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C I&C Chairman Lee, Chu-Yong - “나는 개척자, 아들은 기업가”
KCC I&C Chairman Lee, Chu-Yong - “나는 개척자, 아들은 기업가”
“아들 놈은 지 잘난 맛에 살아서 싫어요.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죠. 후계자 문제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물려준 거에요.” “아버지는 딸만 좋아하고 아들은 미워해요. 아버지랑 맘이 안맞아서 가출도 많이 했어요.”
서로 불만을 털어놓는 부자(父子). 언뜻 보면 불화가 있는 것 같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정겹기만 하다. 이들은 ‘컴퓨터 산업의 개척자’로 평가 받는 이주용(81) KCC정보통신 회장과 그 뒤를 이어 경영에 뛰어든 아들 이상현(48) 대표다. 서울 강서구에 있는 KCC오토타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넘어서 동지와 같은 느낌을 준다. 부자가 함께 인터뷰에 나선 것은 포브스코리아가 처음이다.
이 회장은 자신을 “기업가가 아니라 파이오니어(개척자)”라고 소개했다. “상현이가 기업가예요. 나보다 기업 운영을 더 잘합니다.” 개척자와 기업가의 절묘한 조화 덕분일까. KCC정보통신은 많은 난관을 이겨내며 47년을 이어오고 있다.
이주용 회장, 한국에 컴퓨터 도입 산파 역할이 회장은 미국 IBM에 입사한 최초의 한국인, 한국 최초의 IT 기업 설립 등 ‘최초’라는 기록을 많이 갖고 있다. 그는 IBM이라는 좋은 우산 밑에서 넉넉한 월급에 ‘능력있는 엔지니어’로 대접 받으면서 미국에 뿌리 내릴 수도 있었다. 1960년대 초반 직원이 10만 명이었던 IBM의 연매출은 한국의 국민총생산(GNP) 30억 달러보다 많았다.
하지만 1966년 이 회장은 안락한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생산성본부 산하 전자계산소(KCC정보통신의 전신)로 자리를 옮겼다. 컴퓨터 불모지인 한국에 컴퓨터를 소개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이다. “앞으로 컴퓨터 세상이 된다”는 이 회장의 말에 컴퓨터가 꼭 필요했던 정부 부처, 기업, 은행권 등에선 ‘비싸다’ ‘컴퓨터를 어디에 쓰냐’ ‘주판이 훨씬 좋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또 다른 산업혁명은 컴퓨터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으로 컴퓨터 전도사를 자처했다. 이 회장이 자신을 개척자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 회장의 활동은 한국 컴퓨터 도입 역사와 일치한다. 1967년 Facom222 컴퓨터를 최초로 도입하고 한국은행이 선두로 나선 금융 전산화 사업 등을 이끌었다. 키펀치 수출사업, 주민등록 전산화, 김포국제공항 실시간 전산화, 철도청 온라인 시스템 등 컴퓨터를 통한 전산화 작업도 KCC정보통신 손에서 이뤄졌다. 한창 잘 나갈 땐 연간 100만 달러가 넘는 외화를 벌어들였다.
당시 이 회장은 저돌적이었다. 좋은 계약을 따내기 위해 기상천외한 계약서를 내밀기도 했고, 한국인이라고 깔보는 외국인에겐 욕도 스스럼없이 했다. “사명감과 의욕이 넘칠 때였어요. 돈 벌겠다는 생각보다 보람 있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거칠 것이 없었죠.” 그는 주민등록번호 전산화 작업과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했던 일을 가장 뿌듯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 회장은 60세의 젊은(?) 나이에 현직에서 물러났다.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두고 있던 두 명의 임원에게 문제가 생겼다. 한 사람은 병에 걸렸고, 다른 한 사람은 퇴사해 회사를 차렸다.
대타로 내세운 이가 바로 둘째인 아들 상현 씨였다. 이 회장은 1990년 삼성전자에 다니던 상현 씨를 회사로 불렀다. KCC같은 조그만 회사는 안다닌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아들은 입사조건으로 아버지에게 ‘결혼과 해외 유학’을 내걸었다. 당시 상현 씨 나이 26세였다. 상현 씨는 결혼을 하고 1년 동안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상현 씨가 유학을 다녀온 뒤 기획조정실장으로 복귀했을 때 회사 상황은 난파선 같은 처지였다. IT 패러다임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당시 KCC정보통신은 대형 컴퓨터를 파는 회사였지만, 시장은 미니컴퓨터나 워크스테이션 등 오픈시스템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 KCC정보통신을 먹여 살렸던 미국의 프라임컴퓨터라는 회사도 무너졌다. KCC정보통신의 일감은 떨어지고 매출도 추락했다. 상현 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직원의 마음을 돌리는 것.
“이름도 안까먹어요. 당시 문 모 대리가 회사를 나간다고 해서 나와 함께 회사를 살려보자고 붙잡았던 기억이 나요. 다행히 4년만에 회사 연매출이 2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늘어 회생할 수 있었죠.”
아들의 말을 듣고 있던 이 회장은 “승계 시기가 적절했다”고 말했다. “컴퓨터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데, 나는 그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었어요. 무엇보다 지쳐 있었습니다. 아들이 회사를 많이 성장시켰죠. 아들은 기업을 운영하는 방향이 저와 많이 달라요. 아들은 능력 있는 기업가입니다.”
아들의 반응은 정반대다. “초창기에는 아버지가 전혀 도와주지 않아서 힘들었어요.” 20대였던 그가 상대해야 할 비즈니스 파트너는 대부분 50·60대였던 것. “나이가 훨씬 많은 분들을 만나 사업 이야기를 하는 게 힘들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옆에서 조그만 도와줬으면 하는 생각이 절실했는데, 지켜만 보셨어요. 너무 야속했습니다.”
이 회장이 아들을 지켜보기만 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자가 3대 가기 어렵다’는 한국 속담이 있다. 스스로 부를 일궈낸 1세대에 비해 좋은 환경에서 자란 2·3세대는 절약과 검소함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1세의 눈에는 2·3세의 행동거지가 불만이고, 2·3세는 1세와 세대차이가 난다며 반발하기도 한다. 부에 대한 가치관과 철학이 세대 간의 불화를 낳는 것이다.
이 회장은 아들이 부잣집 아들로 안주하는 게 아닐까 걱정됐다. 상현 씨가 대학교 4학년 때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자동차를 샀을 때 “대학생이 무슨 자동차냐”며 불같이 화를 내며 차를 압수한 것도, 아들이 백화점에서 사온 옷을 보고 “나는 만원짜리 입는데, 왜 그런 비싼 옷을 입냐”면서 꾸짖은 것도 모두 아들을 위해서였다. 이 회장은 스스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울산의 부자였죠. 하지만 아버지에게 기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가장 큰 자랑입니다. 상현이도 공짜만 바라지 않도록 교육시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젊었을 때 아버지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해 자주 충돌했다. “아버지 때문에 가출한 적도 많았다”고 말할 정도다. 심지어 아버지와 의견 충돌이 생겨 회사를 그만둔다며 일주일 동안 출근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회사를 성장시키면서 이 대표는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내 회사가 아니라 임직원 모두의 회사입니다. 함께 고생하면서 회사와 임직원의 소중함을 알게 됐습니다.” 이 대표가 몇 날을 고민해서 만든 경영철학 ‘KCC Way’의 처음은 ‘임직원의 행복 추구’와 ‘고객 감동’이다.
이 회장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면 안된다”고 했다. “인생을 근면하게 열심히 살면 돈은 뒤따라와요. 그리고 번 돈은 사회에 환원해야 합니다. 아들에게 재산을 주는 것보다 그런 교육을 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회장은 1978년 부친이 작고한 후부터 종하장학재단을 운영한다. 30여 년 동안 고교생과 대학생 2000여 명에게 10억원이 넘는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 회장은 선친이 남겨준 울산 지역 땅도 장학재단에 쓸 계획이다.
대기업과 경쟁 차근차근 대비하는 이상현 대표이 회장이 컴퓨터 산업에 한 우물을 파면서 KCC정보통신을 운영했다면 이 대표는 사업 다각화로 KCC정보통신을 중견기업 반열에 올려놨다. IT 사업 분야는 KCC정보통신과 관계사인 시스원이 맡아 지난해 매출은 1700억원에 이른다. 이 대표는 2004년부터 혼다 브랜드를 시작으로 수입차 시장에 뛰어들어 재규어, 메르세데스-벤츠 등 7개 수입차의 수입·판매를 하고 있다. KCC정보통신과 계열사의 지난해 매출은 5000억원을 넘었다. 올해 매출은 8000억원이 목표다.
KCC정보통신은 이제 더 이상 중소기업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제는 대기업과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2017년은 KCC정보통신 창립 50주년이다. 이 대표는 “그때가 되면 우리 회사는 20억원 미만의 사업은 수주할 수 없다”며 “대기업과 경쟁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 회장의 회고록 『반세기 컴퓨터와 함께한 나의 인생』의 마지막 구절은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로 끝난다. 이 회장과 이 대표의 대화를 들으면서 그 구절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한국의 컴퓨터 산업을 일으킨다는 신념을 믿고 거침없이 달렸던 사업가의 얼굴은 평화롭다. 그 비결을 물었다.
“2남2녀 자식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고, 손자들도 모두 잘 크고 있습니다. 지난해 팔순 잔치에 모인 가족을 보면서 ‘가족이 내 자랑’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30여 년 동안 컴퓨터 사업을 위해 열심히 살았어요. 이제는 욕심을 버리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저는 ‘베리 해피한 가이’입니다.”
두 부자의 모습과 행동, 말 속에서 ‘부전자전’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하나금융, ESG 스타트업 후속투자 유치 지원
2"합성니코틴 유해성 높아 규제 필요"…개정안 연내 통과 될까
3“협력사 동반성장 기여”…신세계인터내셔날, 중기부 장관상 수상
4프로먹방러 히밥과 맞손…세븐일레븐 ‘럭히밥김찌라면’ 출시
5美 투자은행 모건스탠리, 자금세탁 방지 의무 소홀 정황
6"아이브, 탄탄하고 뛰어나지만"…뜨려면 '이것' 필요하다
7만두 이어 K-푸드로…CJ제일제당, ‘소바바치킨’ 미·일·유럽 시장 공략
8박지현, 욕망에 취한 '전라 노출'…무려 연인 눈앞에서?
9양세형, 박나래랑 단둘이 마카오…"촬영 본분 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