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국 비타민하우스 대표
김상국 비타민하우스 대표
비타민하우스 김상국 대표는 자본금 3000만원으로 시작해 매출 1500억원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키워냈다. 남이 해보지 않은 길을 거침없이 내달렸기 때문에 이런 성공 스토리가 가능했다 #. 2000년 8월, 대기업을 다녔던 30대 후반의 김상국 대표는 “우리끼리 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비타민하우스라는 조그마한 건강식품 업체를 설립했다. 자본금은 달랑 3000만원. 해외에서 건강식품을 수입해 파는 업종이었다. 이곳에 취업한 5명의 직원은 모두 고졸 출신. 대졸자 누구도 이런 곳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강식품을 파는 업체는 많았다. 경쟁력을 갖추려면 남들과 달라야만 했다. 약국을 노리기로 했다. 그해 7월 의약분업이 실시된 것을 눈여겨봤다. “의사의 처방전으로 약을 제조하는 데 약사들이 시간을 빼앗기더라. 우리가 영양사를 고용하고 약국 한 켠에 건강식품을 전문으로 파는 코너를 만들면 될 것 같았다.” 김 대표의 말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숍인숍’ 형태다. 약국 한 켠에 건강식품 상담 코너를 만들어보자고 계획했다. 건강식품을 전문적으로 상담해주는 영양사도 고용했다. 약사들은 생소한 시스템에 별다른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는 사람 소개로 회사 설립 1개월 만에 전라도 광주에 있는 약국과 1호점 계약을 맺었다. 1개월 만에 건강식품 코너에서 올린 매출이 1500만원이었다. 약사는 물론 김 대표도 결과물에 놀랐다. 소문은 광주 시내에 있는 약국으로 퍼져나갔다. 한국에 처음으로 약국과 건강식품 상담코너가 함께 들어선 최초의 사례가 시작됐다. “우리는 약을 팔러 다니는 영업사원이 아니다. 약국에 새로운 수익모델을 창출해주는 컨설팅 회사라는 컨셉트로 영업을 했고, 그게 성공했다.” #. 2001년 5월 12평짜리 오피스텔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CJ39쇼핑(현 CJ오쇼핑) 전무입니다. 거기가 비타민을 수입해서 파는 곳입니까.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제가 그곳으로 갈까요, 대표가 이곳으로 오시겠습니까?” 전화를 끊은 후에도 김 대표는 어안이 벙벙했다. “왜 우리같은 조그마한 곳에 전화를 했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김 대표는 광주의 성공을 발판으로 서울 약국 공략에 나서고 있던 중이다. 서울 가락동에 마련한 12평짜리 오피스텔이 집이자 사무실이었다. 직원 몇 명과 함께 지내는 남자냄새 풀풀 나는 곳에 홈쇼핑 임원이 오는 것은 막고 싶었다.
“우리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미팅 약속이 잡힌 날 홈쇼핑 본사로 찾아갔다. 전무는 물론 담당 부장, 과장, MD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김 대표를 만난 홈쇼핑 전무는 “귀사가 수입한다는 비타민을 홈쇼핑에서 팔고 싶다”는 파격 제안을 했다. 해외에서 오래 생활했던 전무는 한국에서도 비타민 제품의 대중화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함께 미팅에 참여했던 김 대표와 직원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 대표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홈쇼핑에서는 비타민 제품을 팔지 않겠습니다”였다.
파격적인 제안에 No라는 답변이 나오는 황당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홈쇼핑 전무가 잠시 후 말을 이어갔다. “이유가 뭡니까?” “비타민을 수입하면 저희와 계약이 되어 있는 서울 약국 100여 곳에 납품할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그럼 우리가 100여 곳의 약국을 모두 촬영해서 홍보해드리겠습니다. 비타민을 홈쇼핑에서 팔아봅시다. 언제 판매를 할 수 있습니까?” “캐나다 업체와 수입 계약을 맺은 것은 맞지만, 언제 들어올지는 모릅니다. 4~5개월 정도면 한국에 들어올 것 같습니다.”
우여곡절끝에 2001년 9월 27일, 홈쇼핑 사상 비타민 제품이 처음으로 판매됐다. “2시간 동안 1억8000만원이 팔렸다. 나는 최대 판매액이 3000만원 정도일 거라고 예상했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2002년 월드컵 기간에는 2시간 만에 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기록적인 판매고였다. 김 대표는 “당시 소비자들이 모두 TV 앞에 앉아서 축구를 기다렸기 때문에 홈쇼핑 매출이 높았다”고 설명했다.
2000년 5월 설립해 15년 만에 15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성장시킨 비타민하우스 김상국(50) 대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을 일으키면서 회사를 성장시켰다. “우리들은 최초라는 기록을 많이 썼다”고 김 대표는 강조했다. 비타민이 홈쇼핑을 통해 판매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약국에 숍인숍 형태로 건강식품 판매 코너를 만든 것도 김 대표가 처음으로 시도했다. 2008년부터 시작한 약국간판 교체사업으로 비타민하우스 로고가 붙은 약국 간판이 전국에 1000여 곳이나 된다.
백화점에 비타민 판매 부스를 만든 것도 비타민하우스가 시초였다. 약국에 제품을 납품하면서 선결제 시스템을 도입한 것도 업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거대 제약사들도 약사들에게 선결제를 요구한 적이 없다. 우리는 갑과 을이 아니라 약국과 동반성장하는 동반자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선결제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고 김 대표는 웃었다.
광주에서 숍인숍 1호점을 낸 후 2개월 만에 서울에 도전한 것도 신의 한수였다. 전국에 2만여 개의 약국이 있는데, 현재 6000여 개의 약국이 비타민하우스와 계열사인 더닥터스 가맹점으로 등록되어 있다. “2000여 개 가맹점 약국이 목표였는데, 전국 약국의 30%를 가맹점으로 두게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어느 것 하나 믿기 힘든 사건이고 성과다. 비타민하우스는 그렇게 신선한 시도를 하는 혁신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업계의 관행을 과감하게 깬 것이 비타민하우스의 성공 비결인 셈이다. 광주에서 비타민하우스의 위상은 상당히 높다. 지식경제부장관 표창, 보건복지부장관표창 등 3개의 장관 상을 받았고, 성실납세기업으로 국세청장 상도 받았다. 비타민하우스는 기부도 많이 하는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김 대표는 “기부는 하면 할수록 중독이 된다”며 웃었다.
설립 초기 캐나다, 호주, 독일 등에서 비타민을 수입해 판매에 그쳤지만, 이제는 제조부터 유통까지 책임지는 어엿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비타민하우스가 제작하는 제품만 700여 가지나 된다. 수출도 하고 있다. “아직 수출 매출액은 미미하지만, 수출을 시작한 지는 10년이 됐다. 싱가포르가 첫 수출국이었고, 중국·인도네시아·러시아 등에 수출을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2010년 10월 전남 담양에 GMP(Good Manufacturing Practice) 인증을 받은 제조공장 ‘비타민하우스알앤피’를 준공했다. 비타민하우스 제2 공장도 계획 중이다. 대표와 고졸직원 5명에 불과했던 임직원은 5월 현재 2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계약직은 한명도 없다”고 김 대표는 강조했다. 설립 초기 입사했던 고졸 출신 직원 5명 중 2명은 여전히 임원으로 일하고 있다.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는 기업으로 키우는 게 김 대표의 목표다. 얼마 전에는 고졸 출신의 직원을 채용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전남 완도 출신인 김 대표는 한국외국어 대학교에서 말레이·인도네시아어를 전공했다. “김 양식을 하는 집이었고, 아버지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 홀로 5남 2녀를 키우셨으니 집이 가난했다”고 회고했다.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만 했다. 지하철에서 신문배달을 했던 최초의 대학생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안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웃는 얼굴로 생활했다.
ROTC 장교로 제대한 후 들어간 곳은 미원(현 대상)그룹 식품 영업본부였다. “그때는 인도네시아를 가고 싶어서 입사했다”며 웃었다. 그의 바람대로 인도네시아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지만 몇 개월 만에 본사로 복귀해야만 했다. “인도네이사를 제2의 고향으로 알고 뼈를 묻으려고 했는데, 그게 안되서 무척 섭섭했다”고 말할 정도.
그가 건강식품 분야에 눈을 뜬 것은 3년 동안 근무했던 건강사업부 경력 때문이다. “내 일을 하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다. 2008년 부서에서 경험한 건강식품 몇 가지 아이템을 가지고 나와 대리점 사업을 시작한 것이 비타민하우스의 시초다.
“제약회사에서도 비타민이 나온다. 비타민하우스가 이런 장벽을 어떻게 이겨냈나?”라는 질문에 “거대 제약사에 비해 자본과 인력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제품의 질과 함께 콘셉트로 승부를 걸었다”고 설명했다. 비타민하우스 이전 비타민 제품은 어른 2알, 아이 1알 복용이 대부분이었다. 김 대표는 연령대별 맞춤형 비타민 제품을 선보였다. 남성, 여성, 노인, 임산부용 비타민 시리즈 제품을 내놓아 히트를 쳤다. 2006년 월드컵 기간에는 ‘박지성 비타민’을 출시해 대박을 터트렸다.
올해 김 대표는 새로운 도전에 집중할 계획이다. OEM 계약이 첫 번째다. 다른 기업의 건강식품을 제조해주는 사업이다. 성과도 좋다. “얼마 전부터 타기업 제품의 OEM 생산을 시작했는데, 수요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 우리는 건강식품의 모든 것을 다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자랑했다. 중국 시장 진출도 서두르고 있다. 중국 현지에서 7개 제품을 수출 허가를 받았고, 중국 웨이하이시의 면세구역에 점포를 낼 계획이다.
김 대표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13년 째 만들어 오고 있는 ‘Vitamin’이라는 제목의 사보를 보여줬다. “설립 3년 만에 사보를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고 있다. 고객들에게 건강에 대한 제대로 된 콘텐트를 알려주기 위해서다”고 강조했다. 건강식품을 만드는 회사의 CEO답게 소비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 글 최영진 기자·사진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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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 따지면 ‘숍인숍’ 형태다. 약국 한 켠에 건강식품 상담 코너를 만들어보자고 계획했다. 건강식품을 전문적으로 상담해주는 영양사도 고용했다. 약사들은 생소한 시스템에 별다른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는 사람 소개로 회사 설립 1개월 만에 전라도 광주에 있는 약국과 1호점 계약을 맺었다. 1개월 만에 건강식품 코너에서 올린 매출이 1500만원이었다. 약사는 물론 김 대표도 결과물에 놀랐다. 소문은 광주 시내에 있는 약국으로 퍼져나갔다. 한국에 처음으로 약국과 건강식품 상담코너가 함께 들어선 최초의 사례가 시작됐다. “우리는 약을 팔러 다니는 영업사원이 아니다. 약국에 새로운 수익모델을 창출해주는 컨설팅 회사라는 컨셉트로 영업을 했고, 그게 성공했다.”
‘숍인숍’ 약국 영업과 홈쇼핑 판매로 성공
“우리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미팅 약속이 잡힌 날 홈쇼핑 본사로 찾아갔다. 전무는 물론 담당 부장, 과장, MD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김 대표를 만난 홈쇼핑 전무는 “귀사가 수입한다는 비타민을 홈쇼핑에서 팔고 싶다”는 파격 제안을 했다. 해외에서 오래 생활했던 전무는 한국에서도 비타민 제품의 대중화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함께 미팅에 참여했던 김 대표와 직원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 대표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홈쇼핑에서는 비타민 제품을 팔지 않겠습니다”였다.
파격적인 제안에 No라는 답변이 나오는 황당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홈쇼핑 전무가 잠시 후 말을 이어갔다. “이유가 뭡니까?” “비타민을 수입하면 저희와 계약이 되어 있는 서울 약국 100여 곳에 납품할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그럼 우리가 100여 곳의 약국을 모두 촬영해서 홍보해드리겠습니다. 비타민을 홈쇼핑에서 팔아봅시다. 언제 판매를 할 수 있습니까?” “캐나다 업체와 수입 계약을 맺은 것은 맞지만, 언제 들어올지는 모릅니다. 4~5개월 정도면 한국에 들어올 것 같습니다.”
우여곡절끝에 2001년 9월 27일, 홈쇼핑 사상 비타민 제품이 처음으로 판매됐다. “2시간 동안 1억8000만원이 팔렸다. 나는 최대 판매액이 3000만원 정도일 거라고 예상했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2002년 월드컵 기간에는 2시간 만에 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기록적인 판매고였다. 김 대표는 “당시 소비자들이 모두 TV 앞에 앉아서 축구를 기다렸기 때문에 홈쇼핑 매출이 높았다”고 설명했다.
2000년 5월 설립해 15년 만에 15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성장시킨 비타민하우스 김상국(50) 대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을 일으키면서 회사를 성장시켰다. “우리들은 최초라는 기록을 많이 썼다”고 김 대표는 강조했다. 비타민이 홈쇼핑을 통해 판매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약국에 숍인숍 형태로 건강식품 판매 코너를 만든 것도 김 대표가 처음으로 시도했다. 2008년부터 시작한 약국간판 교체사업으로 비타민하우스 로고가 붙은 약국 간판이 전국에 1000여 곳이나 된다.
백화점에 비타민 판매 부스를 만든 것도 비타민하우스가 시초였다. 약국에 제품을 납품하면서 선결제 시스템을 도입한 것도 업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거대 제약사들도 약사들에게 선결제를 요구한 적이 없다. 우리는 갑과 을이 아니라 약국과 동반성장하는 동반자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선결제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고 김 대표는 웃었다.
광주에서 숍인숍 1호점을 낸 후 2개월 만에 서울에 도전한 것도 신의 한수였다. 전국에 2만여 개의 약국이 있는데, 현재 6000여 개의 약국이 비타민하우스와 계열사인 더닥터스 가맹점으로 등록되어 있다. “2000여 개 가맹점 약국이 목표였는데, 전국 약국의 30%를 가맹점으로 두게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어느 것 하나 믿기 힘든 사건이고 성과다. 비타민하우스는 그렇게 신선한 시도를 하는 혁신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업계의 관행을 과감하게 깬 것이 비타민하우스의 성공 비결인 셈이다. 광주에서 비타민하우스의 위상은 상당히 높다. 지식경제부장관 표창, 보건복지부장관표창 등 3개의 장관 상을 받았고, 성실납세기업으로 국세청장 상도 받았다. 비타민하우스는 기부도 많이 하는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김 대표는 “기부는 하면 할수록 중독이 된다”며 웃었다.
설립 초기 캐나다, 호주, 독일 등에서 비타민을 수입해 판매에 그쳤지만, 이제는 제조부터 유통까지 책임지는 어엿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비타민하우스가 제작하는 제품만 700여 가지나 된다. 수출도 하고 있다. “아직 수출 매출액은 미미하지만, 수출을 시작한 지는 10년이 됐다. 싱가포르가 첫 수출국이었고, 중국·인도네시아·러시아 등에 수출을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2010년 10월 전남 담양에 GMP(Good Manufacturing Practice) 인증을 받은 제조공장 ‘비타민하우스알앤피’를 준공했다. 비타민하우스 제2 공장도 계획 중이다.
중국 웨이하이시 면세구역 입점 준비
전남 완도 출신인 김 대표는 한국외국어 대학교에서 말레이·인도네시아어를 전공했다. “김 양식을 하는 집이었고, 아버지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 홀로 5남 2녀를 키우셨으니 집이 가난했다”고 회고했다.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만 했다. 지하철에서 신문배달을 했던 최초의 대학생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안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웃는 얼굴로 생활했다.
ROTC 장교로 제대한 후 들어간 곳은 미원(현 대상)그룹 식품 영업본부였다. “그때는 인도네시아를 가고 싶어서 입사했다”며 웃었다. 그의 바람대로 인도네시아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지만 몇 개월 만에 본사로 복귀해야만 했다. “인도네이사를 제2의 고향으로 알고 뼈를 묻으려고 했는데, 그게 안되서 무척 섭섭했다”고 말할 정도.
그가 건강식품 분야에 눈을 뜬 것은 3년 동안 근무했던 건강사업부 경력 때문이다. “내 일을 하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다. 2008년 부서에서 경험한 건강식품 몇 가지 아이템을 가지고 나와 대리점 사업을 시작한 것이 비타민하우스의 시초다.
“제약회사에서도 비타민이 나온다. 비타민하우스가 이런 장벽을 어떻게 이겨냈나?”라는 질문에 “거대 제약사에 비해 자본과 인력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제품의 질과 함께 콘셉트로 승부를 걸었다”고 설명했다. 비타민하우스 이전 비타민 제품은 어른 2알, 아이 1알 복용이 대부분이었다. 김 대표는 연령대별 맞춤형 비타민 제품을 선보였다. 남성, 여성, 노인, 임산부용 비타민 시리즈 제품을 내놓아 히트를 쳤다. 2006년 월드컵 기간에는 ‘박지성 비타민’을 출시해 대박을 터트렸다.
올해 김 대표는 새로운 도전에 집중할 계획이다. OEM 계약이 첫 번째다. 다른 기업의 건강식품을 제조해주는 사업이다. 성과도 좋다. “얼마 전부터 타기업 제품의 OEM 생산을 시작했는데, 수요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 우리는 건강식품의 모든 것을 다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자랑했다. 중국 시장 진출도 서두르고 있다. 중국 현지에서 7개 제품을 수출 허가를 받았고, 중국 웨이하이시의 면세구역에 점포를 낼 계획이다.
김 대표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13년 째 만들어 오고 있는 ‘Vitamin’이라는 제목의 사보를 보여줬다. “설립 3년 만에 사보를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고 있다. 고객들에게 건강에 대한 제대로 된 콘텐트를 알려주기 위해서다”고 강조했다. 건강식품을 만드는 회사의 CEO답게 소비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 글 최영진 기자·사진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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