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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자금만 쏟아붓는다고…

공적자금만 쏟아붓는다고…

한국이 저성장 시대에 직면했다.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온 조선·해운·석유화학·건설산업이 비틀거린다. 특히 세계 1위를 자랑하던 조선산업은 구조조정 없이는 생존이 어려운 지경이다. 몇 년 만에 조선업종의 기업가치 75% 정도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부실은 2012년 말 커지기 시작해 벌써 4년째에 이른다. 회사는 의심스러운 회계로 부실을 숨겨왔고, 이를 감시할 산업은행은 구조조정을 유도하지 못한 채 몰락해 가는 회사를 지켜봤다.

대우조선해양은 1997년 외환위기 후 산업은행 관리에 들어갔다. 대우그룹 해체 과정에서 정부는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산업은행이 대우조선을 품에 안은 지 18년이 지났다. 대우조선이 우량 기업으로 되살아나 막대한 흑자를 올린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산업은행은 그런 때도 대우조선의 새로운 주인을 찾아 주지 못했다. 기업이 다시 어려워 질 땐 부실을 이겨낼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회생의 자구노력이나 혁신을 유도하지 못했다.

대우조선이 다시 병들어 자리에 눕자 막대한 국민의 부담을 전제한 공적자금 투입을 들고 나왔다. 부실 규모가 너무 커 기존 공금융 자금 투입으로 어려워지자 법개정까지 시작했다.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통한 한국적 구조조정용 양적완화다. 산업은행의 자본금을 늘려서 부실 기업에 투입하자는 계산이다.

양적완화를 이용한 산업 구조조정은 미국 등에서 자주 쓴 정책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자동차산업에 투입한 공적자금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GM과 포드는 위기에 직면했다. 미 정부는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을 위해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 회생시켰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위기는 유가 상승에 따른 자동차 수요의 감소와 수입차와의 경쟁에서 비롯됐다. 자금 지원은 고효율 엔진을 장착한 신모델 개발에 사용했다. 소비자들이 다시 미국 자동차를 선택하며 산업이 되살아 났다.

한국 산업을 보자. 조선업과 해운은 거의 내수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의 자금 투입만으로는 시장 수요를 회복하기 어렵다. 유가의 변동성이 위기를 가져왔다는 것은 같다. 하지만 유가 하락은 셰일가스 생산량 증가 같은 시장의 구조 변화에 기인한다. 조선산업의 위기는 경기변동성을 넘는 구조적 위기다. 한 분기에 배 한 척 수주 못하는 상황이다. 공적자금의 투입으로 어떤 목표를 성취할지 먼저 명확히 계산해야 한다. 기업이 부실해질 때 경영진과 채권단은 기업의 잔존가치가 청산가치보다 크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여기에 기업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전제돼야 한다. 국민의 세금은 단 한 푼이라도 가볍게 여겨서는 곤란하다. 지금 한국에선 구조조정의 전제 조건은 논의조차 되지 않은 채로 공적자금의 투입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에서 한 국가의 산업 경쟁력은 매 순간 바뀔 수 있다. 매번 부실을 공적자금으로 막고 책임조차 지지 않는 관치금융으론 버티는 데 한계가 있다. 현실에서 당장을 모면하는 편법으로는 우리 경제 전반의 부실화를 예방할 수 없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양적완화를 기정사실화 해선 안 된다. 몰려오는 부실의 먹구름이 심상치 않다.

- 이병태 KAIST 경영대학 교수·KAIST 청년창업투자지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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