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3.0시대 ① 제약업계 - ‘모난 돌’ 될까 노심초사 보수집단 신약개발 · M&A 격랑 앞에 서다
재계 3.0시대 ① 제약업계 - ‘모난 돌’ 될까 노심초사 보수집단 신약개발 · M&A 격랑 앞에 서다
창업자의 2·3세들이 경영 일선에 속속 나서고 있다. 전통적인 사업군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것이 그들의 과제다. 포브스코리아는 신년호부터 ‘재계 3.0시대’ 시리즈를 진행한다. 그들의 전략과 선택, 경영활동이 한국 경제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재계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제약업계다. 2014년 12월 1일 녹십자는 허은철 부사장을 사장에 선임했다. 창업자 고(故) 허영섭 전 녹십자 회장의 차남인 허 사장은 1998년 녹십자에 입사한 이후 목암생명공학연구소 기획관리실, 연구개발(R&D)기획실 등을 거쳐 2009년부터 부사장으로 재직하다 5년만에 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번 인사로 녹십자는 고 허 회장의 동생 허일섭 회장 아래 조순태(전문경영인)·허은철 각자대표 체제로 전환했다. 고 허 회장의 3남 허용준 씨도 2010년부터 녹십자홀딩스 부사장을 맡으면서 경영에 나섰다.
앞서 대웅제약은 2014년 9월 이사회를 열고 윤영환 회장의 3남 윤재승 부회장을 지주사 대웅의 신임 회장으로 선임하며 본격적인 2세 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창업자인 윤영환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추대되며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슬하에 3남1녀를 둔 윤 명예회장은 그간 둘째 아들과 막내아들을 두고 저울질해왔다. 경영수업을 함께 받던 나머지 형제들은 윤재승 회장 취임에 맞춰 모두 경영에서 손을 뗐다.
일동제약 3세 경영인 윤웅섭 사장도 2014년 3월 경영 전면에 나섰다. 윤원영 회장의 장남인 그는 2005년 일동제약 상무로 입사한 후 2011년 부사장 승진에 이어 3년만에 사장으로 취임했다. 동아제약도 2013년 5월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의 4남 강정석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이 강 회장의 주식을 모두 증여받으며 3세 경영체제를 완료했다. 2013년 7월 최성원 광동제약 사장은 창업자 최수부 회장의 갑작스런 별세로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최 사장은 일찌감치 후계자로 지목돼 경영 수업을 받아왔다. 제약업계에 경영진 세대교체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매출 상위권만 보더라도 최근 2~3년 안에 녹십자, 대웅제약, 광동제약, 부광약품 등이 2세 경영을 구축했고 동아쏘시오홀딩스, 보령제약, 일동제약, 삼일제약 등이 3세 경영을 시작했다. 재계에서는 이들 ‘젊은 바람’이 주도할 제약업계의 미래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창업자의 전통적인 경영 방식에서 탈피해 혁신적인 경영스타일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다. 익명을 요구한 제약업계 한 중진은 “2014년 매출 1조원 제약사, 수출 2억 달러 제약사가 탄생 하면서 국내 제약산업이 한 단계 성장했다”며 “2·3세 경영인이 어떤 선택과 집중으로 기업을 운영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명암이 엇갈릴 수 있다”고 말했다.
제약업계를 이해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업력(業歷)’이다. 제약산업은 역사가 100년이 넘는 전통 산업이다. 이 긴 시간 동안 가족경영 체제가 구축됐다. 상위 100개 업체 중 가족경영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 절반을 넘는다. 다른 산업군보다 3세 경영인이 유독 많은 이유다. 특히 오너가 고령 등의 이유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자연스럽게 후계경영이 본격화되고 있다.
특히 중견제약사에서 3세 경영인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안과 분야에 강세를 보이는 삼일제약에서는 2014년 9월 허승범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했다. 허 사장은 같은 해 8월 타계한 고 허용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허강 회장의 아들이다. 대표에 오르기전까지 경영전략실 등에서 부친으로부터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국제약품공업에서는 2013년 1월 창업자 고 남상옥 선대회장의 손자이자 남영우 명예회장의 장남 남태훈 이사가 판매총괄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경영전면에 나섰다. 2009년 국제약품 마케팅부 과장으로 입사한 후 4년 만의 초고속 승진이다. 2014년 1월 유유제약은 창업자인 고 유특한 회장의 손자이자 유승필 회장의 장남인 유원상 상무를 영업 및 마케팅 총괄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아직 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물밑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후계자도 눈에 띈다.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의 손자인 김정균 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2014년 초 보령제약 전략기획실에 입사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직책은 이사대우. 김승호 회장의 장녀인 김은선 부회장의 장남으로, 보령제약의 지주회사격인 보령의 지분 25%를 보유한 2대주주다. 일양약품 정도언 회장의 장남 정유석 상무는 2006년 일양약품 입사 이후 미래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연구개발과 해외사업 분야를 맡으며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이들 제약업계 2·3세의 특징은 일찍부터 해외에서 신약 관련 연구개발 및 글로벌 마케팅 등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약사, 도매상 등으로 출발한 창업자와 달리 이들은 약학, 경영학, 회계학, 법학 등 전공과 경력도 다양하다. JW중외제약 이경하 부회장은 성균관대 약대를 나와 미국 드레이크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땄고, 동아쏘시오홀딩스 강정석 사장은 중앙대 철학과와 성균관대 약학대학원을 나왔다. 보령제약 김정균 이사대우도 중앙대 약학과를 졸업했다. 이색 경력도 눈에 띈다. 대웅제약 윤재승 회장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26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서울지검에서 검사를 지냈다. 미국 조지아주립대 회계학 석사 출신의 일동제약 윤웅섭 사장은 코리아타임즈 경제부 기자, KPMG인터내셔널 회계사를 역임했다. 유유제약 유원상 부사장은 컬럼비아대학 MBA 출신으로 아서앤더슨 회계사, 메릴린치 개인고객관리컨설턴트 출신이다.
해외 MBA 등 유학파도 많다. 허은철 녹십자 부사장은 미국 코넬대학에서 식품공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광동제약 최성원사장은 게이오기주쿠대학 MBA를, 부광약품 김상훈 사장은 미국 보스턴대학 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삼일제약 허승범 사장은 트리니티대학, 환인제약 이원범 사장은 미국 듀크대학 MBA, 국제약품 남태훈 부사장은 미국 보스턴주립대학 경영학과 출신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 제약사 오너들은 변화를 주저하는 보수적인 성향이 뚜렷했지만 해외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젊은 후계자가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생존을 위한 적극적인 변화가 시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긴 업력만큼 오랜 시간 맞춤형 경영수업을 받은 것도 특징이다. 이들은 경영관리, 영업, R&D 등 제약사 경영에 필수적인 분야를 두루 거쳤다. 강정석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은 1989년 입사해 24년 만에 사장 자리에 올랐다. 윤웅섭 일동제약 사장은 미국에서 회계사 일을 하다 2005년 회사에 합류, 기획조정업무 등을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녹십자는 2013년 11월 기존에 없던 기획조정실을 신설해 허은철 당시 부사장에게 실장을 맡겼다. 주로 연구실에서 근무한 그에게 사장 취임까지 영업과 생산, R&D 분야 등 본격적인 경영 수업을 시킨 것이다.
신선한 기운에 대한 재계 안팎의 기대와 달리 제약업계의 새로운 후계자들 역시 보수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최근 2~3년내에 이렇다 할 인터뷰 하나 없는 실정이다. 포브스코리아가 녹십자, 대웅제약, 광동제약, 동아쏘시오홀딩스, 일동제약, 부광약품 등에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선대회장 때부터 언론 노출을 안 했다” “경영에 더 몰두하고자 한다” “성격 자체가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등 대동소이했다. 수년전부터 경영수업을 받는 오너 일가지만 변변한 프로필 사진이나 약력조차 준비되지 않은 기업도 많았다.
재계에서는 이 또한 오랜 업력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한 제약기업 홍보실 임원은 “어른들이 많아 나이 어린 3세들이 언론에 나서지 않는 게 업계 정서”라고 말했다. “제약사는 의사와 약사, 그리고 정부의 틈에 껴 이곳저곳 눈치를 다 봐야 한다. 모두에게 을의 위치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이 드물다. 게다가 보건 관련 법규와 규제, 그리고 경영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보수적인 성향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제약업계 한 단체 임원은 “폐쇄적이라는 것은 제3자의 눈으로 봐서 그렇고 우리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며 “그동안 언론이 R&D나 경영 성과 등 긍정적인 면보다 리베이트 등 부정적인 면을 강조해 언론노출을 꺼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 유독 분란이 많았던 특성도 이유다. 제약업계는 특히 ‘형제의 난’이라 불리는 집안싸움이 많았다. 매출 10위 내 제약기업 중 오너 일가가 경영하는 7개사 중 장남이 대표를 맡고 있는 곳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특징이다. 동아쏘시오홀딩스가 대표적이다. 강정석 사장은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복형제인 강문석 전 동아제약 부회장(강신호 회장의 차남)에 가려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러다 강 전 부회장이 해임된 이후 후계자로 떠올랐다. 2006년 동아오츠카 대표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대외 활동을 시작한 그는 이후 2번에 걸친 경영 분쟁의 아픔을 겪은 후에야 경영권을 손에 쥐었다.
대웅제약의 윤재승 회장도 비운의 시절이 있었다. 3남인 그는 바로 위 형 윤재훈 전 부회장과 경영권 싸움을 치열하게 벌였다. 녹십자도 마찬가지다. 당초 장남인 허성수 전 부사장이 회사를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 됐지만 고 허영섭 회장은 허은철 부사장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유산 상속에서도 허성수 전 부사장을 완전 배제시켰다. 이 과정에서 소송전이 벌어졌지만 허성수 전 부사장 측이 패하면서 허은철 사장에게 더욱 힘이 실렸다.
형제간 경영권 분쟁에서 지분 싸움도 치열했다. 이 때문에 제약업계에서는 경영권 승계와 함께 지주회사로의 전환에 열심이다. 2001년 녹십자를 시작으로 대웅제약, JW중외제약, 한미약품, 동아제약, 2013년 12월 종근당까지 매출 선두권 기업들의 지주사 전환이 이뤄졌다. 일동제약 역시 일부 주주들의 반대에도 끊임없이 지주사 전환을 꾀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제약업계의 지주사 전환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특히 최대주주의 지분율이 낮을 경우 이러한 행보는 더 빨라 질 수 있다. 오너의 지분율이 낮은 제약사는 적대적 M&A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주회사 전환으로 지분을 확보해 경영권 세습에 울타리를 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이미 지주사 전환을 한 기업들은 “투자사와 개발사 등의 분리로 경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책”이라는 입장이지만 ‘경영승계를 위한 수순 밟기’라는 지적에 설득력이 있다. 2014년은 제약업계에 기념할만한 한해다. 역사상 처음으로 연매출 1조원과 연수출 2억 달러를 돌파하는 기업이 나란히 탄생했기 때문이다. 2013년 9436억원의 매출을 올린 유한양행은 2014년 ‘매출 1조원 클럽’이 확실시 된다. 이미 3분기까지 매출이 전년동기보다 9.3% 증가했다. 녹십자는 1조원 달성을 한 해 미뤄야했지만 수출 2억 달러 돌파 타이틀을 국내 제약사 중 가장 먼저 거머쥐었다.
하지만 국내 제약산업은 여전히 ‘구멍가게 수준’이다. 세계 제약시장 규모는 1000조원에 이르지만 국내 제약시장은 19조원 규모. 세계시장의 1.9%에 불과하다. 매출액 기준 국내 제약업계 1, 2위를 다투는 유한양행과 녹십자의 매출을 전부 합쳐도 세계 1위 제약회사 노바티스 매출의 3% 정도다. 글로벌제약사들이 엄청난 돈을 벌고 매출의 20%가량을 R&D에 쏟아붓고 있지만 국내 제약사에 R&D 투자는 늘 ‘남의 일’이다. 제약업계는 ‘정부의 약가억제 정책-신약개발 투자 저조-해외의약품 의존-상품매출 기업(남의 약품을 사다가 포장해 재파는 방식) 전락’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재계에서는 젊은 경영자들이 회사에 새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한다. R&D투자와 M&A 통한 외형 확장, 글로벌시장 공략 등이 그것이다. 고질적인 불법 리베이트 관행도 척결해야할 과제다. 제약업계 중진은 “이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출구”라고 강조했다. “이젠 국내시장만 보다가는 망할 것이다. 저마다 전략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인수합병을 통해 기업 규모를 키우고 이를 바탕으로 신약개발에 나서 글로벌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다행히 국내시장과 제네릭(복제약)에 안주했던 창업자와 달리 3세 경영인은 수출과 혁신신약 개발을 경영의 핵심으로 삼고있다. 특히 바이오 산업 진출과 R&D를 강화하는 등 제약사의 체질개선을 주도하고있다. JW중외제약 이경하 부회장은 신약 개발에 힘을 쏟은 결과 2014년 9월 항암제 개발기술을 특허 사용료를 받고 일본 바이오기업에 팔았다. 대웅제약은 최근 충북 오송에 2100억원을 투자해 cGMP(미국 FDA의약품 품질관리 기준)에 맞는 생산시설을 구축한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매출 증대와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박차를 가한다는 전략이다. 유유제약 유원상 부사장은 2014년 8월 유유말레이사아 법인을 설립하면서 2020년까지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태국 등지에 5개 법인을 순차적으로 설립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일동제약 윤웅섭 사장은 미용성형의료기기를 판매하는 계열사 ‘일동에스테틱스’를 설립하는 등 사업영역을 넓히고 있다. 제약업계에는 ‘어른’이 많다. 80대 창업자들이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고, 70대의 현직 회장도 수두룩하다. 88세의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과 85세의 윤병강 일성신약 회장은 여전히 경영에 매진하고 있다. 83세인 이종호 JW중외제약 회장과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80세의 박해룡 고려제약 회장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81세의 윤영환 대웅제약 명예회장은 얼마 전까지 경영 일선에 있었다.
70세가 넘는 창업자도 20명에 이른다. 79세의 허억 삼아제약 명예회장, 78세의 어준선 안국약품 회장과 최윤환 진양제약 회장, 77세의 윤원영 일동제약 회장·류덕희 경동제약 회장·홍성소 신일제약 회장, 75세의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조원기 조아제약 회장, 74세의 최승수·조의환 삼진제약 회장, 남영우 국제약품 명예회장, 71세의 이윤우 대한약품 회장과 김수지 대화제약 명예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제약업계 오너라 건강 하나는 끝내준다’는 재계의 농담이 있을 정도다.
1927년생인 강신호 회장은 박카스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건강 관리에 탁월하다는 평가다. 올해도 동아제약이 주최하는 대학생 국토대장정 대회에 참가해 4㎞ 구간을 함께 걸었다. 산악 마니아로 히말라야 트레킹도 자주 도전했다. 많이 걷고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먹는 걸 건강 비결로 꼽는다. 1932년 생인 이종호 회장은 등산 마니아다. 2002년과 2005년 해발 4130m 히말라야 안나프루나 베이스캠프까지 오르기도 했다. JW중외그룹이 당진 JW생산단지에 1800억원이란 거금을 투자한 것도 그의 이런 도전 정신 덕이라는 평가다. JW생산단지는 국내 제약업계 GMP(우수 의약품 제조·관리제도) 투자의 롤모델이 됐다. 김승호 회장은 2013년 4월 중국 실크로드와 차마고도에 다녀왔다. 해외 수출에 관심이 커서 고혈압 치료제 ‘카나브’ 수출을 위해 직접 멕시코를 방문하기도 했다.
제약업계에는 창업자들의 친목 모임 ‘팔진회(八進會)’가 널리 알려졌다. 1975년 강신호·이종호·김승호·윤영환·허억·어준선·윤원영 회장과 유영식 전 동신제약회장 등 8명이 모여 ‘여덟 사람이 함께 나아가자’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 당시 최연장자였던 강신호 회장이 48세, 가장 젊은 윤원영 회장이 37세였다. 이들은 최근까지도 정기적으로 골프 모임 등을 가지며 동업자 정신을 잇고 있다.
창업 2~3세대 모임은 ‘약미회(藥美會)’가 대표적이다. 1990년대 중반 ‘일진회(一進會)’로 출범했다가 어감이 좋지 않다는 지적에 따라 이름을 바꿨다. 김영진 한독 회장과 윤도준 동화약품 회장 등 제약업계 젊은 경영자 20여명이 주축이다. 팔진회가 친목 모임인데 반해 약미회는 업계 현안에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제약협회 회장 선출과 부회장단 구성 때 특정후보를 지지한다든가, 부회장에 약미회 회원을 임명토록 요구한 일도 있다. 하지만 최근 그 활동이 둔화된 것으로 보인다. 제약업계 한 중진은 “최근 약미회의 활동소식을 들은 바 없다”며 “원로들에 비해 유대감이 떨어지고 무한경쟁에 몰려 모임의 구속력이 느슨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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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대웅제약은 2014년 9월 이사회를 열고 윤영환 회장의 3남 윤재승 부회장을 지주사 대웅의 신임 회장으로 선임하며 본격적인 2세 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창업자인 윤영환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추대되며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슬하에 3남1녀를 둔 윤 명예회장은 그간 둘째 아들과 막내아들을 두고 저울질해왔다. 경영수업을 함께 받던 나머지 형제들은 윤재승 회장 취임에 맞춰 모두 경영에서 손을 뗐다.
일동제약 3세 경영인 윤웅섭 사장도 2014년 3월 경영 전면에 나섰다. 윤원영 회장의 장남인 그는 2005년 일동제약 상무로 입사한 후 2011년 부사장 승진에 이어 3년만에 사장으로 취임했다. 동아제약도 2013년 5월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의 4남 강정석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이 강 회장의 주식을 모두 증여받으며 3세 경영체제를 완료했다. 2013년 7월 최성원 광동제약 사장은 창업자 최수부 회장의 갑작스런 별세로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최 사장은 일찌감치 후계자로 지목돼 경영 수업을 받아왔다.
업력 길어 3세 경영체제 조기 정착
제약업계를 이해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업력(業歷)’이다. 제약산업은 역사가 100년이 넘는 전통 산업이다. 이 긴 시간 동안 가족경영 체제가 구축됐다. 상위 100개 업체 중 가족경영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 절반을 넘는다. 다른 산업군보다 3세 경영인이 유독 많은 이유다. 특히 오너가 고령 등의 이유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자연스럽게 후계경영이 본격화되고 있다.
특히 중견제약사에서 3세 경영인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안과 분야에 강세를 보이는 삼일제약에서는 2014년 9월 허승범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했다. 허 사장은 같은 해 8월 타계한 고 허용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허강 회장의 아들이다. 대표에 오르기전까지 경영전략실 등에서 부친으로부터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국제약품공업에서는 2013년 1월 창업자 고 남상옥 선대회장의 손자이자 남영우 명예회장의 장남 남태훈 이사가 판매총괄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경영전면에 나섰다. 2009년 국제약품 마케팅부 과장으로 입사한 후 4년 만의 초고속 승진이다. 2014년 1월 유유제약은 창업자인 고 유특한 회장의 손자이자 유승필 회장의 장남인 유원상 상무를 영업 및 마케팅 총괄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아직 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물밑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후계자도 눈에 띈다.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의 손자인 김정균 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2014년 초 보령제약 전략기획실에 입사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직책은 이사대우. 김승호 회장의 장녀인 김은선 부회장의 장남으로, 보령제약의 지주회사격인 보령의 지분 25%를 보유한 2대주주다. 일양약품 정도언 회장의 장남 정유석 상무는 2006년 일양약품 입사 이후 미래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연구개발과 해외사업 분야를 맡으며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이들 제약업계 2·3세의 특징은 일찍부터 해외에서 신약 관련 연구개발 및 글로벌 마케팅 등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약사, 도매상 등으로 출발한 창업자와 달리 이들은 약학, 경영학, 회계학, 법학 등 전공과 경력도 다양하다. JW중외제약 이경하 부회장은 성균관대 약대를 나와 미국 드레이크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땄고, 동아쏘시오홀딩스 강정석 사장은 중앙대 철학과와 성균관대 약학대학원을 나왔다. 보령제약 김정균 이사대우도 중앙대 약학과를 졸업했다. 이색 경력도 눈에 띈다. 대웅제약 윤재승 회장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26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서울지검에서 검사를 지냈다. 미국 조지아주립대 회계학 석사 출신의 일동제약 윤웅섭 사장은 코리아타임즈 경제부 기자, KPMG인터내셔널 회계사를 역임했다. 유유제약 유원상 부사장은 컬럼비아대학 MBA 출신으로 아서앤더슨 회계사, 메릴린치 개인고객관리컨설턴트 출신이다.
해외 MBA 등 유학파도 많다. 허은철 녹십자 부사장은 미국 코넬대학에서 식품공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광동제약 최성원사장은 게이오기주쿠대학 MBA를, 부광약품 김상훈 사장은 미국 보스턴대학 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삼일제약 허승범 사장은 트리니티대학, 환인제약 이원범 사장은 미국 듀크대학 MBA, 국제약품 남태훈 부사장은 미국 보스턴주립대학 경영학과 출신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 제약사 오너들은 변화를 주저하는 보수적인 성향이 뚜렷했지만 해외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젊은 후계자가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생존을 위한 적극적인 변화가 시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창업자 건재…’ 은둔의 황태자들
신선한 기운에 대한 재계 안팎의 기대와 달리 제약업계의 새로운 후계자들 역시 보수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최근 2~3년내에 이렇다 할 인터뷰 하나 없는 실정이다. 포브스코리아가 녹십자, 대웅제약, 광동제약, 동아쏘시오홀딩스, 일동제약, 부광약품 등에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선대회장 때부터 언론 노출을 안 했다” “경영에 더 몰두하고자 한다” “성격 자체가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등 대동소이했다. 수년전부터 경영수업을 받는 오너 일가지만 변변한 프로필 사진이나 약력조차 준비되지 않은 기업도 많았다.
재계에서는 이 또한 오랜 업력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한 제약기업 홍보실 임원은 “어른들이 많아 나이 어린 3세들이 언론에 나서지 않는 게 업계 정서”라고 말했다. “제약사는 의사와 약사, 그리고 정부의 틈에 껴 이곳저곳 눈치를 다 봐야 한다. 모두에게 을의 위치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이 드물다. 게다가 보건 관련 법규와 규제, 그리고 경영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보수적인 성향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제약업계 한 단체 임원은 “폐쇄적이라는 것은 제3자의 눈으로 봐서 그렇고 우리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며 “그동안 언론이 R&D나 경영 성과 등 긍정적인 면보다 리베이트 등 부정적인 면을 강조해 언론노출을 꺼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 유독 분란이 많았던 특성도 이유다. 제약업계는 특히 ‘형제의 난’이라 불리는 집안싸움이 많았다. 매출 10위 내 제약기업 중 오너 일가가 경영하는 7개사 중 장남이 대표를 맡고 있는 곳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특징이다. 동아쏘시오홀딩스가 대표적이다. 강정석 사장은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복형제인 강문석 전 동아제약 부회장(강신호 회장의 차남)에 가려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러다 강 전 부회장이 해임된 이후 후계자로 떠올랐다. 2006년 동아오츠카 대표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대외 활동을 시작한 그는 이후 2번에 걸친 경영 분쟁의 아픔을 겪은 후에야 경영권을 손에 쥐었다.
대웅제약의 윤재승 회장도 비운의 시절이 있었다. 3남인 그는 바로 위 형 윤재훈 전 부회장과 경영권 싸움을 치열하게 벌였다. 녹십자도 마찬가지다. 당초 장남인 허성수 전 부사장이 회사를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 됐지만 고 허영섭 회장은 허은철 부사장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유산 상속에서도 허성수 전 부사장을 완전 배제시켰다. 이 과정에서 소송전이 벌어졌지만 허성수 전 부사장 측이 패하면서 허은철 사장에게 더욱 힘이 실렸다.
형제간 경영권 분쟁에서 지분 싸움도 치열했다. 이 때문에 제약업계에서는 경영권 승계와 함께 지주회사로의 전환에 열심이다. 2001년 녹십자를 시작으로 대웅제약, JW중외제약, 한미약품, 동아제약, 2013년 12월 종근당까지 매출 선두권 기업들의 지주사 전환이 이뤄졌다. 일동제약 역시 일부 주주들의 반대에도 끊임없이 지주사 전환을 꾀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제약업계의 지주사 전환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특히 최대주주의 지분율이 낮을 경우 이러한 행보는 더 빨라 질 수 있다. 오너의 지분율이 낮은 제약사는 적대적 M&A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주회사 전환으로 지분을 확보해 경영권 세습에 울타리를 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이미 지주사 전환을 한 기업들은 “투자사와 개발사 등의 분리로 경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책”이라는 입장이지만 ‘경영승계를 위한 수순 밟기’라는 지적에 설득력이 있다.
R&D·M&A·글로벌 진출이 과제
하지만 국내 제약산업은 여전히 ‘구멍가게 수준’이다. 세계 제약시장 규모는 1000조원에 이르지만 국내 제약시장은 19조원 규모. 세계시장의 1.9%에 불과하다. 매출액 기준 국내 제약업계 1, 2위를 다투는 유한양행과 녹십자의 매출을 전부 합쳐도 세계 1위 제약회사 노바티스 매출의 3% 정도다. 글로벌제약사들이 엄청난 돈을 벌고 매출의 20%가량을 R&D에 쏟아붓고 있지만 국내 제약사에 R&D 투자는 늘 ‘남의 일’이다. 제약업계는 ‘정부의 약가억제 정책-신약개발 투자 저조-해외의약품 의존-상품매출 기업(남의 약품을 사다가 포장해 재파는 방식) 전락’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재계에서는 젊은 경영자들이 회사에 새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한다. R&D투자와 M&A 통한 외형 확장, 글로벌시장 공략 등이 그것이다. 고질적인 불법 리베이트 관행도 척결해야할 과제다. 제약업계 중진은 “이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출구”라고 강조했다. “이젠 국내시장만 보다가는 망할 것이다. 저마다 전략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인수합병을 통해 기업 규모를 키우고 이를 바탕으로 신약개발에 나서 글로벌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다행히 국내시장과 제네릭(복제약)에 안주했던 창업자와 달리 3세 경영인은 수출과 혁신신약 개발을 경영의 핵심으로 삼고있다. 특히 바이오 산업 진출과 R&D를 강화하는 등 제약사의 체질개선을 주도하고있다. JW중외제약 이경하 부회장은 신약 개발에 힘을 쏟은 결과 2014년 9월 항암제 개발기술을 특허 사용료를 받고 일본 바이오기업에 팔았다. 대웅제약은 최근 충북 오송에 2100억원을 투자해 cGMP(미국 FDA의약품 품질관리 기준)에 맞는 생산시설을 구축한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매출 증대와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박차를 가한다는 전략이다. 유유제약 유원상 부사장은 2014년 8월 유유말레이사아 법인을 설립하면서 2020년까지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태국 등지에 5개 법인을 순차적으로 설립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일동제약 윤웅섭 사장은 미용성형의료기기를 판매하는 계열사 ‘일동에스테틱스’를 설립하는 등 사업영역을 넓히고 있다.
‘노익장’ 과시하는 제약업계 창업자들
70세가 넘는 창업자도 20명에 이른다. 79세의 허억 삼아제약 명예회장, 78세의 어준선 안국약품 회장과 최윤환 진양제약 회장, 77세의 윤원영 일동제약 회장·류덕희 경동제약 회장·홍성소 신일제약 회장, 75세의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조원기 조아제약 회장, 74세의 최승수·조의환 삼진제약 회장, 남영우 국제약품 명예회장, 71세의 이윤우 대한약품 회장과 김수지 대화제약 명예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제약업계 오너라 건강 하나는 끝내준다’는 재계의 농담이 있을 정도다.
1927년생인 강신호 회장은 박카스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건강 관리에 탁월하다는 평가다. 올해도 동아제약이 주최하는 대학생 국토대장정 대회에 참가해 4㎞ 구간을 함께 걸었다. 산악 마니아로 히말라야 트레킹도 자주 도전했다. 많이 걷고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먹는 걸 건강 비결로 꼽는다. 1932년 생인 이종호 회장은 등산 마니아다. 2002년과 2005년 해발 4130m 히말라야 안나프루나 베이스캠프까지 오르기도 했다. JW중외그룹이 당진 JW생산단지에 1800억원이란 거금을 투자한 것도 그의 이런 도전 정신 덕이라는 평가다. JW생산단지는 국내 제약업계 GMP(우수 의약품 제조·관리제도) 투자의 롤모델이 됐다. 김승호 회장은 2013년 4월 중국 실크로드와 차마고도에 다녀왔다. 해외 수출에 관심이 커서 고혈압 치료제 ‘카나브’ 수출을 위해 직접 멕시코를 방문하기도 했다.
제약업계에는 창업자들의 친목 모임 ‘팔진회(八進會)’가 널리 알려졌다. 1975년 강신호·이종호·김승호·윤영환·허억·어준선·윤원영 회장과 유영식 전 동신제약회장 등 8명이 모여 ‘여덟 사람이 함께 나아가자’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 당시 최연장자였던 강신호 회장이 48세, 가장 젊은 윤원영 회장이 37세였다. 이들은 최근까지도 정기적으로 골프 모임 등을 가지며 동업자 정신을 잇고 있다.
창업 2~3세대 모임은 ‘약미회(藥美會)’가 대표적이다. 1990년대 중반 ‘일진회(一進會)’로 출범했다가 어감이 좋지 않다는 지적에 따라 이름을 바꿨다. 김영진 한독 회장과 윤도준 동화약품 회장 등 제약업계 젊은 경영자 20여명이 주축이다. 팔진회가 친목 모임인데 반해 약미회는 업계 현안에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제약협회 회장 선출과 부회장단 구성 때 특정후보를 지지한다든가, 부회장에 약미회 회원을 임명토록 요구한 일도 있다. 하지만 최근 그 활동이 둔화된 것으로 보인다. 제약업계 한 중진은 “최근 약미회의 활동소식을 들은 바 없다”며 “원로들에 비해 유대감이 떨어지고 무한경쟁에 몰려 모임의 구속력이 느슨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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