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노래’의 힘 극대화
‘듣는 노래’의 힘 극대화
최근 미국 과학자들이 발표한 연구 결과 중에 흥미로운 내용이 한 가지 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잃었던 옛 기억까지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JTBC의 ‘히든 싱어’가 왜 세 번째 시즌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늘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매주 토요일 밤 ‘히든 싱어’를 보면서 우리는 잃었던 옛기억을 하나씩 끄집어낸다.
‘히든 싱어’가 2012년 말 파일럿 프로그램(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 되기 전 시청자 반응을 살펴 보기 위해 시험삼아 만드는 것)으로 첫 전파를 탈 때만 해도 이처럼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이 프로그램의 조승욱 PD는 제작진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처음 제작진이 생각했던 것도 뛰어난 모창능력자들이 주는 재미 정도였다. 그런데 참가자들의 감동적인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나오면서 예상을 뛰어넘는 장면이 속속 나왔고,오히려 제작진이 매회 큰 선물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아들이 아버지 목소리 못 맞춰‘히든 싱어’가 주는 가장 큰 재미 중의 하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출연가수의 ‘표정’이다. 처음에는 ‘설마 내 노래를 내가 부르는데 아마추어한테 밀리겠어’라는 듯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다가도 참가자들의 노래를 듣고 난 뒤 패닉에 빠지는 원조 가수의 표정은 매회 보고 또 봐도 재미있다.
스튜디오에 나온 원조 가수의 지인들이 원조 가수 목소리를 두고 “3번은 절대 아니다.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단언하는 장면에서도 시청자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시즌1에 출연했던 조관우의 경우 조관우의 아들이 아버지 목소리를 맞히지 못하는 장면도 나왔다.
보통 ‘레전드급’ 가수들을 모시는 음악 프로그램의 경우 주인공 가수를 계속 칭찬하고 우대해주지만, ‘히든 싱어’는 발칙하게도 출연한 톱가수를 ‘들었다 놨다’ 하는 매력이 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스토리다. 모창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참가자들의 사연이 밝혀지는데, 이들은 단순히 유명 가수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앵무새가 아니다. 출연한 원조 가수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고 살아가는 진심 어린 ‘스타바라기’가 대부분이다.
이쯤 되면 출연 가수는 과거 자신이 간절하게 가수를 꿈꿨던 오래전의 초심을 떠올린다. 또 ‘나를 이토록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걸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직접 경험한 후 울컥해서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시즌1에 출연했던 백지영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다. 이건 직접 겪어 봐야만 안다”며 모창 출연자들을 끌어안았다.
그래서일까. TV 카메라 앞에서 좀처럼 진심을 말하지 않던 톱 가수들이 아마추어 출연자들 앞에서 갑자기 속마음을 꺼내 보이기도한다. 시즌3에 출연한 이선희는 “30년 가수 생활을 하는 동안 늘 즐겁지만은 않았다”고 고백했다. 시즌2에 나왔던 임창정은 자신의 모창 능력자들이 과거 그의 가수 은퇴 선언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고 마음이 아팠는지 고백하자 “가수 은퇴를 선언했던 그때는 내가 정말 오만 했다”고 털어놓았다. 시즌3에 출연한 이재훈은 최종 우승을 확정한 후 눈물을 흘리며 “과거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HOT를 꺾고 1위를 했을 때도 울지 않았는데, 지금은 눈물이 나온다. 정말 이상하게도 이 프로그램을 녹화하는 동안 내가 가수 생활을 했던 그 모든 추억이 눈앞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런데 사실, 세 번째 시즌까지 프로그램이 이어지면서 이런 과정은 이미 ‘히든 싱어’의 패턴처럼 굳어진 듯하다. 보는 사람은 이제 가수의 표정이 시간대 별로 어떻게 변할지 미리 알고 있다는 말이다. 모창 능력자가 원조 가수의 모든 것을 닮고 싶어했다고 고백하는 사연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히든 싱어’에는 변함 없이 마음을 울리는 포인트가 있다. 바로 노래다. 조승욱 PD는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가수와 모창능력자, 그리고 노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연출하면서 ‘아, 노래의 주인은 가수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히든 싱어’에는 출연 가수의 히트곡이 네 곡 나온다. 모두가 대중의 귀에 익은 곡이다. 하지만, 요즘 가요계의 사정은 다르다. 2014년 현재 대중가요 시장은 스트리밍 서비스로 손쉽게 히트곡을 듣고, 또 그 곡이 금세 잊혀지는 추세다. 그런데 ‘히든 싱어’에 나오는 노래는 다르다. 남진·주현미·이선희·김종서·자우림·쿨·임창정 등 출연 가수들의 노래는 시청자들이 과거 CD나 LP, 혹은 카세트테이프로 구입해서 듣던 ‘소중한’ 노래들이다.
‘히든 싱어’에 이 노래들이 다시 울려나올 때, 그리고 그 노래가 ‘모창 서바이벌’이라는 독특한 형식 덕분에 부르는 이들의 절실함과 진심이 녹아 든 것일 때, 텔레비전을 통해서나 스튜디오에서 이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은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된다. ‘아, 이 노래들이 원조 가수의 것이자 모창 능력자의 것이고, 또 나의 것이기도 했구나.’
스타와 일반인 어우러져‘히든 싱어’는 다른 음악 프로그램과 비교해 독특한 점이 또 있다. 노래는 들리지만 출연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가수들과 그 무대에 대한 비주얼 측면이 중요해지는 시대에 이런 콘셉트는 어찌 보면 핸디캡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의외의 경험을 하게 된다. 모창능력자 속에서 원조 가수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귀를 쫑긋 세우고 온 신경을 집중해서 노래를 듣는 것이다. 출연자가 숨어서 노래하는 ‘히든 싱어’의 독특한 콘셉트는 역설적으로 ‘듣는 노래’의 힘을 극대화시켰다.
문화평론가 정덕현씨는 ‘히든 싱어’만이 갖고 있는 강점을 크게 두 가지로 꼽았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장점은 흡수하고 단점은 보완했다’는 점과 ‘스타와 일반인이 어우러지는 최근 예능 트렌드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씨는 “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은 몇 년 전 방송가를 휩쓸었지만, 최근에는 전 세계적으로 내리막을 걷는 추세다. 그런데 ‘히든 싱어’에서는 경연이 부가적인 부분이고, 팬미팅처럼 훈훈한 느낌이 더 강하다. 또 요즘 예능 프로그램의 대세라고 할 수 있는 ‘진짜 사나이’(MBC)나 ‘슈퍼맨이 돌아왔다’(KBS)처럼 스타와 일반인의 경계가 허물어진 채 함께 어우러지는 콘셉트도 갖고 있어서 트렌드에 뒤처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히든 싱어’의 한계점도 있다고 덧붙였다. “지나치게 팬미팅 분위기로 흐르면 특정 가수를 조명하는 특집 프로그램처럼 돼버린다. 또한 원본과 복제의 경연이라는 기본 콘셉트는 바꿔 말하면 복제가 존재하기 위해 빛이 나는 원본을 구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과연 원본으로 내세울 만한 가용 자원이 많은지, 그리고 그게 많다고 해도 그들을 모두 쇼에 캐스팅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런 특징 때문에 ‘히든 싱어’는 가수별로 프로그램의 재미와 퀄리티의 편차가 심한 편이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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