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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의 회사생활 - ‘여유·친구·꿈’ 사라진 무거운 발걸음

부장의 회사생활 - ‘여유·친구·꿈’ 사라진 무거운 발걸음

사진:중앙포토
국내 최대의 IT 기업 기획파트에서 근무하는 박모(44) 부장. 박 부장은 협력사 계약 갱신과 설비 증설 문제로 올 들어 제시간에 퇴근한 적이 없다. 오늘도 간단한 저녁 식사 후에 시작된 릴레이 회의가 9시를 훌쩍 넘겼다. 사무실 시계는 밤 10시를 가리킨다. 내일 아침 상무에게 보고할 회의 결과 자료와 협력사 계약서 검토보고서를 모두 작성하려면 12시가 훌쩍 넘을 것 같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직 부하 직원으로부터 자료도 다 넘어오지 않았다. “최 과장, 데이터 언제까지 돼?”라고 묻고 싶지만 진땀 흘리고 있는 부하 직원을 채근하는 것 같아 애써 참는다. 목이 뻐근하고 눈이 감긴다. 내일 새벽에 나와 마무리 할까? 박 부장은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사를 나선다. 그 에게 야근과 조출(早出)은 일상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남의 얘기
‘저녁이 있는 삶’, 대단할 것 없고 소박한 말이지만, 대다수 대한민국 직장인들에게는 사치스러운 소리다. 야근을 당연시하는 문화와 살인적인 업무 강도, 치열한 경쟁 탓에 저녁 시간은 고스란히 업무에 헌납해야 하는 실정이다. 특히 아래를 이끌고 위를 떠받쳐야 하는 ‘부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본지 설문조사에서 ‘(주말 포함) 야근을 하는 횟수는 일주일 평균 몇 회 정도인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85명(45%)은 ‘주 2~3회’ 야근한다고 답했다. ‘주 4~5회’라고 응답한 사람도 36명(19.1%)이나 됐고, ‘매일’ 야근한다는 사람은 4명(2.1%)이었다. ‘주 1회’라고 답한 사람은 49명(25.93%). 국내 기업의 부장 10명 중 9명 이상이 야근을 하고 있으며, 3명 중 2명은 일주일의 절반 이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없다’고 말한 사람은 15명(7.94%)에 불과했다. 응답자의 82.5%는 주 1~4회 저녁 술자리를 갖는다고 답한 점을 감안하면, 저녁이 있는 삶을 사는 부장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회사 생활 중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야근·주말출근 등 과도한 업무에 시달릴 때’라고 응답한 사람이 22명(11.64%)이나 됐다. 이 질문의 기타 의견 중에서도 ‘자신을 위한 시간이 부족할 때’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할때’ 등 야근·휴일과 관련한 응답이 다수를 이뤘다. 한 응답자는 “요즘 들어 경기가 안 좋다고 하니 야근하는 사례가 더 잦아졌다”며 “연말연시 때처럼 일이 몰릴 때는 새벽 1시 퇴근, 아침 6시 출근도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응답자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임원이 언제 찾을지 몰라 눈치 보느라 퇴근이 늦어지는 측면도 있다”고도 했다.

부장들이 이처럼 개인·가정 생활을 포기하고 회사 생활에 몰두하지만, 정작 직장 내에서는 많은 외로움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끔 외롭다’고 답한 응답자는 86명(45.50%)이었고, ‘보통이다’ 67명(35.45%), ‘자주 외롭다’ 21명(11.11%), ‘매우 외롭다’ 2명(1.06%) 등 부장 대다수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다’는 응답은 13명(6.88%)에 불과했다.
 “외로움 깊어” 93%
부장들이 느끼는 고독감은 극심한 경쟁과 중간관리자로서의 소통 문제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임원 승진을 위한 경쟁, 구조조정 등에 따른 불안감, 가정에서의 좁아진 입지, 고령화 시대에 따른 막막한 감정이 외로움의 원인”이라며 “특히 사내에서 어른(임원)과 젊은이(부하직원)들 사이에서 소통의 책임을 지는 역할을 하다 보니 고통이 배가되는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회사 생활 중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때는 언제인가?’ 질문에서는 ‘임원(상사)에서 질책을 받을 때’(38명, 20.11%), ‘부하 직원이나 상사에게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27명, 14.29%) 등 인간 관계와 더불어, ‘스스로 업무 능력에 한계를 느낄 때’(64명, 33.86%) 등 승진과 관련한 내용의 응답이 많았다.

‘부서원들과 회식은 얼마나 자주 하는가?’ 문항에는 ‘월 1회 이하’ 93명(49.21%), ‘월 2~3회’ 78명(41.27%) 등으로 90% 이상이 월 3회 이하에 그쳤다. 부하 직원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만족 한다는 의견이 앞섰으나, 불만도 적지 않았다. ‘부서원들에 대한 업무 만족’에 대해 ‘대체로 만족’ 149명(78.84%), ‘매우 만족’ 13명(6.88%) 등 긍정적인 답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부서원들 중 (자신에게 권한이 있다면) 자르고 싶은 사람이 있나?’ 질문에서는 ‘있다’고 답한 사람이 66명(34.92%)이나 됐다. 한 응답자는 “부장이 되면 후배들에게는 입을 닫고 지갑을 열어야 하고, 상급자에게는 전화와 주말을 헌납해야 한다”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인간관계로 생기는 스트레스는 결국 사람으로 풀 수밖에 없다고 조언한다. 곽금주 교수는 “외롭고 힘들 때 대화를 닫기 시작하면 자신만 더욱 다칠 수 있으니 뒷담화라도, 남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며 “중장기적으로는 취미나 공부 등 인생의 큰 지도를 그리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부장들은 강도 높은 업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자신의 미래는 불투명하게 봤다. ‘자신이 임원이 될 가능성은 몇 %로 보나?’라는 질문에 ‘10~50%’라고 응답한 부장이 93명(49.21%)로 다수를 이뤘고, ‘가능성 없다’고 답한 응답자도 19명(10.05%)이나 됐다. 임원 승진 가능성을 ‘50% 이상’으로 점친 사람은 67명(35.45%), ‘100%’라고 답한 경우는 10명(5.29%)에 불과했다. ‘임원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질’에 대해선 ‘업무 성과’가 79명(41.80%)으로 가장 많았고, ‘리더십’ 57명(30.16%), ‘사내인맥’ 26명(13.76%), ‘운’ 13명(6.88%), ‘친화력’ 9명(4.76%) 순이었다. 기타 의견으로는 ‘오너와의 관계’, ‘사내 평판’, ‘대내외 네트워크’ 등이 눈에 띄었다.

팍팍한 회사생활에도 부장들은 현재의 직분에는 대부분 만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직무 만족도를 묻는 질문에 ‘대체로 만족’이 143명(75.66%)로 가장 많았고, ‘매우 만족’은 22명(11.64%)이었다. ‘대체로 불만족’ 23명(12.17%), ‘매우 불만족’ 1명(0.53%) 등 부정 응답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일을 하면서 행복을 느끼나?’라는 질문에서는 ‘대체로 행복’이 160명(84.66%)로 절대 다수를 차지했고, ‘매우 행복’도 13명(6.88%)이었다. 다만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나?’ 항목에서는 ‘가끔 생각한다’ 135명(71.43%), ‘자주 생각한다’ 19명(10.05%) 등으로 퇴사를 염두에 둔 사람이 많았다. ‘매일 생각한다’(2명, 1.06%)라는 응답도 소수 있었다.

‘회사생활 중 어떤 점이 개선되면 인생이 더 행복해 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업무가 더 원활하게 풀린다면’이 81명(42.86%)로 다수를 차지했고, ‘급여나 연봉이 오른다면’이 55명(29.10%)로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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