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석 기자의 ‘앵그리 2030’ (18) 분열을 답습한 2030] 기성세대처럼 좌우 편 가르기 여전
[장원석 기자의 ‘앵그리 2030’ (18) 분열을 답습한 2030] 기성세대처럼 좌우 편 가르기 여전
대한민국은 분단 국가입니다. 남과 북으로 갈라선 지 70년 가까이 됐으니 꽤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쪼개졌을 땐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국가는 여러 유무형의 토대 위에 세워집니다. 그 가운데 ‘이념’이란 것도 있죠. 한반도에선 바로 ‘요놈’이 문제였습니다. 소위 좌우 대립의 출발점이었죠. 이념엔 철학적사회학적으로 여러 가지 복잡한 해석이 붙지만 현실에선 매우 심플합니다. 딴 생각 할 거 없이 보수냐 진보냐를 따지기만 하면 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적어도 한국에선 그렇습니다. 이 두 단어는 분단 이후 이 땅에서 벌어진 모든 사회 문제와 갈등을 포괄합니다. 워낙 스펀지 같은 용어여서 못 다루는 주제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보수와 진보, 더 이념적인 측면에서 우파와 좌파의 대립은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관측되는 공통적 현상입니다. 우리보다 더 극렬한 갈등을 겪은(또는 겪고 있는) 나라도 많습니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안정된 듯 보이는 선진국 중에도 종교 갈등 못지 않은 이념 갈등에 몸살을 앓은 나라가 꽤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 시점에서 이 나라의 상황이 가장 심각해 보이는 건 갈등이 봉합 단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극단을 향해 치닫기 때문입니다. 이미 보수와 진보라는 이 실체 없는 두 단어는 국민의 언어 생활을 지배하고, 사고를 점령했습니다.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개념적 해석은 접어두겠습니다. 워낙 복잡하고, 학설도 많은데다 사실 정확하다 할 만한 정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전쟁과 분단이란 특수한 상황을 경험한 나라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보수와 진보의 갈등 사이엔 언제나 ‘친북’이란 키워드가 있습니다. ‘북한의 체제를 인정하느냐’ 혹은 ‘이념적으로 가까우냐’로 구분하는 거죠. 지난해 헌법재판소는 소위 진보정당이라 불리던 통합진보당의 정당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숨은 목적을 가지고 활동한 것은 헌법상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된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적어도 ‘친북이냐 아니냐’는 구분이 아직 외교안보적 측면에서 유효하다는 뜻이지요.
선진국으로 갈수록 보수와 진보의 전선은 ‘경제 이슈’로 이동합니다. 전통적으로 보수는 경제 성장과 시장 원리를, 진보는 분배와 국가의 개입을 강조합니다. 세부적으로도 입장 차가 큰 사안들이 있습니다. 최근엔 주로 ‘복지’를 놓고 이견을 보이는 경우가 많죠. 국민들은 이런 보수와 진보의 철학과 활동을 주로 정당을 통해 받아들입니다. 우리나라는 철저한 양당제 국가입니다. 과거 민주노동당이 제3 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준 적이 있지만 사실상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두 당이 권력을 나눠 갖고 있습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만들어진 양당 구도는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틀 안에서 흔히 새누리당을 보수, 새정치민주연합을 진보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언뜻 맞는 것 같은 이 해석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우리나라 정당, 좀 이상합니다. 보수라는 새누리당은 보수 같지 않고, 진보라는 새정치민주연합은 진보 같지 않아서죠. 이 부분에 관해선 외국인의 시선이 가장 정확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특파원은 얼마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한국의 보수는 숫자에만 집착하는 개발주의다. GDP 성장률, 수출액, 그리고 랭킹 숫자들. 보수 정당이라면 자유시장원리에 대한 확고한 기본원칙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시장 질서에 반하는 ‘대기업주의’를 신봉한다. 대기업들은 역사적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많은 혜택을 받아왔다. 그래 놓고 법인세 증세를 이야기하면 자유시장원리를 주장한다. 위선이다. 한국의 진보 역시 대기업주의를 버린 적이 없다. 불법을 저지른 대기업 오너를 사면해주는 건 마찬가지다. 진보라면 사회적 약자들,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하는데 이게 뚜렷하지 않다. 현재의 새정치민주연합은 ‘새누리당의 그림자’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지적의 옳고 그름을 떠나, 대한민국 정치를 독점한 두 정당이 보수와 진보의 기본 철학을 잃고, 맥락 없이 떠도는 건 많은 국민이 공감하는 부분일 겁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두 당은 ‘권력지향적인 보수 정당’으로 묶는 게 타당해 보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집권과 당선입니다. 이를 위해 보수와 진보를 옆집 놀이터마냥 왔다갔다 할 뿐, 선명한 철학이나 원칙은 잘 안 보입니다. 상식적인 정치가 이뤄지려면 일단 각 정당이 명확한 스탠스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대화나 토론의 창구가 열려 있고, 이를 통해 합리적인 타협안을 도출해 내야 합니다. 초등학생도 도덕 교과서에서 배우는 내용이죠. 정리하면 현재의 정치는 스탠스도 명확하지 않은데 대화도, 타협도 안 됩니다.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국민이 90%에 육박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득권을 가진 두 정당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열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국민도 갈라져 있습니다. 왜 정치가 중요한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죠. 명확히 잘못된 이 고리를 누군가는 끊어야 하는데 불행히도 젊은 세대 또한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과 다르다’고 외치지만 적어도 정치관만은 기성세대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답습했습니다.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고, 무조건 상대방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이해와 공감은 없고, 중간 지대에 있는 사람을 회색분자로 몰고 가는 것도 닮았습니다.
그 사이 ‘의식 있는 개인’은 점점 사라지고, 집단과 집단의 구도로 대립합니다. 보수 정당이라는 새누리당에도 무상복지 찬성론자가 있고, 새정치민주연합 안에도 무상복지 반대론자가 있습니다.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하나 같이 합리적이고, 똑똑한 사람들인데 자기의 일터로 돌아가면 이성을 잃고, 표독함과 공격성으로 무장합니다. 온라인 상에서 다투는 20~30대의 모습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의 차이를 무식으로 폄훼하죠.
극단적인 행태를 서슴지 않는 것도 닮았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고 온 나라가 슬픔에 빠졌을 때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회원들의 행동은 그야말로 천박한 수준이었습니다. 서울 노량진역 일대에 매달린 세월호 희생자 추모 노란 리본을 가위로 훼손한 건 약과였죠. 어떤 회원은 단원고 교복을 입고 어묵을 입에 물고 찍은 사진을 올렸습니다. 세상을 떠난 단원고 학생들을 어묵에 빗대 조롱한 겁니다. 가장 잔인했던 건 폭식 퍼포먼스였죠.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머물던 광화문 광장에 보수라 자칭하는 일부 청년들이 몰려와 치킨과 피자를 먹으며 파티를 연 겁니다. 이들은 지금도 각종 자극적 용어를 동원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게 꽤나 멋있는 일인 줄 착각하면서요.
배타적인 건 자칭 진보라 주장하는 20~30대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지인 중에 진보 정치인을 꿈꾸는 이가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환경, 장애인 관련 활동을 했고, 한 진보 정당과 관련된 시민단체에서도 일했습니다. 명석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추진력까지 갖춰 어딜 가나 리더 역할을 맡곤 했는데 잘 준비하면 꿈을 이룰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 그와 불편한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요. “어제 00일보 특집기사 보셨어요?
“아니요. 저는 00일보는 안 봐요.”
제가 언급한 기사는 자영업의 위기를 다룬 특집이었습니다. 핵심을 잘 짚었고, 현장감도 잘 살린 좋은 기사라 생각해 던진 화두였는데 당황스런 답변이 돌아온 겁니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요?”
“아시잖아요. 저랑 성향이 잘 안 맞아요.”
“그건 알겠는데. 자영업의 위기가 정치적 성향과 무슨 관련이 있죠?”
“그냥 보기 싫은 거에요. 저는 00일보 이름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요. 선택은 제 자유 아닌가요?”
“그건 맞는데, 정치를 하겠다는 분이 언론을 가려서야 되겠습니까?”
그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그렇게 싫으면 하다 못해 ‘지피지기’ 차원에서라도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까지 던졌지만 그는 자리를 피해버렸습니다. 혹시나 싶어 제 주변 지인과 동료 중 진보적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 ‘00일보는 안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그렇다’는 답변이 많았습니다. 탄식이 나왔습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문을 걸어 잠가 버리는, 아예 대화나 타협의 여지마저 없애버리는 것까지 우리는 기성세대를 꼭 닮았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야말로 선배들이 물려준 최악의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는 이분법적 구조에 대항하기보다는 전쟁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원화, 다양화된 사회로 갈수록 특정 이슈와 정책을 기존 이념틀로 분류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죠. 경제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저성장이 당연한 시대에 진보라고 성장과 부양책을 제쳐둘 수 없습니다. 보수가 복지에 문을 닫아걸 수 없는 분위기가 된 것처럼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과 같은 문제엔 좌우가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고령화에 대응하는데 보수와 진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김용신 박사는 저서 [보수와 진보의 정신분석]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다원화 시대, 국민의 이해가 양분될 수 없는 현실에서 진부한 좌파와 우파의 이념은 정당 구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어차피 현대 사회에서 정당은 포괄성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억지 구별 때문에 그 의미마저 애매한 중도 보수 혹은 중도 진보, 그리고 합리적 보수 혹은 건전한 진보라는 용어가 생기게 되고 결국은 차별성도 명쾌하지 않은 정치 세력 간에 권력 투쟁만을 야기하여 반대를 위한 반대만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두 정당의 극렬한 대립 때문에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여든 야든 상대 쪽에서 나온 건 일단 반대하고 봅니다.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이 추진했던 일에도 반대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성 따윈 없고, 부끄러움도 모릅니다. 그 사이 급한 일, 서둘러 처리해야 할 일은 모두 제자리걸음입니다. 그러면서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국민을 양쪽으로 가르는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저희가 옳지 않습니까?’라고 의사를 묻는 것 같지만 이는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갈등을 조장하는 건 결과적으로 정치인들에게 유리합니다. 그들은 중도층을 두려워합니다. 중도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거니까요. 하지만 국민은 정치인보다 훨씬 똑똑합니다. 정치권이 철저히 이분화된 것과 달리 국민의 생각은 갈수록 ‘가운데’로 몰리고 있습니다. 올해 8월 조선일보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47.4%가 자신의 정치적 이념 성향을 ‘중도’라고 답했습니다. ‘보수’가 28.7%, ‘진보’가 20.5%였습니다. 10년 전 조사 결과와 비교하면 ‘보수’는 41.1%에서 12.4%포인트, ‘진보’는 26.0%에서 5.5%포인트 감소한 반면 ‘중도’는 28.1%에서 무려 19.3%포인트나 증가했죠. 연령별로는 20대(51.1%)와 30대(54.8%)의 중도층 비중이 매우 높았습니다. 중도층이 현재 지지하는 정당으론 새누리당(30.6%)이 가장 많았지만,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무당(無黨)파가 47.9%로 절반가량이었습니다.
20세기적 의미의 보수와 진보는 조만간 사라질 게 분명합니다. 지배적 이념으로서 이들의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변화는 시작됐습니다. 보수 정당이 진보 정당의 정책을 흡수하고, 진보 정당이 표의 확장성 때문에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건 세계적인 흐름입니다. 주류 정당이 중앙으로 전선을 옮긴 탓에 극우·극좌가 영역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도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전통적인 이념 대립보다는 청년 실업이나 노인 복지 등 세대 갈등적 요소가 정치판의 핵심 전선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의 밥그릇을 지키는 문제가 지금보다 훨씬 민감하게 다가오겠죠. 기성 정당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길 기대할 게 아니라, 직접 팔을 걷고 나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일단 20~30대가 ‘가운데’서 만나야 합니다. 기성세대에게서 철저히 학습 받은 좌우 이념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제 3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념적으로 자유로워야 활동 반경이 넓어집니다. ‘가운데’ 머물러야 힘이 있습니다. ‘20~30대는 당연히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야당의 착각을 깨뜨리려면, ‘어차피 20~30대는 투표도 안 해’라고 거들떠도 안 보는 여당의 오만에 경종을 울리려면 젊은 세대가 캐스팅보트를 꽉 쥐어야 합니다. 20~30대의 삶 속에 누적된 불만과 개혁 의지를 끌어내고, 에너지를 결집시킬 중도적 청년 정치세력이 꼭 탄생해야 합니다. 이렇게 갈라져 있어서는 답이 없습니다. 분단 이후 대한민국 역사는 분열의 역사였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그 연장선이죠. 그러나 시대별로 구분하면 젊은 세대에겐 나름 공통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20~30대였던 1960년대~1990년대까지 젊은 세대는 비교적 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산업화로 시작해, 독재 타도, 민주화까지, 많은 이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힘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요? 분단 이래 젊은 세대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분열된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 2030은 친구와 지인에게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우리 편이면 다행이고, 아니면 싸울 준비를 합니다. 단언컨대 지금은 서로 싸울 때가 아니라, 함께 싸울 때입니다. 고민을 이어갈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다음번에는 ‘20대 총선, 왜 중요한가?’를 주제로 지혜를 모아보겠습니다.
- 장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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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가 없는, 중도가 살기 어려운 사회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개념적 해석은 접어두겠습니다. 워낙 복잡하고, 학설도 많은데다 사실 정확하다 할 만한 정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전쟁과 분단이란 특수한 상황을 경험한 나라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보수와 진보의 갈등 사이엔 언제나 ‘친북’이란 키워드가 있습니다. ‘북한의 체제를 인정하느냐’ 혹은 ‘이념적으로 가까우냐’로 구분하는 거죠. 지난해 헌법재판소는 소위 진보정당이라 불리던 통합진보당의 정당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숨은 목적을 가지고 활동한 것은 헌법상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된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적어도 ‘친북이냐 아니냐’는 구분이 아직 외교안보적 측면에서 유효하다는 뜻이지요.
선진국으로 갈수록 보수와 진보의 전선은 ‘경제 이슈’로 이동합니다. 전통적으로 보수는 경제 성장과 시장 원리를, 진보는 분배와 국가의 개입을 강조합니다. 세부적으로도 입장 차가 큰 사안들이 있습니다. 최근엔 주로 ‘복지’를 놓고 이견을 보이는 경우가 많죠. 국민들은 이런 보수와 진보의 철학과 활동을 주로 정당을 통해 받아들입니다. 우리나라는 철저한 양당제 국가입니다. 과거 민주노동당이 제3 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준 적이 있지만 사실상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두 당이 권력을 나눠 갖고 있습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만들어진 양당 구도는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틀 안에서 흔히 새누리당을 보수, 새정치민주연합을 진보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언뜻 맞는 것 같은 이 해석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우리나라 정당, 좀 이상합니다. 보수라는 새누리당은 보수 같지 않고, 진보라는 새정치민주연합은 진보 같지 않아서죠. 이 부분에 관해선 외국인의 시선이 가장 정확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특파원은 얼마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한국의 보수는 숫자에만 집착하는 개발주의다. GDP 성장률, 수출액, 그리고 랭킹 숫자들. 보수 정당이라면 자유시장원리에 대한 확고한 기본원칙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시장 질서에 반하는 ‘대기업주의’를 신봉한다. 대기업들은 역사적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많은 혜택을 받아왔다. 그래 놓고 법인세 증세를 이야기하면 자유시장원리를 주장한다. 위선이다. 한국의 진보 역시 대기업주의를 버린 적이 없다. 불법을 저지른 대기업 오너를 사면해주는 건 마찬가지다. 진보라면 사회적 약자들,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하는데 이게 뚜렷하지 않다. 현재의 새정치민주연합은 ‘새누리당의 그림자’로만 존재하는 것 같다.”
표독함과 공격성으로 무장한 청년의 이념 싸움
그런데도 기득권을 가진 두 정당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열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국민도 갈라져 있습니다. 왜 정치가 중요한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죠. 명확히 잘못된 이 고리를 누군가는 끊어야 하는데 불행히도 젊은 세대 또한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과 다르다’고 외치지만 적어도 정치관만은 기성세대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답습했습니다.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고, 무조건 상대방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이해와 공감은 없고, 중간 지대에 있는 사람을 회색분자로 몰고 가는 것도 닮았습니다.
그 사이 ‘의식 있는 개인’은 점점 사라지고, 집단과 집단의 구도로 대립합니다. 보수 정당이라는 새누리당에도 무상복지 찬성론자가 있고, 새정치민주연합 안에도 무상복지 반대론자가 있습니다.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하나 같이 합리적이고, 똑똑한 사람들인데 자기의 일터로 돌아가면 이성을 잃고, 표독함과 공격성으로 무장합니다. 온라인 상에서 다투는 20~30대의 모습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의 차이를 무식으로 폄훼하죠.
극단적인 행태를 서슴지 않는 것도 닮았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고 온 나라가 슬픔에 빠졌을 때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회원들의 행동은 그야말로 천박한 수준이었습니다. 서울 노량진역 일대에 매달린 세월호 희생자 추모 노란 리본을 가위로 훼손한 건 약과였죠. 어떤 회원은 단원고 교복을 입고 어묵을 입에 물고 찍은 사진을 올렸습니다. 세상을 떠난 단원고 학생들을 어묵에 빗대 조롱한 겁니다. 가장 잔인했던 건 폭식 퍼포먼스였죠.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머물던 광화문 광장에 보수라 자칭하는 일부 청년들이 몰려와 치킨과 피자를 먹으며 파티를 연 겁니다. 이들은 지금도 각종 자극적 용어를 동원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게 꽤나 멋있는 일인 줄 착각하면서요.
배타적인 건 자칭 진보라 주장하는 20~30대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지인 중에 진보 정치인을 꿈꾸는 이가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환경, 장애인 관련 활동을 했고, 한 진보 정당과 관련된 시민단체에서도 일했습니다. 명석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추진력까지 갖춰 어딜 가나 리더 역할을 맡곤 했는데 잘 준비하면 꿈을 이룰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 그와 불편한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요.
‘보수와 진보’는 기성세대가 물려준 최악의 선물
“아니요. 저는 00일보는 안 봐요.”
제가 언급한 기사는 자영업의 위기를 다룬 특집이었습니다. 핵심을 잘 짚었고, 현장감도 잘 살린 좋은 기사라 생각해 던진 화두였는데 당황스런 답변이 돌아온 겁니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요?”
“아시잖아요. 저랑 성향이 잘 안 맞아요.”
“그건 알겠는데. 자영업의 위기가 정치적 성향과 무슨 관련이 있죠?”
“그냥 보기 싫은 거에요. 저는 00일보 이름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요. 선택은 제 자유 아닌가요?”
“그건 맞는데, 정치를 하겠다는 분이 언론을 가려서야 되겠습니까?”
그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그렇게 싫으면 하다 못해 ‘지피지기’ 차원에서라도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까지 던졌지만 그는 자리를 피해버렸습니다. 혹시나 싶어 제 주변 지인과 동료 중 진보적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 ‘00일보는 안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그렇다’는 답변이 많았습니다. 탄식이 나왔습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문을 걸어 잠가 버리는, 아예 대화나 타협의 여지마저 없애버리는 것까지 우리는 기성세대를 꼭 닮았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야말로 선배들이 물려준 최악의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는 이분법적 구조에 대항하기보다는 전쟁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원화, 다양화된 사회로 갈수록 특정 이슈와 정책을 기존 이념틀로 분류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죠. 경제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저성장이 당연한 시대에 진보라고 성장과 부양책을 제쳐둘 수 없습니다. 보수가 복지에 문을 닫아걸 수 없는 분위기가 된 것처럼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과 같은 문제엔 좌우가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고령화에 대응하는데 보수와 진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김용신 박사는 저서 [보수와 진보의 정신분석]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다원화 시대, 국민의 이해가 양분될 수 없는 현실에서 진부한 좌파와 우파의 이념은 정당 구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어차피 현대 사회에서 정당은 포괄성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억지 구별 때문에 그 의미마저 애매한 중도 보수 혹은 중도 진보, 그리고 합리적 보수 혹은 건전한 진보라는 용어가 생기게 되고 결국은 차별성도 명쾌하지 않은 정치 세력 간에 권력 투쟁만을 야기하여 반대를 위한 반대만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두 정당의 극렬한 대립 때문에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여든 야든 상대 쪽에서 나온 건 일단 반대하고 봅니다.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이 추진했던 일에도 반대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성 따윈 없고, 부끄러움도 모릅니다. 그 사이 급한 일, 서둘러 처리해야 할 일은 모두 제자리걸음입니다. 그러면서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국민을 양쪽으로 가르는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저희가 옳지 않습니까?’라고 의사를 묻는 것 같지만 이는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갈등을 조장하는 건 결과적으로 정치인들에게 유리합니다. 그들은 중도층을 두려워합니다. 중도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거니까요.
‘국민 47.4%가 중도’ 10년 전보다 19.3%p ↑
20세기적 의미의 보수와 진보는 조만간 사라질 게 분명합니다. 지배적 이념으로서 이들의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변화는 시작됐습니다. 보수 정당이 진보 정당의 정책을 흡수하고, 진보 정당이 표의 확장성 때문에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건 세계적인 흐름입니다. 주류 정당이 중앙으로 전선을 옮긴 탓에 극우·극좌가 영역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도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전통적인 이념 대립보다는 청년 실업이나 노인 복지 등 세대 갈등적 요소가 정치판의 핵심 전선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의 밥그릇을 지키는 문제가 지금보다 훨씬 민감하게 다가오겠죠. 기성 정당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길 기대할 게 아니라, 직접 팔을 걷고 나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일단 20~30대가 ‘가운데’서 만나야 합니다. 기성세대에게서 철저히 학습 받은 좌우 이념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제 3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념적으로 자유로워야 활동 반경이 넓어집니다. ‘가운데’ 머물러야 힘이 있습니다. ‘20~30대는 당연히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야당의 착각을 깨뜨리려면, ‘어차피 20~30대는 투표도 안 해’라고 거들떠도 안 보는 여당의 오만에 경종을 울리려면 젊은 세대가 캐스팅보트를 꽉 쥐어야 합니다. 20~30대의 삶 속에 누적된 불만과 개혁 의지를 끌어내고, 에너지를 결집시킬 중도적 청년 정치세력이 꼭 탄생해야 합니다. 이렇게 갈라져 있어서는 답이 없습니다.
기성 정당에 기대지 않는 ‘제3의 길’ 찾아야
- 장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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