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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퍼지는 ‘적색 공포’

러시아에 퍼지는 ‘적색 공포’

지난해 11월 볼셰비키 혁명 98주년을 맞아 개최된 러시아 공산당 집회에서 레닌 초상화가 등장했다.
블라디미르 오부호프스키(23)는 이오시프 스탈린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깊은 경외심에서 목소리가 저절로 낮아진다. 그는 아직 너무 어려 소련 독재자 스탈린 치하의 삶을 알지 못한다. 사실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크렘린 꼭대기에 다시 한번 붉은 기가 펄럭이길 간절히 기대한다. 옛 소련 공산주의 청년 정치조직 콤소몰의 현대판 단체를 이끄는 오부호프스키는 “우리 나라는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만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의 러시아 정부는 소련이 건설한 모든 것을 전부 파괴했다.”

옛 소련 시절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러시아인이 오부호프스키만이 아니다. 소련 붕괴 후 사반세기 이상이 지났지만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사상의 인기는 수그러들줄 모른다. 옛 소련 시스템이 제공한 사회안전망에 대한 향수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국민 다수를 극빈 상황으로 몰아넣는 경제위기로 고전하는 상황에서 오는 9월 18일 총선을 앞두고 공산당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다.

올가을 총선 승리를 노리는 공산당의 정강정책은 무엇보다 천연자원과 담배·술 산업의 국유화다. 사회 지출을 늘릴 자본을 확충하기 위해서다. 또 공산당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10여 년 전 도입한 13% 일률 과세를 누진세율로 대체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공산당 지역의원 겐나디 주브코프는 “최저 임금을 받는 환경미화원이 신흥 갑부와 똑같은 세율을 적용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엔 동시베리아 이르쿠츠크 주지사 선거에서 공산당 후보였던 세르게이 레브첸코가 집권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의 후보를 물리치고 선출됐다. 그 ‘사건’은 세심하게 조종되는 러시아 정치 시스템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크렘린이 2012년 주지사 선출에 직접선거제를 재도입한 이래 푸틴 대통령이 지지하는 후보가 패한 일은 처음이었다. 현지 공산당 운동가들에 따르면 레브첸코의 득표율이 압도적으로 높아 크렘린 편을 드는 선거관리위원회조차 여당 후보의 승리를 조작할 수 없었다(그들은 러시아 전역에서 그런 선거 조작이 흔히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지난 5월 모스크바 소재 여론조사 기관 레바다 센터(러시아에서 여론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널리 인정된다)는 공산당의 지지율이 지난 4월 15%에서 5월 21%로 6%포인트 늘었다고 발표했다. 지난 2월 레바다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50% 이상은 옛 소련식 계획경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서방 세계는 크렘린을 비판하는 반체제 인사로 지난해 암살당한 보리스 넴초프나 카리스마 강한 부패척결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에 관해 더 잘 안다. 그러나 공산당은 러시아 의회에서 두 번째로 큰 정당이다. 러시아인 수백만 명에겐 공산당이 푸틴 대통령과 집권 여당 통합러시아당에 맞서는 진정한 야당을 상징한다. 특히 대도시를 벗어나 지방으로 가면 그런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런 곳에선 나발니 같은 반푸틴 운동가들이 친민주주의 메시지를 전하기 힘들지만 공산당은 막강한 자금(매년 연방 예산에서 2200만 달러를 지원 받는다)과 조직으로 승승장구한다.

모스크바에서 약 800㎞ 떨어진 빈곤한 마리엘 주에서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도시 볼시스크가 좋은 예다. 이곳의 인프라는 대부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았다. 보도 대신 먼지 날리는 오솔길, 움푹 패인 도로, 무너져가는 공공시설 등. 9월 총선에 출마한 공산당 소속 후보 안드레이 칼루긴은 검게 타 골격만 남은 건물 앞에서 “이곳이 우리 영화관이었다”고 말했다. “이름이 ‘조국’이었다. 3년 전에 불탔는데 다시 세울 돈이 없는 것 같다.” 러시아의 경제난을 불탄 극장에 빗댄 표현이었다.

푸틴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늘 그렇듯이 러시아의 오랜 지도자인 그가 ‘무릎 꿇은 러시아를 일으켜 세웠다’고 칭송한다. 그러나 볼시스크를 포함해 마리엘 주의 모든 곳에선 그런 거창한 주장이 엄연한 현실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마리엘 주의 또 다른 공산당 의원 후보인 세르게이 카잔코프는 “지난 15년 동안 러시아에선 공장이 문을 닫았고 도로가 황폐해졌으며 많은 사람이 집을 장만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지금도 옛 소련 시절을 기억한다. 국가가 아파트를 제공했고 모든 국민에게 일자리가 있었던 시절 말이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쉽게 잊지 않는다.”

그곳의 공산당원들은 고위층의 부패가 이처럼 비참한 상황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마리엘 주는 러시아에서 여섯 번째로 가난한 지역으로 평균 월급이 고작 2만2000루블(약 37만원)이다. 볼시스크에선 급여가 더 낮다. 낡은 스포츠센터에서 파트타임 경비원으로 일하는 중년의 스베틀라나는 “월 5000루블을 버는데 공공요금만 1만 루블을 납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지역의 많은 사람처럼 그도 푸틴 대통령이 이끄는 통합러시아당을 좋게 보지 않는다. “우린 당연히 공산당을 지지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꼴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나?”

최근 들어 러시아 공산당의 메시지는 더 날카롭고 초점이 명확해졌다. 국가적인 부패 문제에서 특히 그렇다. 크렘린도 인정하듯이 러시아는 부패로 연간 약 300억 달러의 손실을 입는다. 공산당은 푸틴 대통령을 직접 비판하진 않았지만 고위 당 간부들은 그의 측근들을 맹비난했다.

또 공산당은 유엔 부패방지협약 제20조를 비준하도록 의회에 압력을 가하는 온라인 청원운동도 시작했다. 공무원이 공식 소득보다 지출을 더 많이 할 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면 자동으로 형사 기소된다고 명시한 조항이다. 러시아 공산당의 모스크바 지부장 발레리 라슈킨은 “푸틴 대통령 측근들이 특별 대우를 받으며 횡령과 뇌물로 축재를 일삼는다”고 말했다. “요즘의 부패는 러시아의 몸에서 점점 커지는 암과 같다. 도려내지 않으면 러시아의 목숨이 위험하다.”
러시아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 대표 (가운데)는 푸틴 대통령 측근의 부패를 비판하며 서민의 지지를 호소한다.
공산당 하급 운동가들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비판자들은 공산당이 푸틴에 맞설 진정한 의사가 없다고 지적한다.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대표가 러시아 최대의 야당을 이끌면서 수백만 달러를 정부에서 지원받는 대가로 상징적인 반대만 하는 데 만족한다는 얘기다.

그들은 그 증거로 공산당이 푸틴 대통령의 외교정책과 시민자유를 억압하는 법 제정을 열렬히 지지한다는 사실을 들었다. 저명한 러시아 정치 분석가 드미트리 오레슈킨은 “공산당은 그런 게임 규칙을 오래 전에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공산당의 정부 비판이 급진적 변화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사실을 크렘린이 알기 때문에 그런 비판이 허용된다. 열쇠는 푸틴이 쥐고 있다. 그 열쇠는 바로 돈이다.”

공산당에서 탈퇴한 인사들은 더 심하게 비판한다. 2007년 대규모 반대자 숙청으로 공산당에서 제명된 아나톨리 바라노프는 “지금 공산당은 빈껍데기요 모조품일 뿐”이라고 말했다. “공산당의 정치 프로그램은 가짜다. 아무도 그런 프로그램을 실행할 생각이 없다.”

공산당 간부들은 그런 비난에 분노하며 반박한다. 라슈킨 지부장은 “총선이든 지방선거든 모든 선거에서 우리는 붉은 깃발을 들고 승리를 위해 전진했다”고 말했다. “거리 시위에서도 가장 활동적인 야당 역할을 한다.”

동유럽에선 좌파운동이 현대화한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채택했지만 그와 달리 러시아의 현대 공산당은 그런 개혁에 저항했다(좀 더 업계친화적으로 변하려는 시도와 논란 많은 러시아 정교의 포용은 예외다). 레닌과 스탈린의 이미지가 공산당 사무실과 깃발을 지배하며 당의 공식 상징은 여전히 망치와 낫이다. 라슈킨 지부장은 “우린 스탈린과 레닌 등 소련 영웅들의 이름을 영원히 외칠 것이다”고 말했다.

대중의 태도와 보조를 맞추려는 의도다. 스탈린은 소련 국민 수백만 명을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 죽게 했다는 명백한 증거에도 여전히 인기가 높다. 우크라이나와 시리아를 둘러싸고 러시아가 서방과 대치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가 많은 러시아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 매년 실시되는 여론조사에서 올해 처음으로 러시아인의 과반수(52%)는 스탈린의 유혈 통치를 ‘아마도’ 또는 ‘분명히’ 긍정적인 조치로 생각했다. 청년 지도자 오부호프스키는 “러시아엔 ‘승자를 심판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누구보다도 더 훌륭한 승자다. 그는 시간과 자신의 죽음, 자신의 적을 물리쳤다. 아무도 그를 심판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젊은 세대는 그의 이름이 적힌 깃발을 자랑스럽게 치켜든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다. 이런 시점에서 러시아 공산당은 역사가 자신의 편이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오부호프스키는 “조만간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공산당이 다시 집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마크 베네츠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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