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COVER STORY - 자살 유행병의 실체

COVER STORY - 자살 유행병의 실체

자해로 인한 사망이 전쟁, 살인, 자연재난에 의한 사망 건수를 합한 것보다 많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나? 어떻게 막을 수 있나?



토머스 조이너가 25세였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실종됐다. 당시 조이너는 텍사스대 대학원생으로 임상 심리학을 전공했다. 그중에서도 우울증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이미 아버지가 우울증에 시달리는 듯 하다고는 생각했다. 그 한달 반 전 조지아주 해변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을 때 평소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던 아버지가 시무룩했다. 늘 말이 많고 잘 웃고 사람들을 잘 설득하던 그가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 지냈다. 병이 나지도 숙취가 심하지도 않았다. 잠도 자는 게 아니었다. 당시 아버지는 56세였다.

조이너는 우울증에 관해선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괴로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자살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울증의 한가지 증상이라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우울증 진단을 받은 환자 중 최소 2%가 자살을 택하지만 학교에서 배운대로라면 아버지는 자살 위험군에 들지 않았다.

마음이 약하거나 충동적이지 않았다. 나쁜 유전자나 감당 못할 문제를 가진 불안정한 사람도 아니었다. “자살은 ‘루저(loser)’들의 것”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아버지와 정반대되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행위였다. 아버지는 사업가로 성공했고, 해병 출신이며, 미국 남부의 기준으로도 아주 강인한 편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혼자 자던 방에서 이부자리도 개지 않고 집을 나갔다. 아버지가 모는 밴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밤이 깊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다음 날 오전 어머니가 학교에 있는 조이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찰이 밴을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밴은 집에서 약 2㎞ 떨어진 한 건물의 공터에 주차돼 있었다. 엔진은 차가웠다. 뒷좌석에서 경찰이 조이너의 아버지를 발견했다. 피에 뒤덮힌 채 죽어 있었다. 칼이 가슴에 박혀 있었다.

수사관들은 아버지 손목에서 칼로 벤 상처를 발견했다. 운전석 곁에는 노란 포스트잇 쪽지가 놓여 있었다. “이게 해결책인가?” 떨리는 손으로 휘갈겨 쓴 아버지의 필체였다. 경찰은 자살로 판정했다. 자창(찔린 상처)에 의한 죽음이었다. 말할 수 없이 처참한 종말이었다. 그 때문에 조이너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건 생을 마감하는 손쉬운 방법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었다.

장례식을 마치자 조이너의 고통과 혼란은 더 심해졌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금기 때문이었다. 자살은 신의 뜻을 거역하는 행동이며, 법과 관습을 무시하는 행위로 동네의 치욕이자 오점으로 인식됐다. 조이너는 친척들 사이에서 아버지의 사망 원인을 심장마비라고 하자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여자 친구는 조이너의 유전자도 오염된 게 아닌지 불안해 했다. 동료 학생과 교수 중 몇몇은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사람 좋은 아버지를 가족들이 사지로 내몬 듯했다. 마치 가족들이 그를 찔러 죽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조이너는 자신이 하는 공부에 완전히 실망했다. 심리학과 우울증을 전공하는데도 가장 끔찍한 종말인 자살 하나 이해하지 못하다니!

가족을 자살로 잃은 사람들은 많은 의문에 시달린다. 왜? 어떻게?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답이 없는 의문들이다. 조이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왜 사람들이 자기 손에 죽는지 알고 싶었다. 죽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게 뭘까? 삶을 끝내기 위해 정확히 어떤 결단을 내릴까? 어떻게 자살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러나 자살로 가족을 잃은 대다수 사람들과 달리 조이너는 지난 20년동안 그 답을 어느 정도 찾았다고 생각한다.

조이너는 올해 47세로 플로리다 주립대(탤러해시 캠퍼스) 석좌교수다. 키 190㎝에 우람한 체격으로 머리는 면도로 완전히 밀었고 두껍고 듬성듬성한 수염을 길렀다. 그런 모습은 그의 일과 잘 어울리는 듯하다. 어느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살 문제를 파고드는 것이 그의 일이다. 자살을 명쾌히 이해하는 것이 공익을 위하는 길인 동시에 개인적인 의무이기도 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아버지를 자살로 내몬 실체와 싸우고 더 나은 치료와 예방을 위한 디딤돌로 그의 죽음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아버지를 욕되지않게 하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자기한 몸이 없으면 세상이 더 나아진다고 잘못 생각하고 호텔 욕실에서나 밴 뒷좌석에서나 공원 벤치에서 피투성이로 혼자 죽는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

조이너는 자살에 관한 포괄적인 이론을 제시한 최초의 심리학자다. “모든 조건에서, 모든 문화에서, 모든 시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살에 관한 설명”이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타이밍도 잘 맞아떨어졌다. 올 봄 자살 뉴스가 미국의 신문과 소셜 미디어에 쏟아졌다.

“자살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공중보건 문제”라고 규정한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보고서가 그 시발점이었다. CDC는 눈길을 끄는 수치를 제시했다. 교통사고보다 자살로 인한 사망이 더 많다는 통계였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베이비붐 세대의 고령화와 불황에 관한 지겨운 이야기만 발작적으로 촉발하는 데 그쳤다. CDC조차 경제가 살아나면 사람들이 삶을 즐기게 되리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자살은 경제나 세대의 문제가 아니다. 일자리가 많이 생기거나, 총기 접근이 어려워지거나, 사회가 좀 더 관대해지면 사정이 나아지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되는 부차적인 문제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저변이 넓고 추동력이 강한 중요한 문제다.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크게 바뀌고 그에 따라 죽는 방식 또한 달라진 결과다.

자살과 그에 수반되는 조건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이제 우리는 완전한 암흑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임상 우울증 환자가 증가하고 암울한 길로 죽음에 이르려는 끊임없는 욕구가 만연하는 시대를 말한다. 미국에선 1999년 이후 매년 자살이 꾸준히 늘었다. 그 결과 자살은 미국에서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이 됐다. 세계 대부분에서도 지난 세기보다 훨씬 더 심각해진 주요 위협 중 하나다.

이보다 더한 역설은 있을 수 없을 듯하다. 지난 50년 동안 수억 인구의 삶이 더 나아졌다. 그러나 이런 더 밝은 미래를 보면서 우리는 전례 없는 절망에 시달린다. 사회가 갈수록 진보하고 놀라운 혁신이 이뤄지는 시대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 슬픔에 짓눌리고 자해로 목숨을 끊는다.

어쩌면 그런 현상이 이제 시작일지 모른다. 조이너 같은 학자들의 판단이 옳다면(여러 연구 결과가 그들의 생각이 옳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한 장을 끝내고 완전히 새로운 장의 출발점에 섰다. 자해로 인한 죽음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그런 현상이 더 심해지는 시대를 말한다.



미국에서 자살은 비교적 서서히 증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최근에야 그 심각성을 알게 됐다. 사실 나도 이전에는 잘 몰랐다. 그러다가 얼마 전 하버드대 자살예방 프로그램 ‘수단이 중요하다(Means Matter Campaign)’를 이끄는 캐서린 바버와 통화하면서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바버는 10년 전 폭력사망신고 시스템을 설계했다. 미국 전체의 자살에 관한 포괄적인 통계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다. 그녀는 현재 교육과 예방에 주력하기 때문에 그런 통계를 접한 지 몇 년이 지난 상태였다. 그래서 바버는 보스턴에서, 나는 뉴욕에서 온라인으로 함께 그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우리는 메뉴 중 ‘폭력 상해’에서 자살을 선택했다(그 메뉴에는 사고, 살인, 전쟁도 포함된다). 화면에 간단한 흑백 차트가 나왔다. 정말 끔찍한 내용이었다. 고의적으로 죽는 방법이 수없이 많았고, 그 각각의 방법에서 자살 건수가 계속 늘었다. 연간 자살률이 약 20% 증가했고, 자살자 수가 30% 늘었으며, 10년 동안 최소한 40만 명이 자살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전사자의 합계와 맞먹는다.

투신, 총기 발사, 음독, 흉기 사용, 익사, 교살 등이 갈수록 늘었다. 화산 용암 속으로 뛰어들거나 돌아가는 경운기 속으로 뛰어드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기이한 자살 방법도 적지 않았다. 화면을 지켜보던 바버는 혼잣말을 했다. “이런 … 좋지 않아 … 모든 방법에서 자살 건수가 늘어나고 있잖아 …”

올해 미국은 연간 4만 번째 자살이라는 아주 암울한 이정표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 연간 자살 건수로 사상 최고 기록이다. 2012년 11월엔 웨스트버지니아대의 역학 전문가 이언 로켓이 이끈 연구에서 자살이 미국에서 ‘상해 사망’의 최대 원인으로 밝혀졌다. 올 봄 CDC가 지적했듯이 자살은 교통사고 사망률을 넘어섰다. 다른 사고사는 자살에 비할 수도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최대 위험”이 됐다는 이야기다.

이런 추세를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자살은 최근의 경기침체 훨씬 이전부터 증가하기 시작됐다. 물론 경제위기로 실업률이 오르기 시작한 2007년 후 증가 속도가 빨라지긴 했지만 연구에 따르면 증가한 자살 중 실직과 관련된 건수는 4분의 1에 불과하다. 총기 구입이 용이해졌다는 사실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총기에 의한 자살은 변동이 없는 데도 자살률은 상승했기 때문이다.

이제 자해는 세계적인 문제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의학지 랜싯이 2012년 12월 게재한 ‘세계 질병부담(Global Burdern of Disease, GBD)’ 보고서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가장 큰 위협은 자신이다. GBD의 조정센터인 보건계량평가연구소(IHME)는 이런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맞춤형 데이터를 뉴스위크에 제공했다. 언뜻 보면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인다. 자살률(매년 인구 10만 명 당 자살자 수)은 1990년과 2010년 사이 선진국에서는 하락했다. 전체적으로 봐도 약간 상승했을 뿐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충격적이다.

예를 들어 현재 선진국 전체에서 15~49세의 주된 사망원인이 자해다. 암과 심장병을 훨씬 능가한다. 우리가 질병 퇴치에는 매우 효과적이지만 정신적인 문제는 여전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2010년 세계 전체에서 자해는 전쟁, 살인, 자연재난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모든 연령층을 합하면 자살은 건강한 사람들의 삶에서 3600만 년 이상을 빼앗아갔다. 더 잘 사는 나라에서는 지구상의 단 세 가지 질병만이 그보다 더 큰 위해를 가한다.

하지만 이 역시 공식 통계를 믿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음독 자살과 낮은 부검 비율을 감안하면 실제 자살률은 훨씬 높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웨스트버지니아대의 이언 로켓은 그보다 최소한 30%는 더 높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자살이 살인의 3배나 된다는 뜻이다.

2012년 가을 세계보건기구(WHO) 추정에 따르면 세계의 자살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60% 증가했다. 거기엔 자살행동의 증가, 사람을 서서히 좀먹는 생각과 계획, 공식적인 사망 1건 당 25건의 기도가 있는 데 따르는 엄청난 사회 비용은 포함되지도 않았다.

GBD의 정신·행동 건강 그룹을 이끄는 하비 화이트포드에 따르면 그 배경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개도국의 경제 급성장 속에서 더 가속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다. 기본적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곳에선 사람들이 비위생적으로 가난하게 살기 때문에 수명이 상대적으로 짧다. 그러다가 경제가 발전하면서 기대수명도 늘어난다. 그런 과정의 도중에 넘어서면 되돌아갈 수 없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가 있다. 그 ‘루비콘 강’을 건너면 저승사자가 아니라 ‘거울 속에 비치는 나 자신’이 죽음을 부른다.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세계로서는 섬뜩한 일이다. 그러나 새천년 들어 자살 부담을 두려워해야 할 더 큰 이유가 있다. 중년층이 이끄는 자살 추세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에선 10대와 20대 초반의 자살률이 줄었다. 노년층에서도 줄거나 변동이 없었다. CDC와 GBD 통계가 보여주듯이 전체 증가분의 대부분은 단일 연령층이 이끈다. 한때 행복한 삶을 누렸던 45~64세대를 말한다. 선진국의 베이비붐 세대다.

CDC 보고서에 따르면 45~64세 미국인의 자살률은 지난 10년 동안 30% 이상 늘었다. 좀 더 세분화하면 중년 백인 남성의 자살률이 50% 이상 증가했다. 그들이 분리 독립해 국가를 세운다면 그 나라는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을 것이다. 선진국 전체에서 40대 남성의 제1 사망 원인이 자살이다. 50대에선 자살이 5대 사망 원인 중 하나에 든다. 1990년 이후 그 두 연령층 모두에서 자살 부담이 두 자릿수로 증가했다.

중년 백인 여성의 경우 상황은 더 충격적이다. 같은 기간에 그들의 자살률은 60% 늘었다. 약물(주로 처방약)로 자살을 기도해 응급실을 찾는 사례도 비슷하게 증가했다. 얄궂게도 그들은 병을 치료해주는 약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 고소득 국가의 여성들 사이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40대 초반 여성의 사망 원인 중 자해가 유방암 바로 다음으로 2위다. 30대 여성에서는 자해가 제1의 사망 원인으로 부상했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생 여정의 절반에서 어두운 숲에 둘러싸였네.” 그가 지금 ‘지옥편’을 쓴다고 해도 그 문구는 바꿀 필요가 없을 듯하다.

미국에서는 럿거스대의 줄리 필립스가 처음으로 중년의 자살을 깊이 파고 들었다. 2010년 필립스와 한 동료는 “중년이 자해의 새로운 위험지대”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일부 논평가들은 이를 베이비붐 세대에 관한 재미 있는 사실 중 하나로 치부했다. 지난 5월 초 필립스는 두 번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베이비붐 세대가 유독 자살 성향이 강한 지 확인하려는 연구였다.

필립스는 지난 80년 동안 축적된 미국의 자살 데이터를 검토하면서 나이, 동료 효과, 해당 시점의 사건이 미친 영향을 분리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현재는 베이비붐 세대의 자살률이 가장 높지만 1945년 이후 태어난 모든 연령층이 예상보다 더 높은 자살 위험을 보여주었다. 모두가 베이비붐 세대보다 더 높은 자살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지난 10년의 자살률 증가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심한 불황, 총기 접근의 용이성, 노화하는 반문화 때문에 나타난 현상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어둡고 더 깊은 추세를 반영한다. 필립스는 이런 추세를 두고 ‘자살의 새로운 역학(new epidemiology of suicide)’이라고 불렀다. 지난 10년 동안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지각구조의 변화가 우리를 자살로 돌진하게 만들었으며 앞으로 더 심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필립스는 “베이비붐 세대는 빙산의 일각일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1970~80년대 10대 자살이 증가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사는 방식에 문제가 있어서 자녀들이 우리와 어울리기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문제는 그와 다르다. 그러나 불길하기는 매한가지다. 인생의 절정에서 사람들이 삶을 포기한다는 사실은 삶의 본질에 관해 무엇을 말해줄까? 현대 세계에서 무엇이 그토록 잘못됐을까?

필립스는 그 다음 연구에서 자해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거대하고 가차없는 사회 변화를 찾아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의심 가는 변화는 여럿이다. 혼자 살거나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병과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도 증가했다. 나이가 들어도 사람들은 종교를 멀리한다. 파산, 의료비, 장기 실업도 늘었다.

대개 사회학자들은 사회가 구성원들에게서 자기 통제력, 개인 존엄성, 또는 자신들보다 더 큰 무엇과 연결되는 것을 빼앗으면 자살률이 높아진다고 믿는다. 19세기 말 사회학 창시에 일조한 프랑스의 에밀 뒤르켕이 그 시조다. 그는 “가장 개인적인 행동”인 자살이 “사회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아들이 자살하고 그 가족이 자살 이유를 간절히 찾을 때 ‘사회적 사실’은 고통을 완화해주지도 미스터리를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보건 관리가 자살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검토할 때 ‘사회’는 완전히 다른 이론 없이는 싸울 수없는 한낱 환영에 불과하다.

지난 3월 어느 맑은 날 태러해시에서 토머스 조이너를 만났다. 희망을 느낄 수도 있고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쾌청한 날이었다. 봄은 자살 시즌의 시작이다. 봄부터 매일 자살 사망자가 서서히 늘어 한여름이면 최고조에 이른 뒤 가을과 겨울로 갈수록 줄어든다. 19섹기 프랑스의 한 연구자는 자살 욕구가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기 쉬운 기온을 측정했다. 섭씨 27도였다. 상당히 쾌적한 기온이다.

하지만 도대체 왜 봄인가? 화려한 벚꽃이 왜 목구멍 가득히 슬픔을 밀어 넣을까? 조이너는 아버지가 자살한 후 수년 동안 자살에 관한 그런 기이한 사실들을 수집했다. 사회자체 만큼이나 오래된 기이한 조건들의 모음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에는 수집할 만한 그런 조건이 별로 없었다. 있다고 해도 모욕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상반기에 자살 연구가 프로이트 방식으로 발전했다. 자살은 내면을 향하는 살인적인 분노 때문에 일어난다는 전제였다. 자기 색정적 욕구가 첨가된 ‘죽음을 향한 욕구’로 이해됐다. 조이너의 아버지가 자기 색정과 죄책감의 치명적인 소용돌이 나락에 떨어진 남자였을까? 조이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1993년 조이너가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은 자해에 관한 온갖 사실들로 가득했지만 대부분은 봄이 자살의 계절이라는 개념처럼 황당했다. 자살미수 5건 중 4건이 여성에 의한 것이라면 실제 자살 5건 중 4건이 남성에 의한 것인 이유가 뭔가? 대도시와 아름다운 건축이 자살 유혹을 일으킨다면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과 공원도 자살을 부르는 이유가 뭔가? 매춘부, 운동선수, 폭식증 환자의 자살 위험은 평균보다 높지만 그들의 다른 공통점은 뭔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쌍둥이가 상대적으로 자살률이 낮은 이유는 뭔가?

조이너는 텍사스대 메디컬 브랜치에서 첫 직장을 가졌을 때는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 후 실제로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직접 자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의사의 입장이었다. 이들 중 누가 실제로 자살할 가능성이 클지 판단해야 했다. 텍사스 주법에 따르면 그는 자살 가능성이 높은 환자를 격리해서 감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병원에는 그들을 수용할 공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임박한 위협을 구분할 방법이 필요했다. 밤새 잠도 못 자고 그들을 감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위험한 환자를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이전에 나온 이론들은 그 답을 얻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잘 알려진 100가지 이상의 ‘위험인자’도 소용 없었다. 정의가 너무 광범위하고 대다수 환자는 한가지 이상의 인자를 갖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가족간 갈등, 전투 경험, 어린 시절 당한 학대, 수면 장애, 마약이나 알코올 남용, 죽을 수 있는 수단의 접근성, 자살 목격, 이전의 자살 미수, ‘외톨이’라는 느낌, 분노, 자신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독신자, 동성애자, 최근 배우자를 잃은 사람, 갑자기 실직한 사람, 말기 중환을 앓는 사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들은 전부 자살할 위험이 높았다. 하지만 그중 살고 싶어하는 사람과 죽고 싶어하는 사람, 실제로 자살할 사람을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인자는 무엇일까? 그 문제가 이 분야에 나 있는 커다란 구멍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부터 실제 자살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99.5%가 옆길로 샌다(실행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머지 0.5%는 왜 그런 생각을 실행에 옮길까?

조이너는 많은 시간을 환자와 함께 보내고, 논문을 검토하고, 기억을 되새긴 후 드디어 영감을 얻었다. 모든 것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왜 사람들은 자살할까? “자살을 원하기 때문이고 자살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십 가지 위험인자가 하나의 공식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죽고 싶은 욕구와 죽을 수 있는 능력 둘다가 있을 때 자살한다.” 조이너는 ‘욕구’와 ‘능력’을 분석하면서 자살로 이어지는 진정한 길을 발견했다고 믿는다.

그는 “명확하게 정의되는 위험지대”라고 말했다. 세 가지 조건이 겹쳐져 영혼의 어두운 골목을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그 조건들은 명확히 정의되며 아주 드물게 완전히 겹쳐져 자살이라는 비교적 드문 행동이 나타난다. 그러나 섬뜩한 점은 각 조건 자체는 극단적이라거나 특이하지 않으며 그 합집합도 그렇게 정신병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 세 가지 조건이 자살의 벤다이아그램을 구성하는 3가지 원이다. 우리 모두는 자주 그 각각의 원 안에 들어가거나 그 부근으로 다가간다. 그러다가 그 중앙의 겹쳐지는 부분에 들어 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린다. 조이너가 말하는 자살의 조건들은 일상생활의 조건들이다.

그는 그 첫 조건을 “낮은 소속감(low belonging)”이라고 부른다. 그의 공식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조건이다. 조이너는 ‘죽고 싶은 욕구’가 외로움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소속감이나 유대감을 가지려다가 좌절된 상황을 말한다. 결혼한 사람부터 한번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까지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볼 때 그 사이에서 연속적으로 자살률이 3분의 1씩 높아지는 이유를 거기서 찾을 수 있다.

또 이혼한 사람이 자살 위험이 가장 크다는 사실과도 일치한다. 반면 쌍둥이는 자살위험이 적고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는 거의 자살 위험이 없다. 한 연구에 따르면 여섯 자녀를 가진 어머니는 자녀가 없는 어머니보다 6배나 안전하다. 그런 사람은 자해가 아니라 과로나 걱정 때문에 사망할 수 있다.

조이너는 소속감을 가지려는 욕구가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때로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그런 욕구가 표출된다고 말했다. 그가 예로 든 한 금문교 자살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금 나는 다리로 걸어간다. 걸어가는 동안 한 사람이라도 나에게 미소를 보내면 뛰어내리지 않겠다.”

그 유서를 쓴 사람은 결국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혼자였다. 사실 우리 중에도 혼자인 사람이 적지 않다. 요즘은 얽매이지 않는 것이 새로운 ‘자유’다. 결혼을 미루고, 이혼을 쉽게 하고, 아이를 적게 갖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줄이고, 출세를 향해 매진하는 하나의 성공 전략으로 간주된다.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이 공동체 의식이 무너져가는 미국 사회를 짚은 책 ‘나홀로 볼링(Bowling Alone)’을 펴낸 지 12년이 지났다. 또 그동안 기술혁명이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공동체 의식이 더욱 허물어졌다.

조사에 따르면 우리 세계가 자신에게 더욱 도움을 주지 않고, 믿을 만하지 않고, 공정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더 괴로운 일을 하는데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급여도 더 적게 받는 세계를 말한다. 쏟아지는 이메일 속에서 인생이 허무하게 지나간다. 그런 상황에서는 조이너가 말하는 ‘호혜적 배려(reciprocal care)’가 없다. 기댈 어깨가 없으면 더 고립된 느낌을 갖는다. 고립감은 치명적일 수 있다.

스티븐 마시는 애틀랜틱지 2012년 4월호 표지기사에서 “페이스북이 우리를 외롭게 만드나?”라고 물었다. 물론 페이스북이 우리를 외롭게 만들지는 않지만 결코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온라인에 의존하는 비중이 클수록 더 외로워진다”고 시카고대 교수로 외로움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인 존 카치 오포가 마시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역도 성립한다. 서로 대면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외로움을 적게 탄다. 그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요즘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갈수록 온라인 한쪽으로만 향한다.

MIT의 심리학자 셰리 터클은 2011년 펴낸 책 ‘홀로 함께(Alone Together)’를 쓰면서 10대와 20대를 중심으로 450명 이상에게 온라인 생활을 물었다. 터클은 그 이전에 쓴 책 두 권에서는 기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이번에는 실제 사람보다 기계에 더 의존하는 슬프고 무미건조한 세계를 발견했다.

심지어 로봇과 섹스를 하는 쪽으로 향하는 장기적인 추세도 확인했다. 까다롭고 너저분해질 수 있는 인간 관계보다 기계와 함께 하기를 선호하는 미래다. 미국의 최대 재회기획사 중 하나인 그레이트 유니언스의 CEO 마크 실바는 실제 대면 회합이 10년 동안 쇠퇴하자 최근 “하룻밤 동안 기계를 끄자”는 새로운 마케팅을 시작했다.

소속감이 생명을 지켜주는 힘이라는 사실은 미국에서 흑인과 히스패닉의 자살률이 백인보다 훨씬 낮은 이유를 설명해주는지 모른다. 그들은 가난 때문에 서로 의지하고, 신앙과 가족애로 더 오래 유대를 가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 10년 동안 백인 중년층의 자살률이 치솟는 동안 흑인과 히스패닉 중년층의 자살 위험은 1%포인트도 증가하지 않았다(물론 거의 모든 다른 척도에서는 건강 상태가 더 열악하다). 흑인 사회에서는 오래된 농담이 있다. “반지하실 창에선 뛰어내려도 죽지는 않는다.” 빈곤과 억압이 자살률을 낮추는 희한한 힘이 있다는 이야기다.

조이너는 자살의 두 번째 조건을 “남에게 짐이 된다는 느낌(burdensomeness)”이라고 부른다. 외로움만큼 정서적으로 중요한 조건이다. 스스로 유용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살려는 의지를 계속 지탱한다. 가족을 부양한다든지, 친구들에게 도움을 준다든지, 세계에 기여하는 상황을 말한다. 그러나 자신을 무용지물로 보고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고 느끼면 죽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실망시킨다고 느끼면 선택은 분명하다.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실업자가 많아지거나 병상에 누워 있는 날이 길어질수록 자살이 늘어나는 이유다. 스스로 하거나 남을 도와주지 못하고 친구에게서 도움만 받으면 죽음을 원하기 쉽다. 인간은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하는 동시에 영웅주의를 추구하는 종이다. 구원자가 되기를 너무도 좋아하기 때문에 구원 받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자살은 극단적 이기심이나 복수의 행위가 아니라 잘못된 영웅주의에 더 가깝다.

조이너는 자살에 진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믿는다. 만약 그렇다면 바로 이 조건에서 그런 경향이 드러난다. 인간은 자살을 하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다.

호박벌은 자신이 기생충에 감염되면 벌집 전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은 벌집을 포기하고 나가서 자살한다. 진딧물도 비슷한 행동을 한다.

종족 보존을 목적으로 ‘자폭’을 통해 최대 천적인 무당벌레를 불구로 만든다. 사자 수컷은 초원에서 자신을 희생한다. 가족 구성원이 도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려고 공격하는 무리에게 자기 목을 드러내 준다.

인간의 DNA에도 비슷한 본능이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런 본능이 연약함이나 현대 삶의 따분함과 불편하게 충돌하면 자살 충동이 생겨날 수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무용지물처럼 느끼도록 만드는 사회가 있었을까? 모두가 너무 가난해 정부의 보조금을 받고 사회안전망에 갇혀 사는 상황 말이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갈수록 비대해지거나 병들어간다. 중년층의 5명 중 1명은 다발성 만성질환에 시달린다. 10년 전의 두 배다. 조이너의 생각이 옳다면 이런 상황이 신체 만큼이나 정신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그는 이런 유서를 봤다고 말했다. “적자생존이다. 안녕. 난 부적격자다.”

경기침체로 자살의 새로운 추세를 설명할 순 없다. 그러나 장기적인 경제구조의 변화가 상당수의 자살에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경제 전문가들은 최근에야 소득 불균형의 심리적 영향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부와 행복 수준을 자살 위험과 연계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샌프란시스코의 연방준비은행에서 일하는 메리 C 댈리가 쓴 보고서에 따르면 이웃보다 10%를 적게 번다면 자살할 확률이 4.5% 더 높다. 이전 연구에서 댈리와 동료들은 국가 전체의 ‘행복 수준’에 따라 자살률이 올라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슬프고 외로우면 살기가 어렵다. 더구나 다른 사람이 너무도 행복해 보여 상대적 박탈감을 심하게 느낀다면 살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자신이 쓸모 없다고 느끼는 것이 자살 위험을 높인다는 조이너의 생각이 옳다면 자살에 취약한 새로운 계층이 생긴 이유를 경제의 장기적 변화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지난 30년에 걸쳐 미국 인력이 육체노동에서 정신노동으로 옮겨가면서 여성이 모든 근로자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남성과 같거나 더 높아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성도 과거의 남성처럼 맡은 역할을 제대로 못해낼 때 자살 위험이 높아지는 듯하다. 포틀랜드 주립대의 사회학자 우혜영 교수에 따르면 고학력 백인 여성에게서 자살률이 치솟았다. 그 계층에서는 학력이 높으면 기회도 많지만 자해도 그만큼 많아진다.

중년 백인의 경우는 그 반대다. 학력이 낮을수록 자살 위험이 높다. 자살률이 가장 높은 주는 미국 남부와 서부 산악지대에 몰려있다. 백인과 총기가 많은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자해의 가능성이 높은 조합이다. 이 ‘자살벨트’는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체면 문화’도 강하다.



10대와 20대 초반도 실업의 치명적인 효과를 알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와이대 사회학자 크리시아 모사코스키는 젊은 시절 오랫동안 일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이 중년에 다가가면서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걸릴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중에 직장에서 성공해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정신건강 관련 장애보험급여 청구의 대부분이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현재 30대이며 갈수록 우울증이 심해진다.

하지만 사실 요즘은 모든 사람에게 전부 해당하는 이야기다. 미국과 세계 모두에서 자살률이 증가하는 추세는 행동과 정신건강에서 일어난 파괴적인 변화를 반영한다.

GBD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 임상 우울증, 불안증, 알코올과 약물 남용, 다른 정신 문제 때문에 잃어버린 삶의 기간이 37% 늘어났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이런 문제는 전 세계의 주된 장애 원인이다.

조이너는 자살의 마지막 조건을 “두려움 없음(fearlessness)”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죽을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조이너는 그 능력을 충분히 갖추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스스로 죽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오래 버티도록 만들어졌고 정신은 죽음에서 피하도록 몸을 조절한다.

대다수는 마지막 순간 움찔하는 이유다. 그들은 차로 돌진하려다가 브레이크를 밟거나, 뛰어내리려다가 난간에서 멈추거나, 음독을 하고는 다른 사람에게 위를 세척해 달라고 애원하거나, 철길에 누웠다가 기차가 오면 비켜나거나, 아니면 의도한 피해를 자기 몸에 가하기 전에 기절해버린다.

따라서 자살은 용기가 없으면 하지 못한다. 고통이 없는 것도 아니며, 수학 시간에 교실에서 벗어나려고 화재경보기를 당기는 것처럼 쉽지도 않다. 조이너는 “어떤 식이든 용기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런 ‘겁 없는 집요함’은 칭찬할 일은 아니지만 허약하거나 충동적이지도 않다.

조이너는 자살하려면 오랜 시간에 걸쳐 고통이 몸에 배야 하고, 폭력에 무감각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운동선수, 의사, 매춘부, 폭식증 환자의 자살 위험이 높다는 점을 지적했다. 비명을 지르려는 몸의 본능을 억제한 전력이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군인들의 자살 수수께끼를 푸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일반 대중은 약간 안심해도 되는 듯하다. 아무튼 우리 대다수는 그런 부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이너는 겁없음에도 옆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디어에서 폭력에 노출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오랫동안 논란이 많았지만 이제는 사실상 일단락된 문제다. 미국 소아과학회(AAP)는 2009년 이렇게 결론지었다.

“미디어 폭력과 공격적인 행동 사이의 연관성은 칼슘 섭취와 골질량 사이, 납 섭취와 낮은 지능, 콘돔 회피와 에이즈 감염 사이의 연관성보다 더 크며, 흡연과 폐암 사이의 연관성과 거의 맞먹는다.” 한 사회심리학자는 학생들에게 다른 남자의 목안으로 총을 밀어 넣는 남자의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보다 더 폭력적인 미디어에 노출된 학생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무감각해진 것이었다.

조이너는 약 10년 전 자신의 이론을 처음 세웠다. 10년이면 학계에서는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다. 진화가 아직도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곳이 학계다. 그러나 이미 그의 아이디어는 직접적인 반박을 극복했다. 그는 학자들과 정부관리들 앞에서 설득력 있게 그 이론을 설명했다.

구겐하임과 록펠러 재단, 미 국립보건원(NIH), 미 국방부가 그에게 연구 자금을 댔다. 조이너는 ‘왜 사람들은 자살로 죽는가(Why People Die by Suicide, 2005년)’와 ‘자살에 관한 허구와 진실(Myths About Suicide, 2010년)’이라는 책 두 권과 수백 건의 기고문에서 시험 가능한 모델을 제시했다.

조이너는 창으로 플로리다의 강한 햇볕이 쏟아지는 사무실에서 기자와 자살을 논하면서 회전의자에서 몸을 부드럽게 돌렸다. 그는 신중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나 컴퓨터 부근에 세워진 트로피 크기의 은색 물고기와 똬리를 튼 뱀 박제를 보자 그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건 피라냐죠”라고 그가 설명했다. “저건 방울뱀이고요.”

그는 자신만이 아니라 동족을 죽이는 것도 어렵다는 원칙을 깨우치려고 그 동물들을 보관한다고 말했다. “피라냐는 인간을 죽이지만 그들이 서로 죽이진 않는다. 방울뱀도 그렇다. 송곳니와 독을 갖고 있지만 서로 몸싸움만 한다. 자연의 중요한 법칙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버지는 갈수록 외로워졌다. 경력을 쌓아 직장에서 성공하면서 옛 친구들을 잃었다. 일로써 정체성을 형성했기 때문에 은퇴하자 갑자기 목적의식을 잃었다. 소속감이 없어지면서 고립감이 엄습했다. 그 다음 자신이 가족에게 짐이 된다는 느낌이 찾아 들었다. 과거엔 자신이 집안의 기둥이었지만 우울증으로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조이너스의 이론에 따르면 그래서 아버지에게 죽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에게서 죽을 수 있는 능력은 더 일찍 훨씬 서서히 뿌리를 내렸다. 조이너의 아버지는 평생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다. 사고도 여러 번 당했고, 스포츠로 부상도 자주 입었다. 또 그는 낚시꾼으로 칼을 쓸 줄 알고 손에 피를 묻히는 데 익숙했다. 조이너는 아버지와 단 둘이 떠난 낚시 여행을 돌이켰다.

파도 심한 대서양에서 작은 요트를 몰고 나갔다. 갑자기 폭풍이 닥쳤다. 아버지는 요트가 뒤집히지 않도록 하려고 파도와 싸웠다. 그러다가 운전대가 부러졌다. 아버지는 부러진 운전대의 나머지 부분을 계속 잡고 배를 조종하려고 애썼다. 그의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궁극적으로 바로 그것이 그를 죽였다고 조이너가 말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칼에 엎어질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강인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위험인자를 표시하는 3가지 원이 겹쳐진 중심에 들어섰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러듯이 조이너의 아버지도 수십 년 동안 그 원들을 들락거렸다. 하지만 우리 모두와 달리 그는 나중에 그 중심으로 걸어 들어갔다.

요즘 조이너는 자살 예방으로 방향을 돌렸다. 자살에 관한 그의 생각이 옳다면 그 3가지 조건 중 하나를 물리치는 능력이 목숨을 구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치료 받게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우선 비용도 문제다. 그러나 무엇보다 치욕과 오점 문제가 있다.

자살 문제는 주된 사망 원인인데도 정부나 저명인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대학들도 도외시한다. 조이너는 생각을 바꿔야한다고 말했다. “자살이 쉽거나 고통이 없거나 비겁하거나 이기적이거나 복수 행위거나 경솔한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그런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나서 자살 예방에 접근해야 한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검은 반도체’ 김 수출 역대 최고기록 달성…10억달러 수출 청신호

2이복현 "상법 개정보다 자본시장법 개정이 합리적"

3롯데, 해외 부실면세점 철수 검토…케미칼, 자산매각 추진

411월 기록적 폭설에 車사고 60% 급증…보험료 인상 조짐

5대한항공-아시아나 합병 4년만에 승인…통합 LCC도 출범

6이재명 “‘국장’ 떠나는 현실...PER 개선하면 ‘코스피 4000’ 무난”

7롯데바이오로직스 설립 2년 만 수장 교체…신임 대표는 아직

8상법 개정 되지 않는다면 “국장 탈출·내수 침체 악순환 반복될 것”

9열매컴퍼니, 미술품 최초 투자계약증권 합산발행

실시간 뉴스

1‘검은 반도체’ 김 수출 역대 최고기록 달성…10억달러 수출 청신호

2이복현 "상법 개정보다 자본시장법 개정이 합리적"

3롯데, 해외 부실면세점 철수 검토…케미칼, 자산매각 추진

411월 기록적 폭설에 車사고 60% 급증…보험료 인상 조짐

5대한항공-아시아나 합병 4년만에 승인…통합 LCC도 출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