 대표가 농악 그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선물했다.
이 대표는 “농악 그림이 좋다”고 했다. “가장 한국적인 소재잖아요. 농악대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면 흥겨운 장단 소리가 들리는 듯 해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시골 장터에서 자주 보곤 했습니다. 농악 그림은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요.”
본사 빌딩 명칭은 백운(白雲)이다. 명품 브랜드를 수입하는 회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 뿐 아니다. 건물 5층에는 백운갤러리가 있고, 2002년부터 운영하는 장학재단 이름 역시 백운장학재단이다. 백운은 이 대표가 인생의 멘토로 삼는 부친의 호다.
중학교 윤리 교사였던 아버지는 골동품 수집에 조예가 깊었다. 8형제 중 여섯째인이 대표가 유독 아버지를 따랐다.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시간 날 때마다 인사동을 찾았다. 골동품 가게와 화랑을 다니며 별전과 동경을 모았다. 별전은 옛날에 노리개로 쓰던 장식용 동전이고 동경은 구리 거울이다.
“요즘도 인사동을 걷다보면 아버지가 떠올라요. 아버지는 옛날 물건에 관심이 많으셨죠. 취미로 시작했던 수집은 갈수록 전문가 수준이 되셨고요. 한국고전수집연구 1세대로 한국조폐공사에서 화폐 관련 책을 편찬할 때 참여하셨어요.”
지금은 아버지가 수집한 물건 중 동경만 남아있다. 400여 점의 동경은 큰 형이 보관한다. 별전 컬렉션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내다팔았다. 이 대표는 아버지가 평생을 모아온 별전 컬렉션을 지키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고 했다. “기회가 되면 도로 찾아오고 싶지요. 근데 방법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성공했으면 좋았을텐데….”
대학 졸업 후 그는 앞만 보고 달렸다. 호텔신라에 입사해 면세점 영업점장이 됐다. 국내에 해외 명품 브랜드가 막 알려지기 시작할 때다. 그 역시 면세점 근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명품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에트로 브랜드 수입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 1993년 에트로 국내 독점판매권을 따냈다. 사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인사동 추억은 잊혀졌다.
2000년 사업이 안정궤도에 들어섰다. 특히 에트로의 대표 문양인 페이즐리에 화려한 색상을 더한 아르니카 가방 라인이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2000년부터 3년 동안 매년 50%씩 매출이 늘어났다. 이 때 지인이 찾아왔다.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며 그가 소장해온 그림들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김기창을 비롯해 강요배·전병헌·이응로 등 근·현대 작가의 작품 20점을 구입했다. 막상 사고 보니 어떤 그림인지 궁금했다. 자연스럽게 발이 인사동 화랑으로 향했다. 이후 인사동 산책은 취미가 됐다. 보통 한 달에 3~4번은 다녀온다. 돌아올 때는 항상 그림 한 두 점을 사온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400여 점이 모였다.
사장실 입구부터 그림이 빼곡히 쌓여있다. 사무실 안은 온통 그림과 조각품들로 꽉 차 있다. 그림을 고를 때 특별한 기준이나 원칙은 없다. 이 대표가 보고 마음에 들면 산다. 해외 출장을 갈 때도 각 나라의 벼룩시장을 찾는다. 옛 물건이나 그림을 사기 위해서다. “벼룩시장에서 물건을 찾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용케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을 고르면 기분이 좋아요. 이 작품들도 전시하면 유명 작가의 작품 이상으로 멋질 겁니다.”
인사동 추억 담긴 그림들2009년에는 백운갤러리를 세웠다. 처음에는 그 동안 모은 작품들을 전시할 요량이었다. 전시 공간을 만들고 나니 젊은 작가들이 떠올랐다. 그 동안 이 대표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아 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신진 작가들의 그림을 사줬다. 1년에 6번만 이 대표의 컬렉션을 소개하는 전시회를 열었다. 나머지 시간엔 가난한 젊은 화가들에게 전시공간을 제공했다. 전시장을 빌려주는 대신 작가의 작품을 선물로 받았다. 이 작품들도 모아서 사회단체에 기증했다.
지난 10월 중순에는 황성규 작가가 백운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공부한 그의 첫 한국 전시였다. 황 작가는 “좋은 장소에서 작품을 전시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게다가 업계 지인들을 초대해서 그의 작품을 소개해줬다고 덧붙였다. 10일간 전시된 황 작가의 40여 점 작품엔 줄줄이 빨간 딱지가 붙었다.
이 대표는 올해 ‘에트로 미술상’을 만들었다.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국내 작가들을 후원하기 위해서다. 총상금은 5900만원. 올해는 설치작가 정직성 씨가 대상을 수상했다.
이 대표는 “돈을 잘 쓰면 즐겁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에겐 ‘자린고비’다. 40대 때까지는 유럽 출장을 갈 때 이코노미석을 고집했다. 회사 설립 초기엔 출장 때마다 라면을 싸 갖고 다녔다. 식사 약속이 없으면 코펠에 라면을 끓여먹었다.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면 비싼 술집도 가지 않는다. 일년에 한 차례 아내와 여행을 다닐 때도 마찬가지. 자가용에 먹거리를 잔뜩 싣고 직접 운전해 이곳 저곳을 다닌다.
그의 유일한 사치는 그림 수집이다. 그림 사는 것 빼곤 습관처럼 기부를 한다. 그는 지난 2002년 백운장학재단을 세우고 750여명의 학생들에게 15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하다.
에트로 기부 패션쇼는 업계에서 유명하다. 귀빈들에게 화환 대신 기부금을 받는다. 올해 3월엔 에트로 론칭 20주년 축하 패션쇼가 열렸다. 이날 모인 기부금만 3억원에 이른다. 이 대표는 자녀들에게 재산의 10%씩 주고, 나머지 80%를 사회에 환원할 생각이다. “좋은 일에 돈 쓰는 것만큼 큰 행복은 없습니다. 아들이 서운하겠지만요(웃음). 기회가 된다면 부친이 남긴 동경을 전시할 ‘거울박물관’을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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