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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주 기자의 글로컬 컴퍼니 | 비브라운코리아] “출혈경쟁 삼가고 큰 물에 같이 나가자”

[박상주 기자의 글로컬 컴퍼니 | 비브라운코리아] “출혈경쟁 삼가고 큰 물에 같이 나가자”

김해동 비브라운코리아 회장 / 사진:전민규 기자
창립 이후 175년 동안 단 한 번도 구조조정 없이 성장해온 기업이 있다. 역사책에 기록될 만한 글로벌 경기 침체를 여러 차례 겪었지만 꿋꿋하게 버티며 성장했다. 교과서 같은 이야기지만, 이 기업의 핵심가치는 ‘지속가능성’이다. 무리하게 확장하지 않고 꾸준히 내실을 다진 게 지속성장의 비결이다.

하지만 이런 경영전략만으로 장기 성장을 이룬 건 아니다. 직원과 회사가 상생하겠단 가치가 더 중요했다. 1929년 다들 대 공황에 허덕일 때, 이 기업은 영구적으로 실직하거나 은퇴한 직원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주기 위한 구제기금을 마련했다. 노동조합은커녕 노동계층에 참정권을 부여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시기였다. 지금도 이 기업이 강조하는 지속가능경영 가치 중 중요한 부분은 이 같은 ‘나눔’이다. 전문 의료기기와 의약품 공급을 주업으로 하는 독일 기업 비브라운 얘기다.
 한국 기업의 글로벌 진출에 주력
비브라운은 독일 중부 멜순겐이란 작은 동네에서 시작한 기업이다. 지금도 회사가 동네보다 클 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비브라운은 산업 인프라가 발전된 소도시에서 만들어진 독일의 ‘히든챔피언’으로 손꼽힌다. 글로벌 의료기기 업체라고 하면 GE, 지멘스, 필립스 등을 주로 떠올린다. 이들은 각종 이미징 기계와 MRI(자기공명영상촬영장치) 등을 판매한다. B2C에 주력해왔기 때문에 소비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진단을 받을 때 기계에 붙은 로고 때문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이와 달리 비브라운은 B2B 회사로 병원 등에만 잘 알려져 있다. 병원에서 쓰이는 소모품을 주로 제조한다. 인공관절 무릎이나 엉덩이 부분의 인공뼈, 뇌 천공기, 혈관 확장에 쓰는 스탠트, 수술한 뒤 쓰는 봉합사 등을 만든다. 비브라운을 모르는 사람들도 영양수액을 처음으로 상업화한 회사라고 하면 대략 고개를 끄덕인다. 비브라운의 영양수액으로 음식을 못 먹는 환자가 영양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 이런 이유로 비브라운은 글로벌 시장에서 의료소모품 관련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이 외에도 정형외과나 신경외과 등에서 쓰이는 인공신장, 초정밀소모품 등 의료용품 부문에서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다. 병원에서 로고가 보이지 않는 각종 의료기기 상당수가 비브라운 제품이다.

비브라운은 글로벌 시장에서 연간 7조원가량의 매출을 올린다. 많은 것 같지만 제약 외 의료기기 관련 세계 전체 시장이 약 3200억 달러(약 373조원) 규모인 것을 감안하면 그리 대단한 매출은 아니다. 한국 실적은 연간 90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 역시 그리 크지 않다. 세계 의료기기 관련 규모는 10조원 내외로 한국은 전체 글로벌 시장의 1.6% 정도에 불과하다. 10위권 국가 경제 규모치곤 적은 편이다.

한국은 특히 의료용품 시장이 작은 편이다. 의료용품 시장은 크게 제약과 의료기기로 나뉜다. 미국 시장에선 전체 의료시장 중 제약과 의료기기 비중이 2.7대 1 수준이다. 한국은 4.8대 1이다. 의료 분야에서 제약이 주도적이란 의미다. 비브라운 등 의료용품 기업들은 그만큼 한국의 의료기기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의료용품은 각국 건강보험 제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한국의 의료용품 시장에는 이런저런 규제가 많아 세계 의료용품 업계가 진입하기 쉽지 않은 시장으로 분류하고 있다.

비브라운은 이를 기회로 보고 있다. 의료산업이 한국의 미래 주력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고, 의료기기산업은 연구개발비 등 투자 대비 수익율이 높아 대기업의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제약 부문에선 신약 개발을 위해 수조 원을 연구개발비로 쓴다. 임상실험까지 마치려면 10년 이상 평균 5조원 넘게 든다. 그에 비해 의료기기는 상대적으로 작은 스타트업 기업이나 바이오벤처도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연구개발비가 적게 든다.

비브라운은 다소 뜻밖의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시장에 대한 점유율 확대보다 한국 의료기기 벤처의 해외 진출에 무게를 두고 있다. IT 등에 강한 한국의 의료기기 벤처들이 한국의 좁은 내수시장에서 경쟁하다 쓰러질 수 있으니 글로벌 시장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돕겠단 얘기다. 비브라운 코리아의 김해동(62) 대표는 “많은 기업이 의료기기 관련 바이오 분야로 해외 진출을 하고 싶어 하는데, 직접 해외에 나가면 작은 기업의 파트너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며 “비브라운은 한국의 많은 의료기기·의료소모품 제조 기업이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도움을 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의료기기와 관련해 참신한 아이디어나 제작기술을 가진 벤처기업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손짓한다. 사업성만 있다면 비브라운 코리아가 각국 네트워크를 활용해 해외 진출을 도와주겠다는 얘기다. 좁은 시장에서 서로 출혈경쟁하지 말고 넓은 시장에 함께 도전하자는 발상의 전환이다. 비브라운이 가진 ‘상생’과 ‘나눔’이라는 경영가치에 따른 판단이다.

글로벌 본사와 마찬가지로 비브라운 코리아에서도 역시 단 한 번의 구조조정도 없었다. 외환위기 땐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월급의 일정 부분을 회사에 반납하며 버텼다. 독일 본사 이사회는 이에 감동해 비브라운 코리아에 대대적인 특별 지원을 결정했다. 비브라운 코리아를 세운 김해동 대표는 비브라운의 영업사원으로 시작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16년 연속 평균 30% 이상의 성장을 일궈냈고 2004년에 비독일인으론 처음으로 아시아 태평양지역 총괄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김 대표의 주요 임무는 영업이나 시장 확대 등이 아니다. 바로 ‘평생 학습’이다. 비브라운의 오너인 루드비히 게오르크 브라운(Ludwig George Braun) 회장은 김해동 대표를 아시아 태평양 지역 총괄 사장에 임명하면서 특별한 주문을 했다. 각국에 ‘비브라운 스쿨’을 만들라는 임무다. 비브라운 스쿨은 직원들의 평생 학습 조직이다. 김해동 대표의 염원이기도 한 이 사업은 10년 이상 진행됐다. 현재 아시아태평양 각지에 비브라운 비즈니스 스쿨이 만들어졌다.
 “기업은 평생학습의 장”
실제 비브라운 코리아를 방문해 보면 ‘학교’ 같은 느낌이 든다. 회사 내 학습조직을 중요시하다 보니 분위기가 그렇게 형성됐다. 김 대표는 학습이 직원들의 행복과 창의적인 문제해결에 절대 요소라고 본다. “창의력이나 혁신은 누가 몰아붙여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왜’라는 의문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자연스레 학습해야 하고 거기에 몰입하면 아는 즐거움,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아이디어가 모이면 기업은 성과를 낼 수 있지요. 한국 지사 설립 이후 지속성장한 비결이 바로 ‘학습’입니다.”

비브라운 코리아에선 국내 유명 교수들을 초빙해 워크숍을 하고 마케팅 강의도 연다. 기존 비즈니스 모델을 재분석하고 학습 중에 나온 의견에 따라 과감한 개혁을 지속한다. 김 대표가 직접 나서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기도 한다. 성과를 내라며 독려하기보다 그 답을 직원 스스로 찾도록 하자는 것이다.

- 박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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