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봉덕 코맥스 회장
변봉덕 코맥스 회장
한국에서 처음으로 인터폰을 만들어 출시했고, 전자제품을 해외에 처음 수출한 기업. 인터폰과 도어폰으로 시작해 스마트홈의 세계 강자가 된 코맥스 창업자가 바로 변봉덕 회장이다. 1976년 어느 날 세운상가 2층에 있는 ‘중앙전자공업사’(현 코맥스, 1994년 코맥스로 사명 변경)에 전화 한 통이 왔다. 그곳은 인터폰과 도어폰을 직접 만들어 팔던 조그마한 사업체였다. 전화를 건 이는 정부 측 관계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대규모 전자박람회가 열리니 참여해봐라”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당시 전자산업 육성책을 펼치던 정부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인터폰을 만든 업체를 주목했다. 코맥스를 세계 3위, 한국 1위의 스마트홈 전문 기업으로 키우는 단초가 된 전화였다. “당시 여권을 만드는 데만 6개월이 걸리던 때다. 해외 여행은 꿈도 못꾸던 시절인데, 본격적으로 수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도전했다”고 변봉덕(74) 코맥스 회장은 회고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전자제품 수출을 적극 지원했다. 코맥스를 포함해 10여 곳의 전자업체를 선정해 박람회 참가를 권유했다. 그때 박람회에 참여했던 기업 중 살아남은 곳은 코맥스뿐이다. 당시 한국에서 수출하는 제품은 노동집약 산업인 섬유나 가발, 봉제완구에 불과했다. 당시 전자제품을 만들던 기업들은 내수 시장에만 전력했던 때다. 전자제품을 해외에 수출한다는 것은 몽상에 가까웠던 시절이다. 심지어 직원들조차 “해외에 판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냐”며 반대할 정도였다.
변 회장은 임직원의 반대를 뒤로하고 가방 두 개에 인터폰 샘플과 옷가지를 챙겼다. 직항로가 없었기에 루프트한자 항공사를 이용해 네덜란드로 넘어갔다. 한국 정부가 마련해준 부스에 10여 개의 업체가 책상 하나씩을 설치했다. 변 회장도 보자기에 싸서 가지고 온 인터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부스 한쪽 벽면에는 ‘중앙전자공업사’라고 써진 종이를 붙였다. 한국에서 만든 카탈로그도 한쪽에 비치했다. 변 회장은 “해외 바이어들이 보면 정말 없어 보이는 부스였을 것 같다”고 기억할 정도로 볼품없는 부스였다.
해외 바이어들은 부스에 마련된 조악한 디자인 제품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가격을 보고 놀랐다. “당시 우리 제품은 구입 후 문제가 생기면 그냥 버려도 될 정도로 저렴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독일, 프랑스 등에서 온 바이어와 계약을 맺었다. “메이드인코리아 브랜드가 수출된다는 생각에 너무 감동했다. 하늘로 날아갈 정도였다.”
박람회 참가를 마치고 변 회장은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당시 해외에 나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직접 해외를 돌면서 수출길을 뚫기로 했다.” 돈 문제로 변 회장 혼자 출장 나온 상황. 가방을 들고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암스테르담을 거쳐,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과 이라크,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혼자서 2개월 동안 해외 영업을 하고 다닌 것. 현지에 도착해도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
변 회장이 찾은 방법은 옐로우페이지, 즉 전화번호부였다. 현지에 도착해 호텔에 들어가면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전자’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기업들을 찾아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미팅 약속을 잡아주는 곳도 몇 군데 없었다. 직접 찾아가 기업 현관에서 경비 사원과 다퉈가면서 기업체 대표와 미팅을 잡았다. 해외 기업체 사람들은 제품보다 동양에서 왔다는 변 회장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어떤 기업인은 저녁 식사에 나를 초대했는데, 가보니까 10여 명의 가족들이 와 있더라. 동양인을 보기 위해서 다들 모여든 것이다”라며 웃었다. “언어 문제는 없었나?”라는 질문에 “3년 동안 카투사에서 근무해서 영어를 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변 회장은 수출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무조건 달려가는 ‘돈 키호테’였다. 현재 코맥스의 제품은 120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특히 러시아, 중동, 남미에서 코맥스는 홈오토메이션 제품으로 유명한 브랜드다. 인터폰이나 비디오폰을 사러오는 고객은 “코맥스 주세요”라고 할 정도다. “코맥스라는 브랜드로 상표를 등록해 해외에 진출한 것이 이런 성과를 낳았다. 일반적으로 중소기업이 수출을 위해 OEM 방식을 선택해 이익을 얻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기업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고 변 회장은 말했다. 2014년 코맥스는 1085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해외 수출 비중은 35~40%에 이른다.
인터폰과 도어폰을 시작으로 코맥스는 비디오폰, 홈시큐리티 시스템, 스마트홈 시스템, 시큐리티 시스템 등으로 제품을 확대했다. SK텔레콤, LG U플러스 등의 통신기업은 코맥스와 손을 잡고 스마트홈 분야에 뛰어들었다. “2000년대부터 무선화와 디지털화를 앞세우는 홈네트워크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IoT(사물인터넷) 시대를 대비했다. 통신대기업이 우리와 손을 잡은 것은 우리가 스마트홈 분야 선도업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IFA 2015’(세계 최대 가전제품 박람회)에 스마트홈 제품인 ‘스마트 비디오폰’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무선 네트워크 방식으로 비디오폰과 스마트폰을 통해 방범과 방재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제어할 수 있는 제품이다.
1976년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시도했던 박람회 참가는 코맥스를 강소기업으로 만들었다. 세운상가 2층 한귀퉁이에서 시작했던 코맥스는 경기도 성남에 사옥을 가진 번듯한 중견기업이 됐다. 변 회장은 이를 ‘관행에 대한 도전’이라고 표현했다. “우리 주위에 항상 기회가 있지만, 관행에 젖어 있으면 보지 못한다. 관행을 벗어나서 새로운 환경에 계속 도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서 코맥스의 브랜드가 인정받는 것은 지속적인 R&D에 투자한 결과다. 연구개발 인력이 전체 임직원의 2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매년 매출액 대비 3% 정도를 R&D에 투자하고 있다. 해마다 50여 개의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출시할 수 있는 이유다. 업계 최초이자 유일하게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인 ‘iF 디자인 어워드’ ‘Red Dot 디자인 어워드’ ‘IDEA 디자인 어워드’를 타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제품의 현화를 적극 채택한 것도 적중했다. 1986년부터 수출에 도전했던 아르헨티나의 경우 치안이 불안한 점을 감안한 제품을 내놓았다. 외부에 설치하는 카메라는 망치로 때려도 부서지지 않는 특수 핀홀 카메라를 적용한 것. 러시아의 경우 혹독한 날씨에도 고장없이 버틸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여러 번 저온 테스트를 진행했다. 러시아는 코맥스의 해외 수출 비중이 가장 큰 국가로 꼽힌다.
1994년 중국 천진에 공장을 세운 것도 현지화 전략의 일환이다. 당시 코맥스의 제품 중 유럽 및 미국으로 수출하는 모델이 국내 인건비 상승으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중국 공장을 남들보다 먼저 시도했다. 당시 중국지 현지 진출 모델이 별로 없었던 만큼 변 회장이 승부수를 띄운 것. “중국도 인건비가 상승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울 것 같다”는 기자의 지적에 “중국 공장에서 만든 제품은 현지에서 판매하는 것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다”고 답변했다.
변 회장이 코맥스의 핵심 경영전략으로 꼽는 것은 인재육성이다. 인재를 키우지 않으면 경쟁에서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많이 사람을 빼앗겨 보니까, 우리가 직접 인재를 키워야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변 회장은 설명했다. ‘코맥스 아카데미’는 여타 중견 기업에서 보기 어려운 교육 프로그램이다. 국내 최고 수준의 교수진을 초빙해 전직원을 대상으로 Pre-MBA와 MBA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모든 직원이 평균 100시간의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리더십, 경영, 비즈니스 스킬 등의 직무 관련 교육만 해왔지만, 지금은 어학이나 자격증 등의 교육과정까지 마련했다. 이런 노력들 덕분에 세계 시장에서 코맥스 브랜드에 대한 신뢰도는 높다. 독일의 ABB그룹과 슈나이더그룹이 코맥스 인수를 시도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기업의 인수 제안을 받지 않은 것은 이탈리아에서 성악가로 활동 중이던 장남 우석 씨 때문이다. “기업 경영은 하지 않겠다던 아들이 코맥스가 해외 기업에 팔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설명했다. 성악가로 잘나가던 우석 씨는 이후 코맥스에 결합했고, 현재 부사장직을 맡고 있다.
세계에서 인정받는 코맥스를 키워낸 변 회장은 피난민 출신이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시절을 겪었다. 평양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에 ‘도련님’ 소리를 들으며 컸지만, 12살 때 터진 전쟁은 한순간에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만들었다. 아이스크림 장사,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먹고 살기 위해 안해 본 일이 없었다. 아이들 과외를 하면서 한양대 수학과를 졸업했고,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뛰어든 게 사업이었다. “지금까지 기업을 운영하면서 내린 결론은 항상 최선의 방법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 임직원을 이끌어가는 기업가가 해야 할 일이다.”
- 글 최영진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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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 정부는 전자제품 수출을 적극 지원했다. 코맥스를 포함해 10여 곳의 전자업체를 선정해 박람회 참가를 권유했다. 그때 박람회에 참여했던 기업 중 살아남은 곳은 코맥스뿐이다. 당시 한국에서 수출하는 제품은 노동집약 산업인 섬유나 가발, 봉제완구에 불과했다. 당시 전자제품을 만들던 기업들은 내수 시장에만 전력했던 때다. 전자제품을 해외에 수출한다는 것은 몽상에 가까웠던 시절이다. 심지어 직원들조차 “해외에 판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냐”며 반대할 정도였다.
변 회장은 임직원의 반대를 뒤로하고 가방 두 개에 인터폰 샘플과 옷가지를 챙겼다. 직항로가 없었기에 루프트한자 항공사를 이용해 네덜란드로 넘어갔다. 한국 정부가 마련해준 부스에 10여 개의 업체가 책상 하나씩을 설치했다. 변 회장도 보자기에 싸서 가지고 온 인터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부스 한쪽 벽면에는 ‘중앙전자공업사’라고 써진 종이를 붙였다. 한국에서 만든 카탈로그도 한쪽에 비치했다. 변 회장은 “해외 바이어들이 보면 정말 없어 보이는 부스였을 것 같다”고 기억할 정도로 볼품없는 부스였다.
해외 바이어들은 부스에 마련된 조악한 디자인 제품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가격을 보고 놀랐다. “당시 우리 제품은 구입 후 문제가 생기면 그냥 버려도 될 정도로 저렴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독일, 프랑스 등에서 온 바이어와 계약을 맺었다. “메이드인코리아 브랜드가 수출된다는 생각에 너무 감동했다. 하늘로 날아갈 정도였다.”
박람회 참가를 마치고 변 회장은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당시 해외에 나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직접 해외를 돌면서 수출길을 뚫기로 했다.” 돈 문제로 변 회장 혼자 출장 나온 상황. 가방을 들고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암스테르담을 거쳐,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과 이라크,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혼자서 2개월 동안 해외 영업을 하고 다닌 것. 현지에 도착해도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
변 회장이 찾은 방법은 옐로우페이지, 즉 전화번호부였다. 현지에 도착해 호텔에 들어가면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전자’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기업들을 찾아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미팅 약속을 잡아주는 곳도 몇 군데 없었다. 직접 찾아가 기업 현관에서 경비 사원과 다퉈가면서 기업체 대표와 미팅을 잡았다. 해외 기업체 사람들은 제품보다 동양에서 왔다는 변 회장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어떤 기업인은 저녁 식사에 나를 초대했는데, 가보니까 10여 명의 가족들이 와 있더라. 동양인을 보기 위해서 다들 모여든 것이다”라며 웃었다. “언어 문제는 없었나?”라는 질문에 “3년 동안 카투사에서 근무해서 영어를 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변 회장은 수출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무조건 달려가는 ‘돈 키호테’였다.
매출액 중 3%는 R&D에 지속적인 투자
인터폰과 도어폰을 시작으로 코맥스는 비디오폰, 홈시큐리티 시스템, 스마트홈 시스템, 시큐리티 시스템 등으로 제품을 확대했다. SK텔레콤, LG U플러스 등의 통신기업은 코맥스와 손을 잡고 스마트홈 분야에 뛰어들었다. “2000년대부터 무선화와 디지털화를 앞세우는 홈네트워크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IoT(사물인터넷) 시대를 대비했다. 통신대기업이 우리와 손을 잡은 것은 우리가 스마트홈 분야 선도업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IFA 2015’(세계 최대 가전제품 박람회)에 스마트홈 제품인 ‘스마트 비디오폰’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무선 네트워크 방식으로 비디오폰과 스마트폰을 통해 방범과 방재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제어할 수 있는 제품이다.
1976년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시도했던 박람회 참가는 코맥스를 강소기업으로 만들었다. 세운상가 2층 한귀퉁이에서 시작했던 코맥스는 경기도 성남에 사옥을 가진 번듯한 중견기업이 됐다. 변 회장은 이를 ‘관행에 대한 도전’이라고 표현했다. “우리 주위에 항상 기회가 있지만, 관행에 젖어 있으면 보지 못한다. 관행을 벗어나서 새로운 환경에 계속 도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서 코맥스의 브랜드가 인정받는 것은 지속적인 R&D에 투자한 결과다. 연구개발 인력이 전체 임직원의 2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매년 매출액 대비 3% 정도를 R&D에 투자하고 있다. 해마다 50여 개의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출시할 수 있는 이유다. 업계 최초이자 유일하게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인 ‘iF 디자인 어워드’ ‘Red Dot 디자인 어워드’ ‘IDEA 디자인 어워드’를 타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제품의 현화를 적극 채택한 것도 적중했다. 1986년부터 수출에 도전했던 아르헨티나의 경우 치안이 불안한 점을 감안한 제품을 내놓았다. 외부에 설치하는 카메라는 망치로 때려도 부서지지 않는 특수 핀홀 카메라를 적용한 것. 러시아의 경우 혹독한 날씨에도 고장없이 버틸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여러 번 저온 테스트를 진행했다. 러시아는 코맥스의 해외 수출 비중이 가장 큰 국가로 꼽힌다.
1994년 중국 천진에 공장을 세운 것도 현지화 전략의 일환이다. 당시 코맥스의 제품 중 유럽 및 미국으로 수출하는 모델이 국내 인건비 상승으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중국 공장을 남들보다 먼저 시도했다. 당시 중국지 현지 진출 모델이 별로 없었던 만큼 변 회장이 승부수를 띄운 것. “중국도 인건비가 상승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울 것 같다”는 기자의 지적에 “중국 공장에서 만든 제품은 현지에서 판매하는 것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다”고 답변했다.
변 회장이 코맥스의 핵심 경영전략으로 꼽는 것은 인재육성이다. 인재를 키우지 않으면 경쟁에서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많이 사람을 빼앗겨 보니까, 우리가 직접 인재를 키워야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변 회장은 설명했다. ‘코맥스 아카데미’는 여타 중견 기업에서 보기 어려운 교육 프로그램이다. 국내 최고 수준의 교수진을 초빙해 전직원을 대상으로 Pre-MBA와 MBA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모든 직원이 평균 100시간의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리더십, 경영, 비즈니스 스킬 등의 직무 관련 교육만 해왔지만, 지금은 어학이나 자격증 등의 교육과정까지 마련했다.
세계적인 기업이 인수제안 할 정도로 신뢰도 높아
세계에서 인정받는 코맥스를 키워낸 변 회장은 피난민 출신이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시절을 겪었다. 평양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에 ‘도련님’ 소리를 들으며 컸지만, 12살 때 터진 전쟁은 한순간에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만들었다. 아이스크림 장사,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먹고 살기 위해 안해 본 일이 없었다. 아이들 과외를 하면서 한양대 수학과를 졸업했고,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뛰어든 게 사업이었다. “지금까지 기업을 운영하면서 내린 결론은 항상 최선의 방법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 임직원을 이끌어가는 기업가가 해야 할 일이다.”
- 글 최영진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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