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진 전문기자의 ‘Car Talk’ - BBC 탑기어 사태로 본 자동차 문화] 성역 없는 비판이 인기 비결
[김태진 전문기자의 ‘Car Talk’ - BBC 탑기어 사태로 본 자동차 문화] 성역 없는 비판이 인기 비결

탑기어 사태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먼 나라에서 일어난 해외 토픽 단신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한국인의 대다수가 탑기어 방송을 몰라서다. 자동차 프로그램을 단 한 번도 본 경우가 없는 게 한국에서는 일반적이다. 자동차 생산 세계 5위에, 세계 10위권 수입차 시장이 한국이다. 그런 점에서 탑기어 사태를 통해 한국 자동차산업과 문화에 관해 고민해볼 부분이 몇 가지 있다.
‘클락슨 복귀시켜라’ 살해협박까지

이번에는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다. 클락슨의 하차를 반대하는 온라인 서명 운동 참여자는 100만명이 넘었다. 피해자인 PD가 오히려 비난을 뒤집어 쓰고, 살해 협박을 받았다. 하차를 결정한 BBC 사장 역시 살해 협박이 담긴 e메일을 받고 24시간 경호원을 고용했다. 뿐만 아니라 후임 진행자로 점쳐진 인물도 위협에 시달리는 등 여파는 점점 커졌다. 일부 지지자는 소형 탱크를 몰고 BBC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런 사회 각계 각층의 요청과 팬들의 출연정지 철회 요구에도, 3월 25일 BBC 토니 홀 사장은 “클락슨과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폭행과 폭언이 확인됐기 때문에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클락슨도 본인의 SNS 계정에 ‘한 때 탑기어 진행자였다’는 코멘트를 남겨 계약 해지를 받아들였다. BBC는 도덕성과 개인의 행동이 미치는 파급효과를 고려해 공익성을 우선시한 결정을 내린 셈이다.
탑기어 사태는 이제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 클락슨은 다른 프로그램 제작사와 접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BBC는 탑기어 방송의 새로운 팀을 꾸릴 모양새다. 새 진행자를 물색 중이다. 클락슨이 떠난 탑기어가 예전 분위기를 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탑기어 방송은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자동차 프로그램이다. 1977년부터 방송을 시작했다. 편당(재방송 포함) 시청자는 전 세계 3억5000만명에 달한다. 세계 214개국에 수출하고, 2500억원에 이르는 막대한 수익을 BBC에 안겨주는 인기 장수 프로그램이다.
이런 인기의 일등공신이 클락슨이다. 이 쇼의 간판으로 1988년 부터 출연했다. 그는 ‘더 선데이 타임즈’의 자동차 칼럼니스트를 겸임하면서 현재의 방송 포맷을 완성했다. 영국에서 일요일 저녁 8시 황금시간대에 방송되는 것만 봐도 탑기어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당연히 시청률도 동 시간대 부동의 1위다.
클락슨은 특유의 거친 입담과 해박한 자동차 지식을 바탕으로 확실한 성격을 구축했다. ‘탑기어=제레미 클락슨’이라고 할 정도로 핵심이었다. 그는 영국 수상이나 교통장관, 특급 연예인까지 자동차를 화제로 삼아 성역 없이 비판한다. 더 무서운 권력인 거대 자동차 메이커도 그의 손에 놀아난다. 워낙 영향력이 큰지라 그에게 항의를 하기 어려울 정도다. 20년 전에는 일본차가, 10년 전에는 현대·기아차가 탑기어에서 형편없는 차로 푸대접을 받았다.
인기 비결은 흥미를 자극하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시도다. 이는 어떤 권력도 비판할 수 있는 영국 특유의 저널리즘에서 비롯된다. 거물 정치인뿐 아니라 거대 기업까지 눈치를 보지 않고 문제가 있으면 파헤친다.
물론 이런 기틀을 잡은 데는 클락슨을 비롯한 진행자들의 전문성이 큰 몫을 했다.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해박한 자동차 지식이 방송의 수준을 높이고, 시청자의 신뢰를 키웠다.
인기의 또 다른 배경은 영국이 자동차 문화가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라는 점이다. 롤스로이스·벤틀리·애스턴마틴·로터스·재규어·랜드로버 등 유명 브랜드가 즐비하다. 지금은 이들 모두가 해외 자동차 업체나 자본에 인수됐지만 브랜드 가치와 전통은 여전히 영국 사회에 자리 잡고 있다. 유명 브랜드 이외에 영국에는 소규모로 주문생산 차를 만드는 ‘백야드 빌더(주로 뒷마당에서 작업을 한다고 붙여진 명칭)’가 많다. 개인들도 차를 만들거나 창고에서 오래된 올드카나 클래식카를 고치는데 익숙하다. 자동차 튜닝이나 생산에 대한 특별한 규제가 없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로 영국에서는 엔진에 바퀴만 달면 번호판을 내준다고 할 정도다. 동네 서킷에서는 수시로 레이스가 열리고, 공터에서는 자신들이 만든 차를 보여 주거나 거래할 목적으로 모이는 소규모 모터쇼가 열린다. 자동차가 삶 속의 중요한 부분으로 애견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고나 할까.

아직도 일천한 한국 자동차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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